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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7화 (87/124)

87화

은명이 죽었다.

해월은 은명의 시신이 있는 방으로 향하며 예전에 그녀와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낭자, 괜찮습니까?’

‘퇴, 퇴마사님…흐흑….’

그날 은명은 송 행수에게 호되게 혼난 뒤에 기방 담벼락 구석에서 울고 있었다.

누각에 앉아 명상하던 해월에게는 그녀의 울먹임이 꽤나 잘 들렸던지라, 무시하기도 뭐 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는 영 말주변이 없어지는지라,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냥 그녀의 곁에 앉아만 있었다.

한참을 울던 은명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민망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퇴마사님….’

‘아닙니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그저 곁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해월 역시 민망했다. 그래서 민망함을 숨기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낭자께서 눈물을 보이시는 자세한 연유는 모르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 또한 지나갈 겁니다.’

‘…….’

‘송구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이 이것뿐이라서.’

제가 뱉은 말이지만 썩 위로가 될 법한 말은 아닌지라 해월은 괜히 멋쩍은 기분이 되었다.

반면 은명은 그 말에 감복한 듯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제가 무엇이 부족한지 알거든요.’

그리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울고 나니 한결 후련합니다. 퇴마사님 말씀이 맞아요. 언젠가는 이 또한 지나가겠죠. 그때까지 저 열심히 할 겁니다.’

그 대화를 해월은 거의 잊고 지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이후로 딱히 관심을 두지도, 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작금과 같은 상황을 맞닥뜨릴 때면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뒤로 어찌 지냈었는지, 더는 송 행수에게 혼나지 않게 되었는지, 그녀를 울게 했던 일은 지나갔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봐 줄 걸 그랬나 보다.

그랬다면 젊은 여인의 짧은 생에, 그 미련이 한 톨이라도 덜어졌으려나.

하지만 그녀는 이미 죽었다.

죽었으니 만날 수 없다.

죽은 자의 영혼은 대개 쉬이 흩어진다.

“…….”

해월은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은명의 영혼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혼백에도 상처를 입어 소멸하여 버린 것일 수 있다.

설핏 괴로운 얼굴이 된 해월은 눈을 내리감았다.

무거운 한숨을 억누른 해월은 얼음처럼 냉랭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

은명의 방 앞에는 이미 대성통곡하는 기녀들로 가득했다. 방 안에는 평소의 화려한 치장이 아닌 송 행수가 홀로 서 있었다.

해월은 방으로 들어서며, 얼핏 시신 쪽을 쳐다보았다. 시신의 얼굴은 손수건으로 덮여 있었으나 주위에 낭자한 혈흔을 통해 어찌 죽었는지 추측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들어서 어렴풋이 알았다만 역시 예삿일은 아니었다.

그는 송 행수를 직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송 행수. 넌 나가 있어. 여긴 내가 정리할게.”

“…….”

해월의 말을 듣기는 한 건지, 송 행수는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은명의 시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감지한 해월은 밖에 있던 기녀들에게 부탁했다.

“송 행수를 데리고 가 주십시오.”

“…예….”

기녀들의 목소리에는 음울한 기색이 짙었다. 하루아침에 동고동락하던 이를 잃었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송 행수는 저를 이끌고 나가려는 기녀들의 손을 매섭게 쳐 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희야말로 나가 있거라.”

본래에도 엄한 그녀였지만, 지금은 유달리 엄혹한 목소리였다.

“하오나 행수 어르신….”

기녀들은 저마다 멈칫거리며 쉽게 발을 떼지 못했다.

“어서 나가! 채비가 늦어 오늘 하련방 문을 못 열게 된다면 내 엄히 다스릴 것이다.”

“…….”

송 행수가 엄포를 놓자 기녀들도 마지못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기녀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노려보던 송 행수는 그녀들이 전부 나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해월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 강한 척해서 어디다 쓰려고. 아무리 너라도 함께한 식구가 죽었는데 초연할 수는 없어.”

“……잘나셨군 그래. 하긴 넌 원래 그런 놈이니까.”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하지만 해월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해월은 송 행수가 하련방 기녀들을 각별히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이 기방의 행수로서 냉철한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의연한 척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 일은 내가 정리할게. 그때까지 머리 좀 식혀.”

해월은 송 행수를 일으켜 주려 했다. 송 행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 하련방의 주인은 나야. 하련방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행수인 내가 처리하는 게 옳아.”

“알아. 근데 지금 네가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행수로서의 자질을 묻는 말이 아니었다. 정녕 이대로 괜찮냐고 묻는 것이다.

송 행수는 주먹을 움켜쥐며 자세를 일으켰다. 그 얼굴은 한겨울처럼 메마르고 냉랭했다.

해월은 그 얼굴이 가면이라는 걸 안다. 늘 여유롭고 강해 보여도 그녀는 근본적으로 억센 성정이 아니다. 죽은 은명의 시신을 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너는 못 해. 우선 쉬고 나서 다시 생각해 봐.”

“…….”

단언하는 그의 말투가 거슬려서, 그녀는 그간 금기처럼 지키던 암묵적인 약속을 깨 버리고 말았다.

“안 될 게 있니? 아버지가 죽어도 다시 기방으로 돌아간 나인데.”

그것은 오랜 시간 덮어 두었던, 갈무리하려 했던 원망이었다.

“…송수련.”

착잡한 해월의 목소리가 회랑을 가득 채웠다.

봉인되어 있던 과거의 이야기를, 각각 가벼운 태도와 침묵으로 묵인했던 사연을 지금에서야 마주하게 되었다.

서로의 잘못을 알기에 덮어 두었고, 서로에게 미안했지만, 그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명의 죽음으로 동요한 송수련은 오랜 시간 다스려 왔던 원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네 제자나 데리고 가.”

송수련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해월은 그녀의 앞을 막았다.

“미안해.”

송수련은 해월이 내뱉는 짤막한 사과의 말이 무엇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하다…? 대체 무엇이?

아버지한테 죽을 듯이 맞던 나를 살게 하여 삶을 연명하게 한 것? 내 아버지를 죽여서 날 고아로 만든 것? 아니면 지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

무엇이 정답일지는 송수련은 몰랐다. 눈치도 셈도 빠른 그녀이지만 해월의 무감정한 얼굴에서는 무엇도 읽을 수 없었으니까.

무지에서 비롯된 답답함은 쉽게 진노로 바뀌었다.

“네가 대체 뭐가 미안하다는…!”

그때, 해월은 손날을 세워 언성을 높이는 송수련의 뒷목을 쳤다. 그녀는 의식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이럴 거라 미안하다고.”

***

그날, 하련방은 문을 닫았다.

갑작스럽게 쉰다는 소식에 하련방 기녀들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손님들은 아쉬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은명이 죽었다는 소식에 하련방 전체는 침울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떠들썩해지기도 했다. 입단속을 해 보았자 어차피 구전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송수련에게 수면술을 걸어둔 해월은 밖을 나서며 짧게 호흡을 내뱉었다.

기다리고 있던 연진은 조심스레 물었다.

“송 행수는 어찌 됐습니까.”

“재워 놨어. 아마 며칠은 내리 잘 거야.”

송 행수에게 수면술을 걸었다는 걸 알아챈 연진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그리 힘이 많이 소모되는 술법을 쓰면 술자도 고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월은 여느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다. 명(明)과 암(暗) 이 공존하는 특유의 무감한 얼굴.

하늘을 바라보던 해월이 작게 중얼거렸다.

“왜…항상 이렇게 될까.”

진심으로 의문스럽다는 목소리가 연진의 귓가에 박혔다.

“이제는 내가 불행을 만나는 건지, 불행이 나를 만나는 건지 모르겠어.”

“…전부 무관한 일입니다. 불행은 그냥 찾아오는 거예요.”

불행한 일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일어난다.

누군가를 탓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일이 있다.

은명의 죽음이 그러했다.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 것은 없었지만 연진은 그리 믿었다.

해월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 이건 내 불찰이 맞아.”

명백한 저의 잘못이라고. 해월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낭자는 그냥 죽은 게 아니거든.”

건넛방에 안치시킨 은명의 시신은 가짜였다.

정확히는, ‘손목을 긋고 자결한 듯 보이는 은명의 시신’이 가짜였다.

진짜 은명의 시신은 온몸이 사기(邪氣)로 넝마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 환시를 걸어 두었기에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낭자는…요괴한테 당한 거야.”

이는 필시 요괴의 짓거리였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시신을 넝마로 만들 정도로 강한 요괴의 기운을 제가 못 느꼈을 리 없으니까.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인간을 해하는 본능만 남았을 요괴가, 이 드넓은 기방에서 은명 하나만을 죽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꼭 그녀를 죽이려 점찍어 둔 것 같지 않은가.

누군가 사술을 부렸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금술의 일종일 수도 있어….’

금지된 사술.

보통의 주술과는 다른 위력을 과시하지만 그만큼 요사스럽고 악한 주술이다. 때문에 술자 역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상을 치르기 전, 해월은 안치되어 있는 은명의 시신을 살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짤막한 사과를 전한 해월은 수의를 조금 걷고 면밀히 상태를 관찰했다.

영안이 없는 자에겐 보이지 않으나, 해월은 환시를 꿰뚫을 수 있는 수준의 퇴마사다. 남들은 보이지 않는 상흔들이 그의 눈엔 보였다.

은명의 시신은 그야말로 끔찍한 상태였다. 오히려 환시가 걸려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환시를 사용할 수 있는 요괴라니… 들어본 적도 없어.’

요괴는 대개 이성이 없고 본성만 남은 존재다. 살육을 반복하며 오로지 생기를 앗아가는 행동만을 취한다. 환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했다.

그러나 시신에 남아 있는 기운은 분명 사악한 요괴의 것이 맞았다.

“이건….”

문득, 은명의 손에 끼워져 있는 지환을 발견한 해월은 조심스레 그것을 빼내었다.

혹시 모르니 빼 둬야 할 것 같았다.

소매 안에 지환을 넣어 둔 해월은 그대로 수의를 갈무리해 둔 뒤 그 자리에서 합장한 후, 은명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

***

연진과 함께 누각에 앉아 있는 해월은 한껏 심란한 얼굴이 되었다.

연진이 그 연유를 묻자, 해월은 "이상해서."라고 답했다.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는 것 외에는 떠올릴 수 없었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깨져 버린 진실의 조각을 이어 붙일 수가 없었다.

“…사람이 죽어 영혼이 되면 그 영혼은 필히 저승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돼. 마치 본능처럼 말이야.”

“본능은 거스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이승을 떠도는 귀신이나 요괴도 많다고 했잖아요.”

“네 말이 맞아. 거스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하는 건 스스로 안식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

끝없는 지옥을 스스로 끌어안는 행위다.

“그리고 실제로 이승을 떠도는 귀물이나 요괴의 대부분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그 영혼의 잔재인 경우가 많아.”

일전에 보았던 삼구귀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사람이 귀신이 된 게 아니라, 사념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해월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은명 낭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을까.”

저승으로 가야만 한다는 본능을 거스를 정도의 미련이나, 한… 그런 것들이.

그런 것조차 품지 않을 만큼, 선한 자였을지도 모른다.

“…….”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해월은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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