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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8화 (88/124)

88화

해월은 담벼락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맨손으로 담벼락 아래의 흙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손이 더러워지고 손톱 사이에 작은 돌멩이가 끼는 것은 개의치도 않았다.

급히 땅을 파던 해월은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없어….”

뒤늦게 해월에게 다가온 연진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주구가 없어. 이전에 내가 하련방에 왔을 때 묻어 뒀던 주구가 사라졌어.”

분명 이곳이 맞았다. 누각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담벼락 아래의 흙바닥.

그곳에 분명 액을 막아 주는 술식을 걸어 둔 주구를 묻었었는데 지금 해월의 눈앞에 있는 건 흙과 검은 재뿐이었다.

“주구를 태운 거야.”

강한 영력을 가진 이가 의도를 가지고 만지면 주구는 불타 버린다. 혹은 강한 사기에 닿아도 마찬가지다.

“사부께서 쓰신 주구가 탔단 말입니까.”

“…….”

해월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자만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월은 지금껏 선학경 외에 자신만큼 주술을 잘 다루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어지간한 신관보다 영력의 수준도 뛰어나다고 믿어 왔다.

그런 자신이 쓴 주술을 간단히 풀어 버릴 만큼의 실력자가 존재한다니.

“하….”

웃기는 일이었다.

‘제대로 체면을 구겼군.’

도대체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꾸몄을까.

물음은 계속되고 시름은 깊어져만 갔다.

***

은명이 죽고 송 행수도 불출하고 있는 하련방은 여전히 흉흉한 분위기였다. 늘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그곳이니 유독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흉흉한 것은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하련방 사람들의 마음도 이래저래 혼란스러웠다.

“은명이가 행수 어르신께 어디 하루 이틀 혼났냐. 왜 축일 전에 연습할 때도 방으로 데려가서 혼내셨잖아.”

“암만 그래도 어떻게 은명 언니가 자결을….”

“행수 어르신도 쓰러지시고… 이 하련방이 어찌 될런지.”

“야 너 그때 행수 어르신이 역정 내시는 거 못 봤어? 우리가 아무리 노류장화래도 같이 지내던 기녀가 죽었는데 어찌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고….”

은명이 쓰던 방에 무언가 단서가 있을까 하여 행랑으로 향하던 해월은 우연히 기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러게 엄히 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래도.’

송 행수는 나약했던 자신의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여인이었다. 자신과 달랐으면 해서 하련방 기녀들을 혹독히 훈련시켰다는 것쯤은 해월도 진작 눈치챘다.

물론, 훈련을 받는 처지에서는 제법 미울 만도 했다.

송 행수라고 이런 분위기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예상하고도 그런 엄포를 놓은 게 분명하다.

그녀가 부재한다면 뒷말이 나올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해월이 수면술을 걸어 둔 것은 그래서였다.

송 행수…아니, 송수련은 멈출 필요가 있다.

대강 착잡한 표정을 갈음한 해월은 기녀들에게 다가갔다.

“낭자들, 뭐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아…퇴마사님.”

기녀들 중 몇몇은 해월과 나름대로 면식이 있던지라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송 행수의 뒷얘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셈이니 떨떠름할 만도 했다.

해월은 못 들었던 척 말을 이었다.

“혹시 은명 낭자가 생전에 안 좋은 일을 겪었다거나, 사이가 안 좋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은명 언니는 성정이 고와서 남의 미움을 살 사람이 아닙니다.”

“근자에도 별로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기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은명은 기녀로서의 자질은 조금 부족하지만, 성정이 곱고 반듯한 여인이라고 한다.

제 잘못으로 누군가의 미움을 살 사람이 못 된다고.

“허면… 송 행수와는 어찌 지냈는지 아십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낭자들께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없을 겁니다.”

사뭇 간곡한 해월의 음성에 머뭇거리던 기녀 하나가 입을 열었다.

“…우리 다 행수 어르신께 자주 꾸중을 듣는 편이지만, 은명 언니는 유독 더 했어요.”

“그렇군요.”

해월은 나직이 답했다.

그때, 다른 기녀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행수 어르신이 너무했습니다. 은명 언니가 행수 어르신을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맞아요. 예전 행수 어르신이 쓰던 방을 쓰게 됐다고 뛸 듯이 기뻐했을 정도예요.”

그 말을 하는 기녀의 표정은 몹시도 씁쓸했다.

“…예전 송 행수가 쓰던 방을 은명 낭자가 썼다고요?”

“예, 한창 하련방 일패기생으로 이름 날리던 시절에 쓰셨던 방입니다.”

순간, 해월은 진실의 잔해를 마주한 기분을 느꼈다.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사안이 더 심각하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

송수련은 온몸이 졸음의 강에 빠진 것처럼 나른했다.

이렇게까지 졸렸던 적이 있던가.

자도 자도 끝이 없었다. 며칠은 꿈속을 헤맨 것 같았다.

몽롱한 의식을 울리는 음성이 흐릿하게 들려왔다.

“송 행수.”

“……..”

“송수련. 일어나 봐.”

“……..”

가늘게 뜬 눈에 보이는 것은 해월의 얼굴이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본 얼굴이기도 했다.

해월은 아직 완전히 잠이 깨지 않은 그녀를 향해 지환을 내밀었다.

“이거 본래 네 것 맞지?”

“…내 것이었지.”

“은명 낭자의 손에 끼워져 있길래 가져왔어. 한데 이거 원래 쌍지환이지 않았나?”

“…일찍도 물어본다 이 바보천치야. 하나는 옛날옛적에 망할 연 씨 년이 내 눈앞에서 태워 버렸거든?”

송 행수는 오래 잠이 든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잠이 깨자마자 뜬금없는 소리를 연달아 들었더니 더 골이 아팠다.

“…역시 그런 거구나….”

해월은 무언가 깨달은 듯 중얼거렸다.

“무슨 일인데.”

“대충 알았거든.”

“뭐를…?”

“은명 낭자가 죽은 이유.”

“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되물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은명의 사인은 자결이었다. 이해할 만한 이유는 짐작되지 않아도 현실이 그리 말해 주고 있었다.

저항의 흔적이 없었고 그럴만한 움직임이 있었더라면 옆방의 기녀도 분명히 들었을 것이다.

그녀는 해월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되지도 않을 소리할 거면 이만 나가.”

“내가 은명 낭자가 죽은 이유를 밝힐 수 있다면 어쩔 건데.”

“…선해월. 너는 예나 지금이나 다 쉽구나.”

얼핏 비아냥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이에 해월은 차분한 어투로 답했다.

“송수련.”

“…….”

“나는 지금 매 순간이 아쉬운 사람이거든?”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아까웠다.

봄이 올 때까지 제 숨이 버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작금의 해월이 바라는 건 연진과 봄의 바다를 보러 가는 것. 그뿐이다.

“그런 내가 구태여 이 일에 관여하는 건, 내가 네 아버지를 죽인 빚을 청산하고 싶어서야.”

해월은 그녀가 먼저 원망을 드러내 줘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저 역시 머릿속에 담은 생각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으니.

“너도 네 기녀와 이 하련방을 지키고 싶다면 더는 그런 태도로 날 대하지 마.”

강요라는 것을 알지만 그녀는 지금 냉정을 찾을 필요가 있다. 동시에 해월은 지금 그녀에게 파문을 일으킬 만한 사실을 전해야만 한다.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데.”

“간단해. 그저 네가 송수련으로 있어 주면 돼.”

“…….”

당연하게도 그녀는 해월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가 송수련인데 송수련으로 있어 달라니.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해월은 혼란스러울 그녀를 더 이상 배려해 줄 수 없었다.

“다만, 죽은 채로.”

“나와.”

해월은 본래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행동을 먼저 하는 부류였다.

옛날이었다면 송 행수가 수면술의 여파에서 헤어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거나 했겠지만, 지금은 그도 여유가 없었다. 기왕이면 빨리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해월의 채근에 송 행수는 일전에 받은 충격을 지워 내지 못한 채 일어나야만 했다. 받은 충격도 충격이지만 오래 누워 있던 몸이라 휘청거렸다.

때맞춰 그녀의 팔을 잡은 해월은 너무 제 생각만 하고 밀어붙였나 싶어 미안해지려던 차였다.

“부축해 줄게.”

그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연진이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 어, 그래.”

얼결에 그러라고 하긴 했지만 굳이…?

장정의 사내도 아니고 송 행수쯤이야 해월도 충분히 부축해 줄 수 있었다.

“…….”

송 행수는 힘없이 뜻 모를 미소를 잠깐 짓다가 이내 연진의 부축을 받았다.

세 사람은 그렇게 행랑채로 향했다.

가는 내내 해월은 아까 못다한 설명을 이었다.

“오늘은 은명 낭자가 죽은 지 사흘째 되는 날이야. 그러니 삼일장을 치러야 하지.”

모두가 아는 사실을 굳이 한 번 더 언급하니 듣는 이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청자를 고려해 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으므로 해월은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연 씨라고. 송 행수가 내쫓은 전 하련방 행수가 있는데. 내 생각에는 연 씨가 요괴가 된 것 같아.”

연 씨가 한을 품어 귀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 다만 그 해악을 방지하기 위해 하련방 곳곳에 주구를 두었고, 송 행수에게 영석까지 내어 주었으니 걱정은 하지 않았었다.

해월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요괴의 사악한 기운이 주구의 힘을 압도한 듯했다.

송 행수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연 씨가 요괴가 됐다고…?”

“솔직히 나조차 이해 가지 않는 부분이 많아. 그래도 연 씨가 요괴가 된 건 맞을 거야.”

“그럼 은명이가 죽은 건….”

송 행수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안 좋은 예감이 든 것이다.

“맞아. 예전 기억 때문에 네가 쓰던 방에 있는 낭자를 너인 줄 알고 죽인 거지.”

해월은 덤덤한 음성으로 송 행수의 뒷말을 대신했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었지만 송 행수도 연진도 이미 익숙해진 터라 거기에 대한 동요는 없었다.

“요괴는 대개 이성이 없어. 게다가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서 판단력이 흐려졌을 거야.”

그래서 예전 송 행수의 방에, 송 행수의 반지를 끼고 있는 은명을 죽였다… 라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인 점은 있었다.

송 행수는 정확히 그 의문점을 입에 올렸다.

“…은명이는 누가 보아도 자결한 듯한 모양새였어. 그건 어째서 그런 거지?”

“그건 자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든 환시고 실제가 아니야. 어째서 그런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정말 요괴의 독단적인 행동인 건지, 다른 배후가 있는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시신을 헤집어 놓은 걸 보니 보통의 한이 아닌 것 같은데 제 발로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높아.”

“…그걸 어떻게 확신해.”

“그건 네가 한 행동에서 알 수 있겠지.”

뜬금없는 해월의 지적에 송 행수는 멈칫했다.

“뭐?”

“연 씨의 삼일장 날 기억 안 나?”

“너… 그걸 봤어?”

“어, 봤어. 혹시 네가 내 말 안 듣고 연 씨의 시신을 도륙 낼까 봐.”

나름 선의에 의한 행동이었는데 그날 해월은 뜻밖의 것을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송 행수는 장사를 치르기 전 안치되어 있던 연 씨의 관을 열어, 그 얼굴에 상처를 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관을 닫았다.

그저 복수심에 한 행동이었을 거다. 해월의 주구도 있으니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 못 했을 것이고.

“그 요괴는 삼일장 날인 오늘. 반드시 다시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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