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90화 (90/124)

90화

정신이 들었을 때 해월은 허름한 방 안에 누워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 생활은 어떠십니까. 행수 어르신.’

‘송 행수?’

송 행수… 아니, 지금보다 훨씬 앳된 기색이 있는 모습의 송수련이었다.

해월은 재빠르게 제 손을 내려다보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의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낯선 시야로 보는 낯선 방, 그리고 옛 모습을 한 송수련.

‘이건 내 기억이 아니야.’

이윽고 해월은 자신이 연 씨의 기억을 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네년이 감히 거둬 준 은혜도 모르고 나를 내쫓아? 천벌을 받을 것이다, 네 이년!’

‘아이고. 두려워라.’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아? 내 기필코 너를 찢어 죽일 것이야.’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할망구가 어찌 그리 악을 쓰실까.’

젊은 모습의 송수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연 씨를 조롱했다. 그리고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눈앞에서 내 어머니의 반지를 태웠을 때부터 당신을 찢어발길 생각만 하고 살았는데… 뜻이 통하여 다행입니다. 그때 당신이 내 반지를 태우지만 않았어도 저도 이리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해월도 자세히는 몰랐던 사건의 내막이었다.

‘하나 내가 그리 모질지는 못해서 말입니다. 허구한 날 기녀들을 팔아넘겼던 당신과 달리 나는 벽촌에 가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죽으면 내가 친히 장례도 치러 드릴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죽으셔도 됩니다.’

‘송수련…! 네 이 망할… 컥, 쿨럭!’

연 씨는 과오에 대한 죗값을 치르는 듯 병에 걸려 있었다. 송수련은 그런 연 씨에게 웃으며 악담을 퍼부었다.

해월은 제가 왜 이 광경을 보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해월에게 적선하듯 시야가 일렁이더니 이번에는 어느 산자락이 보였다.

‘내가, 내가 몸이 있어!’

연 씨는 제 몸을 더듬으며 자신이 실재한다는 것을 만끽하고 있었다. 제법 꼴사나웠던지라 해월은 심드렁하게 관망했다.

‘이것보다 이전에 있던 일을 보여주지.’

해월이 궁금했던 건 연 씨가 요괴가 된 경위였지, 요괴가 되어서 기뻐하는 모습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다음에 보이는 상황은 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송수련, 죽여 주마….’

복수를 눈앞에 두고 이성을 잃은 연 씨의 기억과 시야는 온통 흐렸다. 그래서인지, 연 씨는 예전의 송수련이 쓰던 방에 들어섰다. 세월이 오래 지나 같은 방을 쓰고 있을 리 없는데도.

갑자기 방문이 열리자 안에 있던 은명은 몸을 움츠리며 두려운 듯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 있….’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한마디. 그것이 은명이 세상에 내뱉은 마지막 음성이었다.

순식간에 죽임을 당한 은명은 그대로 쓰러졌다.

해월은 침음하며 눈을 감았다.

연 씨의 시선으로 은명을 보고 있자니 꼭 자신이 죽인 것처럼 꺼림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 일의 진상을 알려면 피하지 말고 봐야만 했다. 그러나 힘겹게 눈을 뜬 보람도 없이 어지러운 시야 속에 제가 꾸며 낸 ‘송수련의 삼일장’이 보였다.

이때, 해월은 순간이지만 연 씨가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쾌감이로군.’

환술 속이라는 것도 눈치 못 챌 만큼 판단력이 흐린 주제에 연 씨는 자신의 복수를 완성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눈에 보이는 상황은 연 씨에게 검을 겨누던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딴 걸 보고 싶은 게 아닌데.’

해월이 진정 알고 싶었던 건 연 씨가 요괴가 되도록 만들고, 은명의 시신에 환시를 걸어 둔 배후였지 이런 것 따위가 아니었다.

대체 기척은 어떻게 숨긴 건가? 일전 축일 날에 느꼈던 기척이 연 씨의 것이었던가?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하나도 구할 수 없었다.

눈앞에 그려진 연 씨의 상황이나 사실 따위는 해월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수확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연 씨의 눈으로 본 것 중 새로운 것이 있다면 몸은 송수련을 보호하고 있지만, 눈은 계속해서 저를 좇고 있는 연진의 모습이었다.

움직이고는 싶은데 해월의 명 때문에 송 행수에게서 떨어지질 못하니 안절부절못하는 꼴이었다. 생전 처음 본 요괴에 대한 겁보다는 다른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해월이 요괴에게 달려들 때, 연진의 얼굴은 비로소 하얗게 질렸다. 뒤를 볼 여유가 없어서 몰랐는데 제법 걱정하는 것 같았다.

‘…순진하기는….’

저도 그렇고 송 행수도 그렇고 연진의 걱정과 보호를 받을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인데.

연진은 아마 그걸 모르거나, 알고도 저러는 게 분명했다. 우직하고 때때로 냉철하지만, 다정한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

이내 시야가 점멸되었다.

다시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였을 때, 해월의 눈앞에 있는 것은 연진과 송 행수였다.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찰나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물속에 잠겨 있던 의식이 끄집어내어지는 기분이었다.

현실의 악취가 코를 찔렀을 때, 해월은 뒤늦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가까이 오지 마.”

코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 낸 해월은 욱신거리는 오른눈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사부!”

“선해월!”

둘 다 그들답지 않게 큰 소리로 해월을 불렀다.

와중에도 그것이 웃겨서 해월은 힘없이 웃었다.

“이 음기에 직접 닿으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물러서.”

“…….”

엄한 명령에 연진과 송 행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해월은 무거운 다리를 움직여 남은 요괴의 사체에 다가갔다.

그리고 검은 피와 악취가 가득한 사체 속을 헤집었다. 이미 사람의 모습을 잃은 요괴였던지라 몸집이 커다란 애벌레의 내장을 뒤적거리는 짓과 비슷했다.

“잡았다.”

짧게 중얼거린 해월은 그 속에서 검은 종이를 꺼냈다. 종이는 사람의 형상과 흡사하지만 보다 단순한 모양이었다.

권속(眷屬).

누군가 지박령이된 연 씨의 시체에 사술을 걸어 권속으로 부린 것이다.

‘이런 사술을 쓸 수 있는 자가 백난국에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실소를 금하기도 어려웠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런 일을 꾸몄는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은 선명했다.

어쩌면 이 일은 저조차도 손대서는 안 됐을 일인 것 같다. 연 씨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이성을 붙잡지 못한 요괴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이 정도 고생으로 끝나진 않았을 것이다.

해월이 종이를 움켜쥐자, 그 종이는 순식간에 진흙처럼 굳더니 손안에서 부서져 내렸다.

상황은 이렇게 잠시 무마되는 듯했다.

그러나 해월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

환술로 분리해 놓은 공간은 어느 샌가부터 허물어져 완전히 깨졌다는 걸.

다시 말해, 극심한 비명 소리와 악취를 느낀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

해월은 소매로 턱에 흐르는 검은 핏물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연진과 송 행수. 그리고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달려온 기녀들과 기방 하인들이 보였다.

연진과 송 행수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해월을 보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광경과 끔찍한 악취. 저들은 모두 처음 겪어 보는 일이겠지.

아무도 쉽게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들의 눈에 담긴 뜻을 해월이 못 읽었을 리 없다.

‘내가 두려운가.’

아니면… 더러운가.

악취가 나는 검은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으니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씁쓸한 것은 별수 없다.

나름대로 기방 사람들에게 안 들키고 일을 해결하려 했는데 완전히 어그러진 듯했다.

‘괜찮아.’

이 또한 익숙한 일이니까.

볼을 타고 뜨거운 무언가가 흘렀다.

눈물은 아니었다. 해월은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울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

해월은 살짝 멍하니 손등으로 제 눈가를 닦아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피였다.

요괴의 피가 들어갔던 오른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핏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해월의 무감한 볼 위에 선연한 홍색의 피가 흘렀다.

때아닌 소란에 행랑으로 모여든 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겁했다.

밤과 같은 색의 피를 닦고 있는 해월의 모습은 산 자의 것이라고 볼 수 없었다. 죽음에 가까운, 사신의 모습 같았다.

그런 자가 흘리는 홍색의 피눈물은 가히 이질적이었다.

“…….”

해월은 그대로 발을 돌렸다. 찝찝하고 불쾌해서 씻어야겠단 생각만 들었다. 욕간을 이용할 수는 없었기에 근처에 있는 냇가에서 씻을 요량이었다.

“사부.”

연진은 멀어져 가는 해월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해월은 몸을 돌려 그 손을 쳐 냈다.

“더럽잖아. 잡지 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눈에서 피가 나는데.”

연진은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해월의 눈을 보았다. 충혈되어 피를 흘리고 있는 눈은 누가 봐도 고통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해월의 얼굴에는 크게 아픈 기색이 없었다.

“…나한테는 그게 중요해.”

나직하게 떨어지는 음성은 힘이 조금 빠져 있었다. 무언가 깨달아서였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래왔다. 제게 중요한 것은 연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고, 연진에게 중요한 것은 그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토록 다른데, 어째서 함께하는 걸까.

새삼스러운 의문이 피어올랐다.

“나… 너 두고 어디 안 가.”

연진이 달리 묻지도 않았는데 해월은 변명과 닮은 설명을 했다.

“금방 다시 올 거니까. 여기서 기다려.”

웃으며 말하는 해월을, 연진은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

해월은 꼭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웃고 있었다. 울지 않고 우는 법을 터득한 사람처럼. 그의 눈은 메마르기만 했다.

결국 아무것도 없이 홀로 떠나는 것 같아서. 연진은 그것이 마음에 걸렸다.

***

기방 뒤편에 있는 산에 냇물이 있는 것을 봐 둔 적이 있다. 해월은 부러 그곳으로 향했다.

굽이진 산길을 따라 자라난 나무와 풀들이 보였다. 그 싱그러움을 감상할 여유가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었다.

영력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 해도 이렇게 음기가 가득한 요괴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몸에 좋을 리는 없으니까. 빨리 씻어 내는 게 상책이었다.

간만에 힘을 좀 썼더니 피곤하기도 했다. 서둘러 음기를 씻어 내고, 잠들고 싶었다.

석양이 지고 있다. 붉은빛의 조각이 흩뿌려진 냇가에 다다른 해월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옷도 벗지 않은 채 발을 담갔다.

앞으로 걸으면 걸을수록 수면 아래에 몸이 잠겼다. 순간, 아예 잠겨 버리는 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봤자 냇물은 가슴팍에도 못 미치는 깊이였지만.

해월은 욱신거리는 눈의 통증을 무시한 채 물을 뒤집어쓰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은 핏물은 모두 씻겨 내려갔다. 그러나 남은 악취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해월의 코를 찔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