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송 행수와의 피곤한 만남을 뒤로한 채, 방으로 가려던 해월과 연진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선가 음곡이 들려와서다.
축일을 맞아 하련방 전체가 분주해도 이쪽은 외부의 출입을 막고 있을 텐데 누가 있는 걸까.
이윽고 그들은 작은 누각 쪽으로 걸었다.
“낭자?”
열심히 현을 켜던 은명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퇴마사님…?”
“예서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까.”
은명은 멋쩍은 듯 목덜미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행수 어르신께서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 하셔서… 연습 중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문득 해월을 보던 은명이 살짝 놀란 듯 물었다.
“퇴마사님 왜 신이….”
“아… 이건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로 버선발에 대해 지적받은 해월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괜히 말이 길어지기 전에 해월은 화제를 돌렸다.
“한데 왜 이곳에 계십니까.”
“다른 곳은 너무 시끄럽고, 또 저만 한가롭게 연습하기에는 눈치가 보여서 여기 왔습니다.”
은명은 당차게 답하고서 아차 싶었다.
“아, 퇴마사님과 공자님은 저 방에서 주무신다고 하셨죠. 제가 밤중에 실례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야말로 좋은 음곡을 들어 좋았는데요.”
해월의 칭찬에 공연히 얼굴을 붉힌 은명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전했다.
“허면 편안한 밤 되세요. 퇴마사님! 공자님도요!”
해월과 연진은 각각 웃음과 묵례로 답을 대신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져가는 그녀를 잠시 보던 해월은 피식 웃었다.
이때 연진의 눈썹이 작게 까딱였다.
“…왜 웃으십니까.”
“아, 그냥. 열심히 하는 게 보기 좋잖아.”
“…….”
일순 연진의 표정이 굳었지만, 해월은 이를 보지 못했다.
“역시…안 되겠네요.”
“응? 뭐가?”
연진은 답을 하는 대신 다시 해월을 어깨에 들쳐 멨다.
“……!”
“방까지 이리 가죠.”
해월이 뒤늦게 버둥대며 윽박을 질렀다.
“내가 무슨 짐짝이냐! 이거 내려놔!”
“싫은데요.”
이건 연진 나름의 심술이었다.
***
“하아….”
진 빠진 해월의 한숨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연진과 실랑이를 하느라 기운이 다 소실된 것 같았다. 힘은 어찌나 센지 아주 장사가 따로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연진을 상대로 무력을 쓰기는 싫었으니까.
해월이 그렇게 망연자실한 사이 연진은 어디선가 대야와 약재를 들고 나타났다. 그 짧은 새에 벌써 하인이 송 행수의 명을 이행한 모양이다.
송 행수의 헛소리는 불쾌했지만 일단 호의 자체는 고마웠다.
서랍장에 걸터앉은 해월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들고 있는 대야와 약재를 달라는 의미였다.
연진은 해월의 발치에 더운물이 담긴 대야를 내려놓았다. 해월은 곧바로 버선을 벗고 더운물 안에 발을 집어넣었다.
따뜻한 물결이 살갗에 닿자 발끝부터 전신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물이 작은 생채기 사이에 스며들어 따갑긴 했지만 그다지 거슬리지는 않았다.
잠시간 노곤함을 만끽하던 찰나, 커다란 손이 해월의 발을 붙잡았다.
“…뭐 해?”
“씻겨 드리는 겁니다만.”
“뭘, 뭘 씻겨?”
“발이요.”
연진은 무릎을 꿇은 채 팔까지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해월의 발을 씻기고 있었다.
당연히 해월은 기함했다.
“하, 하지 마.”
“이리 담그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신 없이 돌아다녔으니 발이 많이 뭉쳤을 겁니다.”
해월의 반응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언행이었다.
찰랑찰랑. 움직일 때마다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가 나름대로 듣기 좋다는 게 우스웠다.
해월은 차라리 홀딱 벗고 저잣거리를 활보하는 게 덜 창피하겠단 생각이 스쳤다. 이전에 연진이 제 몸에 약재를 발라 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는데 무언가 간지럽고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앉은 채로 내려다보는 연진의 반듯한 얼굴과 낮춘 자세, 제 발을 정성스레 씻기고 있는 커다란 손이 모두 이상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거세게 거부해 보았자 물장구치는 것밖에 되지 않기에 별다른 행동을 취하기도 애매했다.
해월은 결국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넌 귀족이라는 애가 체통도 없냐.”
“체통 같은 걸 따졌으면 우리가 여기 있지도 않았겠죠.”
“…….”
그건 또 맞는 말인지라 더는 토를 달 수 없었다.
‘우리’라는 단어가 귀에 박히기도 해서, 해월은 잠깐 멍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함께하는 사이를 ‘우리’라고 부르는 건 당연한 건데 어쩐지 가슴께가 울렁거렸다.
이러한 가운데 연진은 능숙하게 해월의 발을 수건으로 닦아 준 뒤 약재를 발랐다.
“읏.”
더운물에 담가 놓았던 탓에 여려진 살갗에 갑자기 차가운 약재가 닿으니 신음이 절로 샜다.
연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행동을 이어 갔다. 군더더기 없는 그의 움직임은 꼭 감정 없는 연장 같기도 했다.
“차가워….”
“…참으십시오.”
“그치만 차가운 걸 어떡해.”
해월이 툴툴거렸다. 연진은 묵묵히 해월의 발에 천을 덧댈 뿐이었다.
“됐습니다.”
줄곧 연진의 손 위에 있던 해월의 발이 천천히 땅에 닿았다.
곧이어 이부자리에 엎어지듯 드러누운 해월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살다 살다 제자한테 세족까지 다 받아보네….”
“다음에도 해 드릴까요.”
연진이 뻔뻔하게 대꾸하며 해월의 옆에 누웠다.
“됐거든요. 나는 너처럼 귀족도 아니고… 이런 거 다 이상하단 말야.”
낯설다. 어색하다. 이상하다. 이 말들로 오늘 하루를 표현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은 축일이고, 특별한 날이다. 평소답지 않은 하루인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래도 고운 옷을 입고, 사람들 사이에 껴서 놀이를 하고, 어여쁜 장신구를 사고, 제자에게 업히고, 세족을 받는… 그 모든 것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들이다.
“받는 것에 익숙해지셔도 됩니다.”
“…….”
그 말이 왜인지 가슴에 박히는 것 같아서 해월은 괜히 몸을 돌아누웠다.
연진은 작은 뒤통수를 보며 공연히 미소 짓다가 해월에게 바짝 다가섰다.
“오늘 어땠습니까.”
“…뭐가.”
“그냥 즐거웠는지 어땠는지, 좋았다면 뭐가 제일 좋았는지. 그런 것 말입니다.”
“…좋았어. 전부 다.”
이런 날이 내게 다시 올까 싶을 정도로.
솔직히 이렇게 즐겁고 새로웠던 날은 해월의 인생에 없었다. 영력으로 활을 쏴본 적은 있었지만 진짜 활을 쏴본 것도 처음이었고, 그리 많은 놀이판에서 돈을 딴 것도 처음이었다.
생경했지만 그래서 재밌었던 기억이다.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리니 몸에 온기가 감도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해월은 불현듯 송 행수가 했던 말을 떠올랐다.
‘곧 축일이잖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본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는 법이니까.’
그녀는 오늘도 연 행수의 무덤 일에 관련해 알아보러 다닌 모양이다. 그러니 대문 앞에서 마주쳤던 게지.
그리고 송 행수가 대문 앞에서 했던 헛소리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 해월은 곧바로 연진의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있어서 흠칫 놀라게 되었다.
놀란 것은 상대편도 마찬가지였다.
“…….”
“…….”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흐르다 각자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분위기가 풀어졌다.
‘깜짝이야. 닿는 줄 알았네.’
실수라 할지언정 사제지간에 그런 짓은 너무 부덕하지 않은가. 해월은 조금 더 앞으로 가지 않은 제 고개에 감사하면서 안도했다. 그리고 하려던 말을 다시 꺼내려 운을 뗐다.
“흠, 아까 송 행수가 한 말… 그거 다 헛소리인 거 너도 알지? 그래도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
“…….”
그 얘기를 하려고 돌아본 것이었나. 미약한 실망감이 연진의 얼굴을 스쳤다.
이를 살피지 못한 해월은 하려던 말을 이어갔다.
“송 행수는 원래 장난삼아 천박한 말 자주 하는 편이거든. 기분 나빠할수록 더 기분 나빠지니까 골몰하지 말라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면 송 행수는 더 놀리려 들어서 조심해야 돼.”
연진은 무언가 복잡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해월도 안심하며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그 포근한 얼굴에 떨떠름함을 잊은 연진도 머지않아 잠에 들었다.
축일의 밤은 그렇게 끝이 났다.
***
호사다마(好事多魔).
다음 날 아침을 맞이하자마자 해월은 그 말을 상기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머릿속에서 되뇌었다.
“…….”
덩그러니 서 있는 해월에게 아직 치장도 하지 않은 야장의 차림의 기녀 수십 명이 다가와 눈물을 흘렸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하인들도 저마다 탄식하며 행랑채 앞을 서성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고 물었을 때 기녀들은 울음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겨우 목소리를 내어 본 사실을 고했다.
“은명이, 은명이가….”
기녀 은명은 축일의 다음 날,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송수련에게 은명은 많고 많은 기녀들 중 가장 아픈 손가락인 기녀였다.
미색은 고우나 가진 재능이 부족하여 가여운 아이.
저는 처음부터 곧잘 했던 일을, 그 아이만큼은 아무리 가르치고 수련시켜도 잘되지 않았다.
사실 기녀를 그만두게 할 작정으로 몇 번 크게 꾸짖어도 보았다. 도무지 먼저 그만두라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 그만두게 할 작정이었다.
그녀는 냉정하게 말하는 것에 익숙하면서도, 한 번 기방의 식구로 들인 이는 쉽게 내치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하나 은명이 원한다면 기적에서 이름을 지워 줄 생각까지 있었다.
하지만 은명을 포함한 하련방 기녀들 대부분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녀들은 모두 기적에 이름을 올리면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은명은 악착같이 해내고야 마는 근성이 있는 아이였다. 그 부족함이 전부 가려지지는 않았기에 실수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은명은 정진했다.
송수련은 그런 은명을 더 잘 가르쳐 주고 싶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도록 재기를 갈고 닦게 하고, 어여쁜 옷과 장식을 하고, 아름다운 꽃가마에 올라,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그런 예인이 되었으면 했다.
비단 은명뿐만 아니라 하련방 기녀 모두가 그리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래서 더 엄히 대하고, 다정함을 내비치지 않았다. 강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기방에서 살아갈 수 없으니까.
여러 일로 마음이 약해져 있던 송수련은 은명에게 다정을 베풀고야 말았다. 은명의 기운이 돋을만한 말을 해 주고 아끼던 지환을 넘겨주었다. 송수련의 어머니가 남겨두고 간 것으로 본래 한 쌍의 지환이었지만 공교롭게도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그 하나를, 은명에게 내주었다.
‘이 지환은 네가 가지렴.’
‘언젠가 너 스스로 뛰어난 기생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까지 연습을 게을리하면 아니 된다. 알겠지?’
지금 그녀의 지환을 끼고 있는 은명은 손에 칼을 쥔 채 쓰러져 있었다. 제 손으로 손목에 깊은 자상을 남긴 것처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던 그 시절과 달리 은명의 눈은 바싹 말라 있었다.
처음 은명을 발견한 것은 세숫물을 나르는 하인이었고 그 뒤에는 다른 기녀들, 그다음으로 송수련이 알게 되었다.
“허….”
순간적으로 몸이 얼어붙은 송수련은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켰다. 아직 겨울도 아니건만 몸이 너무도 차게 느껴졌다.
은명의 시신을 보고 있는 스스로가 낯설었다. 이 모든 것이 실제가 맞긴 한 건지 의심이 들었다.
아버지가 죽던 그날처럼, 울음 섞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하….”
무언가 끈을 놓은 사람처럼 음산한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