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은명의 시신은 넝마가 되었지만, 얼굴만큼은 깨끗했다. 고로 요괴는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삼일장 날에 똑같이 얼굴에 상처를 내 줄 요량인 거다.
날짜를 제대로 셀만큼의 이성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 망할 년 죽은 얼굴에 흉이 생겨 봤자 내가 당한 것보다 더했을까….”
송 행수는 지친 기색이 완연한 와중에도 이를 갈았다.
연 씨는 그녀를 포함하여 수많은 기생들을 괴롭게 한 악인이다. 그런 연 씨를 직접 죽이지 못한 것도 분한데 그 시신까지 멀쩡히 두기 싫었던 것뿐이다.
“이럴 줄…정말 몰랐단 말이야.”
송 행수가 울분을 삭이는 듯 제자리에 멈춰 서자 그녀를 부축하던 연진도 덩달아 멈춰 섰다.
해월은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
“업보란 그런 거야.”
“…….”
“이번 생이 아니더라도, 다음 생에, 혹은 그다음 생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어. 그게 꼭 네가 아니더라도.”
가족이 될 수도, 친우가 될 수도, 혹은 사랑하는 이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과오를 마주하고 업을 씻어 내는 일은 중요하다.
‘나도…언젠가 값을 치르겠지.’
정화 의식 따위로 지나온 나날의 모든 업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제가 했던 말처럼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죗값을 다 치를 터.
다만 해월은 그때를 유보할 뿐이다.
송 행수는 주먹을 움켜쥐며 터져 나오려는 분노와 슬픔을 간신히 참았다.
“은명이… 그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송 행수는 은명을 기녀로 들인 것, 그 행랑을 내어 준 것, 진즉에 내보내지 않은 것, 지환을 준 것… 그 모든 것을 후회했다.
해월은 쉬지 않고 정면을 향해 나아가며 말했다.
“불운을 겪는 데 달리 이유가 있겠어. 그냥 은명 낭자의 삶이 거기까지였던 거야.”
안타깝지만 은명의 죽음은 그리 설명되는 게 맞았다.
죽음에는 수십만 가지 이유를 붙여도 무용하니까. 그저 운이 없었다…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하다.
괜히 위로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적선이나 위선이 될 테니. 송 행수는 제 진면을 알고 있으니 꾸밀 것도 없었다.
“그러니 더 후회하기 싫다면 계속 걸어.”
계속해서 나아가라. 그것이 해월이 해 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
기녀들을 다른 곳에 있도록 조치해 둔 해월은 연진과 함께 행랑채 곳곳에 부적을 붙였다.
영력을 손에 두르고 부적을 누르면 부적은 간단히 붙는다. 이를 경험 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연진에게도 시켜보았는데 금세 방법을 터득했다.
어느새 행랑채의 쪽문과 담벼락 곳곳에는 그들이 붙인 부적이 수두룩했다.
“이런 게 효과가 있을까요.”
“그럼. 누가 만든 건데.”
아예 요괴를 잡을 수준의 부적은 아니어도 발목을 잡을 정도는 된다. 이 부적들은 혹여나 요괴가 탈출하려 할 때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몇 개는 피를 내어 쓴 부적이라 그런지 해월의 손가락 끝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부적을 어느 정도 붙이고 난 후, 연진의 시선은 줄곧 해월의 손끝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얀 손끝에 이미 굳은 피와 아직 굳지 않은 피가 뒤섞여 보기가 안 좋았다.
그래서 괜히 해월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게 되었다. 만지작거려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는데.
“왜 그래?”
그 손길이 길어지자, 해월이 질문을 던졌다.
“…….”
연진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해월을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연진은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는 눈앞의 사부는 죄가 없다. 다만 조금… 어리석은 것뿐이다.
연진은 그렇게 위안 삼았다.
그 측은한 시선의 의미를 알 리 없는 해월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멀찍이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송 행수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선해월.”
“어?”
“너는 정말…바보천치야.”
“갑자기 왜 욕을 해?”
해월의 눈에는 난데없이 바보천치라 욕을 하는 송 행수나, 저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연진이나 하나같이 다 이상하게 느껴졌다.
일단 두 사람 다 제쳐 둔 해월은 다른 곳에 부적을 붙이려 발을 움직였다. 해월이 제법 멀찍이 떨어지자 송 행수는 덩그러니 서 있는 연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홀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해월 쪽을 보며 말했다.
“공자님. 꼭 저런 놈을 은애해야겠어요?
“…….”
무어라 할 말이 없는 터라 연진은 침묵했다.
“아까는 나 정도 됐으니 그냥 들었지. 아니었으면 쟤 벌써 뺨 맞았어요.”
회한에 잠겨 있는 그녀에게 냉정하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말을 한 해월이다. 새삼스럽지만 지금껏 목숨 보전하며 살아온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아까는 연진도 적지 않게 놀랐다.
예상했던 것보다 해월의 말이 더 차가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송 행수와 연진은 둘 다 어렴풋이 알고 있다. 무심하고 냉정해도 그것이 해월 나름의 다정함이라는 것을.
“……사부는 그저 서투른 것뿐입니다.”
“서투르기는. 사람 마음 후벼 파는 말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건 몇 년이 지나도 여전하던데.”
“…가르쳐 주면 다 잘 배울 겁니다.”
“그건 쟤 양아버지가 저놈 다리를 분지르면서까지 했던 거고요.”
흡사 창과 방패와 같은 대화가 오갔다.
“계속 노력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노력한 게 저 모양 저 꼴인데요. 뭘.”
“…제가 도우면 괜찮을 겁니다. 사부는 본래 다정한 사람이니까요.”
“아무리 봐도 저놈이 바뀌는 것보다 공자님이 물드는 쪽이 빠를 것 같습니다만.”
연진과 송 행수의 언쟁 아닌 언쟁은 승패를 보지 못하고 끝났다.
해월이 때가 왔음을 알렸기 때문이다.
***
해월은 수의를 입고 관에 누워 있는 송 행수에게 지환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제 손가락에 그것을 끼운 후, 살짝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여차하다가 내가 죽으면 어쩔 거니.”
“죽여도 내가 죽이고, 죽어도 내가 죽어.”
“나를? 아니면 요괴를?”
“둘 다.”
싱긋 웃으며 하는 대답치고는 내용이 살벌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연진은 어쩐지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저토록 실없고 날 선 대화를 나누는 것이 두 사람의 골을 메워 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맨정신으로 듣기에는 여전히 적응 안 될 대화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송 행수 옆에 있어야 돼. 사술을 쓸 거라서 운 나쁘면 영력이 없는 인간은 미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연진은 송 행수의 곁에서 영력을 펼쳐 사술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해월은 준비해 둔 단도로 다시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바닥에 술식을 적었다.
“생자의 혈을 바쳐 삼라만상을 비트니, 허상이 도래하리라.”
진언을 외자, 피로 쓰여진 술식의 색이 점점 검게 변하더니 이내 타오르듯 허공에서 사라졌다.
이윽고,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처럼 세상이 일렁였다.
술식이 발동되는 순간, 그들을 둘러싼 세상이 일렁였다.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본 적 없던 이상한 빛깔의 하늘이 머리 위에 떠올랐다.
마치 현실이 아닌 꿈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지독한 악몽 속에.
그 세상에서 태연함을 유지하는 것은 해월뿐이다.
이로써 요괴를 유인하기 위한 덫은 완성되었다.
현실과 분리된 환술의 세계의 주인은 해월이다. 하련방에 들어오려는 요괴는 이곳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많은 갈림길 중 하나만을 남겨 둔 채 나머지 전부를 막아 놓는 행위와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다.
그 사이 해월이 만들어 낸 환영은 사람의 형체로 굳어져 장례 행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연진과 송 행수는 짐짓 놀란 듯했지만 환영들 틈바구니에 섞여 자연스럽게 삼일장 절차에 합류했다.
간단한 눈속임은 끝났다.
해월은 쪽문의 앞에 섰다.
은명이 죽었던 순간. 옆방의 기녀들은 그녀가 죽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고로 요괴는 필히 제 모습을 숨길 줄 알 것이다.
아마 환시로 속이는 게 가능한 모양인데. 환술의 세계에서 환영은 역설적으로 실제가 된다.
해월은 저 멀리서 사악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꼈다. 그 감각을 느낀 것은 연진도 마찬가지였다. 한껏 긴장한 그는 해월을 쳐다보았다.
안심하란 의미에서 슬쩍 웃은 해월은 이내 표정을 없애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해월의 손안에 푸른 영기가 뻗어 나갔다. 이내 그 영기는 검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영력으로 도구를 만드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과 큰 영력 소모를 담보로 해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백 번 검을 쥐어 본 해월의 손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손잡이를 잡았다.
‘가까이에 있어.’
흑청색 눈동자에 푸른 영기가 일렁였다. 영안을 최대한으로 각성시키자 송 행수의 관 옆에 검고 붉은 기운이 보였다.
‘찾았다.’
그리고 거짓으로 점철된 장례 행렬을 향해 달려나갔다.
청량한 검기를 뽐내는 칼날이 매서운 속도로 허공을 갈랐다.
“아아악!”
비로소 실체가 드러난 요괴의 갈라진 목덜미에서 검은 피가 솟구쳤다. 끔찍한 비명에 세상이 울리는 것 같았다.
“칫.”
조금 얕았는지 목이 떨어지지 않았다.
요괴의 정체가 눈에 보이게 되자, 연진과 송 행수 곁에 있던 환영은 사라졌다. 연진은 해월이 명했던 대로 송 행수를 보호했다.
해월은 요괴에게 검을 겨눈 채로 읊조렸다.
“가지면 안 될 것을 갖고 있구나.”
검이 요괴의 살을 가르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저 썩은 육신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업보로 지박령이 된 귀신이 요괴까지 되었으니… 천도하긴 글렀군.”
해월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한 건지, 괴이하게 튀어나온 연 씨의 붉은 눈은 해월의 뒤편에 있는 송 행수에게 박혀 있었다.
“저, 년은! 내가, 죽였는데…!”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뚝뚝 끊기고 어둑한 목소리였다.
말은 할 수 있으니 나름의 이성은 있는 모양이다.
송 행수는 그런 요괴에게 물러서지 않고 입을 열었다.
“네년이 죽인 건 내가 아니야.”
“……!”
“내 지환을 끼워 준, 내 기녀라고.”
그 말에 연 씨의 검은 귀기가 이전보다 더 거세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지환, 송, 수련. 나를, 죽인 년.”
괴기스러운 몰골을 하고서도 요괴는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이대로라면 일이 커질 게 뻔했다.
그러나 해월은 이 순간 허무감을 느꼈다.
“당신을 죽인 건 송수련이 아니라 당신의 업보입니다.”
“죽, 여. 버릴, 거야.”
“대화가 좀 되나 싶었는데… 도대체 이 상태로 낭자는 어떻게 죽인 겁니까.”
지금껏 만나 왔던 다른 요괴에 비하면 연 씨는 비루한 수준이었다. 이런 요괴가 정확히 무슨 수를 써서 기척을 숨기고 살인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만 여간 허탈한 것이 아니었다.
해월은 자세를 한 번 낮춘 뒤, 그대로 쏜살처럼 달려나갔다. 바람의 저항을 최대한 막은 그는 직선으로 검을 겨누어 연 씨의 이마 한가운데에 검을 찔러 넣었다.
“끄아아악!”
그대로 힘을 주어 내려앉자 요괴의 몸이 갈라졌다.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요괴는 검은 피를 뿜어냈다.
남은 살점들이 꿈틀대며 담벼락을 넘으려 했으나 미리 붙여 둔 부적들이 그 살점을 태웠다.
예상보다 더욱 솟구치는 요괴의 피는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과거 이 악취에 간신히 익숙해졌었는데 오랜만에 맡으니 다시금 신물이 올라왔다.
그때, 한 발 뒤로 물러나려던 해월의 오른눈에 검은 핏방울 한 방울이 들어갔다.
“윽…!”
해월은 그대로 눈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눈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아팠다. 머리까지 울렁이는 듯했다.
그때, 바닥을 더럽히고 있는 검은 피 사이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투둑.
그게 제 코에서 흐른 피라는 것을 알아채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사위가 고요했다.
멀리서 저를 향해 달려오는 연진과 송 행수가 느릿하고 흐리게 보였다.
해월의 정신은 그대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