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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91화 (91/124)

91화

“왜 안 씻기는 거야. 왜.”

조금의 웃음기조차 없는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악취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담금질해도 씻겨나지 않는 잔향은 그를 괴롭게 했다.

“제발.”

거친 숨결로 토해 내는 말은 간절했다. 너무 거칠게 닦아 낸 나머지 피부가 붉어지는 것이 보이는 데도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해월의 머릿속에는 악취를 지워 내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사라져.”

어째서 안 사라지는 거야.

“윽…!”

눈에서부터 퍼지는 작열감이 머리를 휘저었다. 그 때문에 해월은 그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리라고 생각했던 몸이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다.

고통으로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슬며시 뜨자 연진의 얼굴이 보였다. 연진은 해월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견고함은 연진의 것이었구나.

젖은 해월의 옷이 연진에게 닿았다. 물기가 그의 옷 위로 번져 나갔다.

“…….”

눈에 선연한 핏물 탓인지, 타오르는 노을 탓인지 시야에 붉은빛이 일렁였다.

그 적색 광경 속에 있는 연진은 괴로워 보였다. 이유는 몰라도 그는 아파하고 있다.

해월은 작게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의식을 거치고 한 물음은 아니었다. 그저 반사적이다.

왜 여기 있냐는 물음보다 그 물음이 먼저 나왔다.

“…….”

연진은 대답 대신 해월의 손을 움켜잡았다.

걱정이 되어 해월을 따라왔는데,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는 것이 씁쓸했다. 쓰린 감정이 냉연한 얼굴로 드러났다.

“아….”

잡은 손아귀의 힘이 세서 해월은 크게 저항하지 못하고 물 밖으로 이끌려 나왔다.

뒤늦게 제 자신의 악취가 신경 쓰인 해월은 연진에게서 손을 빼려 했지만, 연진은 놓아주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월을 잡은 채로 나아가기만 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끌려가던 해월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아 이거 잠깐 놔 봐. 나 아직 다 안 씻었단 말이야.”

그 말에 연진은 걸음을 세우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조금 전의 연진은 마냥 괴로워 보였는데 이제 보니 화가 난 듯 보였다. 해월은 그 이유를 여직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연진이 제게 짓는 저 표정이, 내보이는 이 감정이 낯설어서 해월은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물에 푹 젖은 머리칼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연진은 말없이 해월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던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 바람에 해월은 조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팔에서 피가 날 때까지 씻었는데 뭘 더 씻겠다고.”

“…….”

해월은 시선을 내려 제 팔을 보았다. 하얀 팔뚝 위에 손톱으로 긁힌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

손톱 사이에 얼핏 피 같은 것이 굳어 있었다.

“그래도…냄새나잖아.”

“하나도 안 납니다.”

연진은 해월의 말을 곧장 부정했다. 그리고 충혈되어 있는 해월의 오른쪽 눈가를 살며시 쓸어 주었다.

그 손길이 간지러워서 해월은 조금 몸을 떨었다.

“눈은 괜찮습니까.”

“…뜨겁긴 한데 그리 나쁘지는 않아.”

타는 것처럼 아팠던 전의 상태에 비하면 지금은 괜찮은 편이었다.

문득 한기를 느낀 해월은 재채기를 했다.

“에취!”

이제 가을이 다 되었는데 해가 떨어진 시각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니 추울 만도 했다.

하지만 갈아입을 옷 같은 건 처음부터 갖고 오지 않았기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연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벗으십시오.”

그 말에 해월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맨몸으로 가라는 거야?”

“…하아.”

연진은 짧게 한숨을 내뱉으며 그게 무슨 헛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제가 입고 있던 도포를 벗어 해월에게 건넸다.

“젖은 옷보다는 이걸 입는 게 나을 겁니다.”

“아.”

그제서야 연진의 말을 이해한 해월은 곧바로 도포를 받아들며 제 옷고름을 풀었다.

끈이 풀리는 걸 보기가 무섭게 연진은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

해월은 그저 ‘저놈 또 부끄러워하는구나.’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실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쪽은 옷을 갈아입는 제 쪽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다 입었어.”

그런데 연진은 몸을 돌리자마자 시선을 돌렸다.

“……?”

왜 저러나 싶었다가, 문득 해월은 자신이 맨몸에 도포만 입고 있는 해괴한 차림새라는 것을 자각했다.

게다가 소매도 길고, 전체적으로 품이 넉넉해서 누가 봐도 얻어 입은 모양새였다.

‘그렇게 이상한가.’

지금처럼 눈을 피할 정도로 이상하다면 그냥 젖은 옷을 도로 입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틀렸는지, 연진은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해월의 옷깃을 여며 주었다.

“…….”

그 손길에는 분명히 온도가 있었다. 아주 따뜻한 온기였다.

저도 모르게 잇새가 벌어졌다.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았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눈에 힘을 주기가 힘들었다. 벌어진 잇새로 자꾸만 뜨거운 숨이 나왔다.

그때, 이상을 먼저 감지한 건 해월이 아닌 연진이었다.

연진이 다급히 해월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뜨거운 온도에 짐짓 놀랐다.

“열이 꽤 심합니다.”

“아, 어쩐지…조금 어지럽더라….”

눈만 뜨거운 줄 알았더니 그냥 머리 전체가 다 뜨거운 모양이다.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나자 강둑이 허물어져 쏟아지는 강물처럼 현기증이 밀려왔다.

도무지 제대로 몸을 가눌 수가 없어서 해월은 그대로 연진의 품에 고개를 떨구었다.

해월을 끌어안은 연진은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쌌다.

“열이 너무 심해요. 어서 의원에게 보여야 합니다.”

“의원을 불러도… 소용없을 거야….”

이건 요괴의 핏방울 때문에 생긴 열감이지, 고뿔 같은 것이 아니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면 금방 씻은 듯이 나을 것이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해요. 어서 제게 업히십시오.”

“괜찮아. 그냥 부축….”

…만 해 달라고 말하려 했는데 연진의 매서운 눈을 마주하고 나니 차마 본래 하려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업힐게.”

이럴 때만큼은 연진을 당해낼 수 없었다.

***

고뿔에 취약한 편인 만큼 해월은 이미 열감에 익숙했다.

꼭 이렇게 뜨거운 열이 머리를 지배할 때면 상념이 가득 차서 배로 어지러웠다.

주막까지 당도하는 내내 기억이 드문드문 끊겼다.

연진에게 업혀서 산을 내려가던 순간, 하련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에 있던 주막에 들렀던 순간, 도포만 입은 저와 연진을 야살스럽게 보던 주모와 눈이 마주친 순간…

괜히 머리가 더 뜨거워진 것 같았다. 특히 눈가의 통증이 거세진 느낌이다.

해월은 힘없이 손을 올려 눈가를 짚었다.

“어지러….”

무의식적인 말에 뒤따라 붙는 음성이 있었다.

“어지러워요?”

익숙한 음성에 해월은 눈알을 데록 굴렸다. 계속 옆에 있었구나.

연진은 자신이 열감에 멍하니 넋이 나가는 동안 줄곧 곁에 있어 준 것이다. 하련방으로 돌아가면 불편해할까 봐 주막에 들러서. 혹여나 추위를 탈까 이렇게 두꺼운 이불까지 덮어 주고.

가끔 해월은 궁금했다. 연진은 왜 이렇게까지 제게 잘해 줄까 하고.

이렇게 따스한 보살핌을 받을 정도로, 해월은 연진에게 잘해 준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연진은 숨 쉬듯 자연스레, 마치 당연한 것처럼 저를 챙겨 줄까.

눈에 힘이 안 들어가서 자꾸 반쯤만 떠진다. 그게 불만스러워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많이 아프십니까."

“아니….”

그냥 표정을 찌푸린 것뿐인데 그걸 고통을 참는 것으로 오해하는 연진이 웃겼지만, 골이 울려서 제대로 웃지는 못했다.

“…….”

연진은 저를 보며 피식 웃는 해월의 이마에 손을 얹고, 다른 손은 해월의 손을 그러쥐었다.

손은 이리도 찬데 이마는 불처럼 뜨거우니 여간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상태가 이런 지경인데도 살풋 웃는 해월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빨리 열이 식길 바라서 찬물과 수건이라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고 해월에게 얹었던 손을 뗐다.

그런데 물리려던 손을 해월이 다시 붙잡았다.

“시원하니까…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해월은 연진의 손을 얼굴에 댄 채 작게 비비적댔다.

“…….”

붙잡고 있는 손을 떼 낼 수도, 손에 닿은 뜨거운 온기를 잃을 수도 없었기에 연진은 그대로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

해월은 아득한 열감 속에서 꿈을 꾸었다.

죽도록 후회하는 날의 꿈을.

그 무렵에 백난국은 대흉년을 맞아 길가에 굶어 죽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 시신이 썩어 악취를 풍기고, 악취에 이끌린 짐승들이 몰려들고, 역병이 창궐하고, 다시 사람이 죽고….

그렇게 죽고 또 죽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나마 제도 근처는 황궁에서 구휼미를 풀었다지만 제도에서 멀리 사는 백성들은 그저 고통받는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생겨나는 음기는 백난국땅에 치명적이었다. 이미 백난국은 수많은 이들의 피를 거름 삼아 세워진 나라였던 탓이다.

각고의 노력 끝에 지킨 이 땅이 다시금 혼란에 빠지자, 황실은 영하들로 하여금 땅을 정화시키도록 했다.

정화된 땅은 비옥하게 변했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며 백성들의 삶은 다시금 안정을 찾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도 근처의 이야기이다.

선택받지 못한, 버려진 자들의 삶은 여전히 척박하고 끔찍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아버지. 이제 어찌 하실 겁니까.’

‘어쩌긴 뭘 어째.’

‘아버지는 늘 마을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흉년과 기근을 고작 한 명의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지 않아요.’

해월과 선학경은 영력을 체득한 인간이었기에 굶주림에도 강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어제만 해도 단곡에서는 열 명이 죽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열 명이나 하루 만에 숨을 거둔 것이다.

‘짐작건대 이 마을에서 다가올 봄을 볼 수 있는 자는 절반도 안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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