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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4화 (84/124)
  • 84화

    등을 하늘로 올리고 난 뒤에도 축일의 밤은 멈추지 않았다.

    저잣거리는 온통 축일을 즐기는 자들로 가득했으며,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기기도 알싸한 술 냄새가 나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은 밤공기에 섞여 어지러이 흩어졌다.

    해월은 연진을 이끌고 시전을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구경했다. 항상 단 과자들을 파는 시전에만 들렀었기에 휘황찬란한 장신구들을 구경하는 것은 제법 눈이 즐거운 것이었다.

    송 행수를 포함해서, 왜 기녀들이 장신구를 그리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귀하고 어여쁜 것들이니 갖고 싶을 만도 했다.

    다만 이런 쪽의 물욕은 거의 없는 해월은 갖고 싶다는 눈으로보다는 그저 신기하고 어여쁘다는 눈으로 장신구를 구경했다.

    연진은 해월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장신구가 널려 있는 가판 쪽으로 자세를 숙였다.

    “사고 싶은 것이 있습니까?”

    “흐음… 글쎄다. 어여쁘긴 한데 내가 이런 걸 사서 뭘 하겠어. 누구 줄 것도 아닌데.”

    “꼭 누굴 줘야만 장구(裝具)를 살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조금 전에는 관이 안 닫힐 정도로 재물을 쓸어 담아야 된다면서요.”

    그러니 하나쯤은 사도 되지 않겠냐고. 연진은 해월을 설득하고 있었다.

    해월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환, 목걸이, 귀고리, 노리개… 이중 그가 살만한 물건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뜻을 헤아린 연진은 다른 쪽에서 물건 하나를 집어 해월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건 어떻습니까.”

    “이게 뭐야…?”

    “선초(扇貂)입니다. 지니고 다니시는 부채에 매달아두면 분명 어여쁠 겁니다.”

    “예쁘다….”

    금장으로 만든 선초는 한눈에 보기에도 어여뻤다. 영롱한 금빛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미를 뽐내고 있었다.

    달가워하는 표정을 확인한 연진은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값을 치르고 해월의 허리춤에 있던 부채를 꺼내 들어 끝에 선초를 달아 두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해월은 조금 얼떨떨했다.

    “…너 원래 이리 행동이 빨랐나?”

    연진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능글맞은 태도에 해월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렴 어떤가. 재밌으면 그만이지.

    돈도 많이 따고, 소원도 빌고, 어여쁜 선초도 샀으니 더는 바랄 것이 없었다. 즐거운 밤이었다.

    그때. 해월은 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기운은….’

    “…….”

    응시하는 해월의 눈동자가 조금 떨려 왔다.

    “사부?”

    이상을 감지한 연진이 의아해하던 순간, 해월은 이미 결단을 내린 뒤였다.

    “…진아 너 잠깐만 이거 들고 여기 있어.”

    해월은 들고 있던 돈 자루를 연진에게 떠맡긴 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

    말 붙일 새도 없이 쏜살처럼 가 버린 해월의 뒷모습을 연진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

    얕은 숨이 벌써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해월은 숨도 고르지 않고 제가 기운을 느낀 쪽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지나가면서 몇 번이고 행인들과 부딪히면서도, 오로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는 말처럼 그렇게 뛰었다.

    마침내 기운의 근원이라 생각한 곳에 다다랐을 때는 허망하게도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분명 강렬한 감각을 느꼈다. 그건 틀림없이 사악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에 황망해 하기에는 폐가 너무 아팠다. 해월은 무릎을 꺾은 채 한참이나 기침을 해야 했다.

    “콜록, 콜록!”

    다행히 각혈까지 하지는 않았다.

    입가를 가렸던 손안에 묻어나는 것이 없음을 확인한 해월은 한결 안심하려다 이내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자각했다.

    ‘대체 뭐였지.’

    지금껏 수많은 마물들을 만나왔다. 그리고 방금 손에 꼽을 정도로 사특한 기운을 느꼈다. 웬만큼 척박한 땅에서도 찾기 어려운 기운이었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색에 빠져 있던 찰나 옷자락을 끌어당기는 힘에 해월은 반사적으로 누군가를 밀쳐 냈다.

    그 바람에 해월의 허리까지도 안 올 것 같은 작은 아이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똘망한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는 것이 보였다.

    “…….”

    과민하게 반응한 제 실수라는 것을 깨달은 해월은 얼른 아이를 일으켜 주며 사과를 건넸다.

    “밀쳐서 미안해. 놀라서 그랬어.”

    아이는 아무 말도 없이 양손을 해월에게 내밀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제게 내밀어진 이유를 알아챈 해월은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미안해서 어쩌지. 지금은 가진 돈이 없는데.”

    여기까지 뛰어올 때 걸리적거릴까 봐 돈은 전부 연진에게 던져두고 왔었다.

    놀이판에서 그리 돈을 많이 쓸어 담으면 무엇 하리. 정작 필요할 때는 안 가지고 있는데. 우습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는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는 해월을 필히 부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해월은 그런 아이의 착각이 안타까웠다. 구걸을 하려 제 옷을 당겨 본 모양이지만 사실 신분만 따지면 아이와 별다른 것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척 보아도 남루한 행색의 아이는 비쩍 말랐고 배를 곯는 것이 일상인 것 같았다.

    ‘이를 어쩐담.’

    당장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아이와 함께 처량해지려던 찰나. 아이가 해월의 허리춤에 있는 부채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부채에 달려 있는 값비싸 보이는 선초를.

    “…꼬마야. 미안하지만 이건 줄 수 없어.”

    “왜요. 나 오라버니가 밀어서 넘어졌는데….”

    아이는 입술을 삐쭉였다. 그럼에도 해월은 아이에게 져 줄 수가 없었다.

    “이건… 이 선초는, 나만의 것이거든.”

    내 제자가 골라 준, 오직 나만의 것.

    누구도 줄 수 없는 소중한 물건. 다른 가진 것을 모두 내놓을지언정 이것만큼은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미안해진 해월은 잠시 고민하다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줘 봐.”

    다정한 말씨에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해월의 손에 제 작은 손을 얹었다.

    해월은 영력으로 아이에게 생기를 조금 넘겨주었다. 이것으로 아이의 몸에 있던 작은 생채기들은 모두 치유될 것이다.

    생소한 감각을 느껴서인지 아이의 두 눈이 의문으로 더 똘망해졌다.

    해월은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근처 사니?”

    “아뇨… 저는 여기 안 살아요. 저 뒷산 너머 사는데 아버지가 장사한다고 해서 따라왔어요.”

    아이는 씩씩하게 답했다.

    “그렇구나. 아버지는 찾으러 갈 수 있고?”

    “예. 할 수 있어요.”

    고로 아이는 곧 제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용전(用錢)이라도 쥐여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수중에 돈이 없었다.

    해월은 망설이지 않고 제 신을 벗어 아이에게 건넸다. 줄곧 맨발이었던 아이는 제 발치에 놓여 있는 신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거 신어. 조금 크긴 해도 신을 만할 거야. 맨발보다는 나을 거고.”

    아이는 쭈뼛거리다가 신에 제 발을 맞춰 넣었다. 아이는 작은 덩치답지 않게 발이 조금 큰 편이고, 해월은 발이 작은 편이라 얼추 맞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른의 신이라 아이에겐 커 보였다.

    “비싼 신이니까 나중에 꼭 높은 값 받고 팔아. 알겠지?”

    해월의 당부와도 같은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신의 가격은 잘 모른다. 그저 송 행수가 건네준 것이라 제법 값이 나갈 거라 추측한 것이다.

    아이는 해월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넨 후 머지않아 멀찍이 사라졌다.

    이제 저도 슬슬 연진에게 돌아가야 할 듯하여 한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흙바닥 사이에 박힌 돌이 발바닥에 박히듯 통증을 주었다.

    “아.”

    짤막하게 반응한 해월은 피식 웃고 말았다. 버선발로 걷는 건 간만의 일이기 때문이다.

    하긴. 저는 원래부터 이리 걷는 것이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편안하게 가는 것보다는 이게 익숙했다.

    ***

    연진은 금방 오겠다고 말해 놓고 한 식경이 지나도록 안 오는 해월을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일각 정도 지나자 터덜터덜한 걸음으로 걷고 있는 해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연진은 서둘러 해월에게 다가섰다.

    “대체 어딜 그리 급히 가신 겁니까. 금방 오겠다면서 왜 이리 안 온 거고요.”

    “그게 사정이 좀….”

    해월은 대충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착각했나 봐.’하며 멋쩍게 웃자, 연진은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불만스러운 티를 벗지 못했다.

    “한데 사부… 신은 어디 갔습니까?”

    해월이 버선발이란 것을 확인한 연진이 물었다.

    “아 일이 좀 있어서 어떤 꼬마한테 줘 버렸어.”

    “예?”

    “척 봐도 가난한 꼬마애였는데 신을 안 신고 있더라고. 안쓰러워서 내 신이라도 줬어. 내가 돈을 안 가지고 있어서 새 신을 사 줄 수가 없잖아.”

    연진은 할 말을 잃고 해월을 쳐다보았다.

    행색이 남루한 아이를 마주치면 측은한 시선으로 보기만 하거나 혀를 차는 이들이 세상의 대부분일 것이다. 도움을 줘 봤자 적선하듯 엽전 하나 던져 주고 말 것이고.

    세상 누가 그런 아이를 위해 진심 어린 행동을 할까 싶은데, 그게 바로 제 눈앞에 있는 사부란 것을 안 연진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렇다고 사부가 버선발이 되면 어떡합니까.”

    흰 버선은 이미 많이 더러워져 있었다. 그렇다면 버선 안에 있는 발은 생채기가 났을 거란 이야기가 된다.

    “괜찮아. 난 어차피 발에 굳은살도 많아서 끄떡없어.”

    논점이 어긋난 대화였다. 지난 경험으로 여기서 제 말의 중점을 설명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연진은 설명하는 걸 포기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제게 업히세요.”

    “됐어 내가 애도 아니고 뭘 번거롭… 야!”

    해월이 딱 잘라 거절하려는데, 연진은 곧바로 그를 어깨에 들쳐 멨다.

    “빨리 안 내려놔? 너 미쳤어?”

    “싫으시면 그냥 업히시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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