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85화 (85/124)

85화

작은 소란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쳐다보았다. 해월은 연진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일을 안 좋아하는 걸 알았다. 결국 저보다 연진을 더 신경 써서 항복을 외쳤다.

“알았어 업힐게, 업히면 되잖아!”

연진은 처음부터 그랬음 좋았을 거라는 듯 웃으며 그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등을 보이며 자세를 숙였다.

얼른 업히라는 신호인지 등 뒤로 손까지 까닥였다.

그 모습이 얄밉기도 했지만 좋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해월이 마지못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자,

“아!”

순식간에 시야가 높이 떠올랐다. 그 바람에 해월이 쓰고 있던 삿갓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꽉 붙잡아요. 떨어지기 싫으면.”

“너…!”

그걸 주워 볼 새도 없이 출발한 탓에 해월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떨어진 삿갓은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우선 창피하다는 감정이 일었다.

민망한 마음에 해월은 괜히 고개를 숙이고 말을 붙였다.

“……나 안 무거워?”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지?”

“진심입니다. 오히려 전보다 살이 내린 것 같은데 조금 더 살을 찌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진지하고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그리 마른 것은 아닌데… 그리고 원래 살이 잘 안 붙는 걸 어떡해.”

“그러니 더욱 골고루 잘 먹어야죠. 사부는 너무 달고 짠 것만 먹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나라하게 사실을 적시 당하자 해월은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꾸짖음 당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진에게 업힌 채로 보는 세상은 조금 낮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원한 연진의 체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몸이 떠 있어서 그런지, 마음까지 뜨는 것 같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가마 탄 것 같다.”

걷지 않고, 편안하게 가고 있으니 가마를 탄 것과 진배없지 않나 싶었다.

“거리를 지날 때 우연히 가마를 보면, 저 안에 있는 사람은 대체 무슨 복을 갖고 태어나서. 저런 근사한 가마에 앉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길을 가는 걸까… 하고 궁금했었어.”

생각이 이어지는 대로 중얼거린 그 말을 연진은 허투루 듣지 않았다.

“나중에 가마 타 보면 되죠.”

“됐거든. 내가 무슨 귀족도 아니고.”

예법상 가마를 탈 수 있는 신분에는 한계가 있었다.

법을 그리 준수하며 살아가는 편은 아니지만 일단 법 자체는 그러했다.

“누가 가마를 타든 그 안에 누가 있을지 보는 이가 어찌 알겠습니까.”

“…….”

그 말에 해월은 저도 모르게 침묵했다.

정말 그러할까.

아무도 저를 보지 않는다면. 저 역시 귀한 옷을 입고 귀한 가마를 타면.

누구도 저를 천하다 하지 않으려나.

연진은 앞을 응시하며 단정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런 것에 귀천은 중요치 않습니다. 타고난 복과도 관계없고요.”

어떠한 거짓도 없는 진심 어린 말이었다.

“아무리 귀한 가마라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이 귀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면 소용없습니다.”

연진은 혈통 따위로 감히 귀천을 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말했다. 그런 연진에게 해월은 귀한 마음을 가진 귀인이었다.

“…….”

타고나길 귀한 혈통으로 태어났으면서, 연진은 귀천을 부정했다.

해월도 예전에는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나 자신이 아니라면 아닌 것이라고. 하지만 그 생각은 자라나면서 많이 풍화되었다.

아무리 가진 재능이 뛰어나도 한낱 부적 취급당해 버린 세월이 길었던 탓이다.

그러나 저를 그리 취급한 이들을 욕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그걸 쉬이 놓기 어려워하고, 저보다 없는 이들의 마음을 모르니까.

저 역시 가진 이들의 마음을 모른다.

그게 당연한 거고, 바뀌지 않는 진리였다.

‘…바보….’

그런 진리를 깨부수는 연진은 정말이지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이 좋아서, 연진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

어두운 길목 곳곳에 등이 켜져 있었다.

해월은 연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곁눈으로 지나는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사내가 사내를 업고 있는 일은 흔히 볼 수 없어서 그런지 몇몇 사람들이 시선을 두는 것이 느껴졌다.

힐끔. 해월은 연진의 안색을 살폈다. 한없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전에 갖은 추문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 때문에 걱정스러웠는데 괜한 기우였나 싶었다.

일단 연진은 괜찮은 모양이니 해월은 자신의 창피함에 집중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쳐다보거나 수군거리는 게 싫다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탁하고 있는 제 모습이 낯설었다. 의지하고, 기대는 것은 언제나 남이었지 저였던 적은 없었으므로.

살짝 고개를 든 해월은 주위를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저기…이제 다 온 것 같은데 내려 주면 안 돼?”

“안 됩니다.”

“왜 안 되는데.”

“안 되니까요.”

뜻대로 일이 안 풀리자 해월은 입술을 삐쭉였다.

“너 요즘 왜 이리 말을 안 들어.”

암만 그래도 이쪽이 더 연장자고 스승인데 면이 안 서지 않나? 이런 관계를 따지는 것은 속 좁은 좀생이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불만은 불만이었다.

“말을 안 듣다니, 금시초문입니다만.”

연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투로 답했다. 어이가 없어진 해월은 실소를 터뜨리며 쏘아붙였다.

“내가 내려 달라고 얘기했잖아. 내 발로 걷겠다고.”

“저도 안 된다고 얘기했습니다. 발 다치셨잖아요.”

“…거봐. 말 안 듣는 거 맞잖아.”

해월은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맨입으로 불만을 말하는 것은 너무 쪼잔한 것 같아서.

소심한 불만 표출에 연진은 웃고 말았다. 물론 소리 내 웃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등에 업혀 있는 스승이 열을 낼지도 모르니.

해월이 작은 입으로 무어라 쏘아붙이는 것도 화내는 참새 같아서 나름 귀엽긴 했지만, 이 좋은 날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작은 실랑이를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하련방 대문 앞에 다다랐다. 이제는 진짜 내려 줄 거라고 생각한 해월이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다리를 잡고 있는 연진의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안 내려 줘?”

설마 하는 두려움이 섞인 물음이었다. 연진은 대답 대신 대문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척척 밟았다. 그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어깨에 둘러진 팔에 더 힘이 들어갔다.

“얼른 내려놔 빨리…!”

“싫습니다.”

“야 강연진!”

이대로라면 저 기방 문턱을 넘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기녀들이나 송 행수한테 들키게 된다. 아니, 이미 오는 길에 들켰을지도 모른다.

다른 이는 몰라도 송 행수한테 이 모습을 보인다면 분명 놀림감이 될 게 뻔하다. ‘천치’에 이어서 송 행수에게 어떤 놀림 말을 듣게 될지 벌써부터 두려움이 엄습했다.

마침내 연진은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그가 기방 문에 손을 뻗으려 하자 기회를 틈탄 해월은 냅다 연진의 어깨를 깨물었다. 세게 깨문 것은 아니고 살짝 놀랄 정도로만.

최후의 공격이었는데 다행히도 먹혔는지 연진의 팔에 조금 힘이 빠졌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해월은 재빨리 발을 움직였고 이내 제 발로 땅을 디딜 수 있었다.

“그러게 내가 내려놓으라고….”

해월은 도중에 말을 멈추었다. 연진의 표정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어쩐지 멍해 보였고 조금은 황망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너무 세게 깨물었나. 그래서 화가 난 건가.

걱정되는 마음에 해월은 연진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연진이 흠칫하며 해월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연진의 까만 눈동자는 빨려 들어갈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까닭을 알 수 없어 해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잡힌 손은 제쳐두고 반대쪽 손을 연진의 옷깃 위로 가져갔다.

그제서야 일렁이던 시선이 조금 또렷해진 연진은 몸을 한 발 뒤로 뺐다.

“뭐 하는 겁니까.”

“뭐 하기는 좀 보려 그러지. 이리 와 봐.”

“…됐습니다.”

“이리 와 보라니까.”

해월은 금세 다시 연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옷깃을 젖혔다. 깨문 부위의 피부가 조금 붉긴 했지만 그래도 멀쩡해 보였다.

“…….”

연진은 얼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옷을 들어 제 피부를 유심히 관찰하는 해월의 시선이 간지러웠지만 그래서 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찰나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짧은 시간이 무척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해월은 옷깃을 움켜쥐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괜찮네. 그래도 갑자기 깨문 건 미안.”

상황이 얼추 갈무리되려던 차에 구경꾼의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여기서 해도 되긴 하는데 기왕이면 들어가서 하지?”

부드럽고 맵시 있는 여인의 목소리.

“……송 행수.”

계단 아래쪽에 송 행수가 있었다.

해월은 재빨리 연진의 옷깃을 정리해 준 뒤에 제 뒤쪽으로 이끌었다.

송 행수는 치맛단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계단을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이 격조 있는 움직임이었다.

물론 타인의 눈에나 그리 보일 뿐이지 해월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송 행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너무 부적절한 순간에 나타난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송 행수는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너울을 살짝 걷으며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여기가 기방이라지만 문 앞에서 그런 짓을 하면 좀 곤란하거든. 원한다면 신방이라도 꾸며 줄 수 있는데. 차려줄까?”

“헛소리하지 마.”

해월은 대번에 인상을 구기며 질색을 했다. 한발 늦게 송 행수의 말을 알아들은 연진이 헛기침을 내뱉자 해월은 그의 등을 몇 번 두들겨 주었다.

“괜찮냐?”

“예…괜찮습니다.”

정확히 무엇이 괜찮은지는 몰랐지만 일단 그렇게 답했다.

“근데 천치 넌 왜 버선발이니? 신은 어디에다 두고?”

“일찍도 물어본다… 일이 좀 있었어.”

지나치게 간략한 설명이었지만 송 행수는 더 캐묻지 않았다. 그저 야살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훑어볼 뿐이었다.

“호오, 그렇구나. 우선 방에 가 있어. 하인에게 일러 더운물과 약재를 올려 줄 테니.”

“…그래.”

해월은 송 행수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송 행수는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연진의 옆으로 지나가며 작게 한마디를 속삭였다.

“허면 좋은 밤 보내세요. 공자님.”

“…….”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