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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3화 (83/124)

83화

축일의 밤.

밤을 환하게 밝힐 수 있도록 길거리 곳곳에 수박등이 걸렸다. 지나는 사람들의 손에는 사초롱이 들려 있기도 했다.

어둠과 빛이 동시에 일렁이는 광경이었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해월은 문득 제가 입고 있는 옷을 보고 한숨을 지었다.

‘하여간 송수련….’

해월과 연진이 저잣거리로 나서려던 때에 송 행수가 그들을 붙잡았다.

‘천치 너 그 옷 입고 나갈 거니?’

‘뭐?’

제 옷이 뭐 어떤가 싶었다. 매일같이 입는 백의인데.

송 행수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었다.

‘백날 천날 백의만 입는데 질리지도 않니?’

‘질리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사욕과 사념이 없다는 뜻을 지닌 백색의 옷. 해월이 고집스럽게 백의를 입는 이유였다. 옷뿐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고 무결한 선인이 되고 싶은 이기심의 산물이기도 했다.

송 행수는 단호한 낯을 하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거 말고 내가 주는 옷 입어. 축일인데 즐겨야지. 공자님도 괜찮으시다면 제가 드리는 옷을 입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단정한 흰색은 해월에게 퍽 잘 어울렸지만 그래도 축일이니만큼 고운 옷을 입었으면 하는 게 기방 행수로서의 바람이었다. 덧붙여 연진도 백의만큼은 아니지만, 축일에 입기엔 차분한 차림새라 신경이 쓰였다.

해월은 송 행수의 제안에 못 이겨 작금의 옷차림을 하게 된 것이다.

이리 고운 비단으로 만든 고운 옷이 어색했다. 그래서 괜히 옷 끝단을 만지작거리며 삿갓을 눌러썼다.

누가 보아도 어색해하는 모습을 슬쩍 보던 연진은 피식 웃었다. 옅은 푸른빛의 옷은 해월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연진의 눈에는 전혀 어색한 것이 없었는데 정작 옷을 입은 당사자가 어색하게 구니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 곱고 좋은 것에 익숙하면 좋으련만, 유감스럽게도 해월은 영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옷에 안 어울리는 삿갓까지 눌러 쓴 것이겠지.

해월은 괜히 목덜미를 문지르고 있었다.

고운 비단옷을 입고 천한 이들이나 하는 짧은 머리를 한 게 이상할 듯싶어서 쓴 삿갓이었지만 더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해월은 뻘쭘한 마음에 옷자락을 괴롭히다가 이제는 손끝을 괴롭혔다. 그걸 본 연진은 그 손을 낚아채듯 잡으며 주의를 돌리는 물음을 던졌다.

“오늘 달리 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아… 뭐 딱히….”

“허면 저건 어떻습니까.”

연진은 일단 북적이는 장소 중 아무 곳이나 짚어 보았다.

그곳에서는 일정 거리에서 활을 쏴 과녁을 맞히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평범한 놀이는 아니었다. 왜냐면 저마다 돈을 걸어 내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야 이 사람아! 가진 돈을 전부 걸면 어떡해!”

“아이고 나리도 참. 원래 이런 것이 일확천금을 벌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매일 오는 놀이판도 아닌데 그저 즐기시지요.”

놀이판의 주인장은 사람을 잘 구슬리는 언변을 구사했다.

살짝 흥미를 느낀 해월이 그곳에 다가갔다. 그러자 주인장은 살갑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어린 공자님도 한번 해보시렵니까?

“…아니 저는….”

“공자님께서 쏘시기에 활시위가 많이 억셀 텐데요.”

장정의 사내들도 쉬이 당기지 못할 정도로 억센 활을 구비해 놓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게다가 주인장은 노골적으로 해월을 얕보고 있었다.

“…….”

어린 공자라는 호칭에 조금 열이 받은 해월은 비장한 자세로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흑청색 눈동자는 이전보다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갖고 있는 돈 다 줘.”

“…전부 다 말입니까.”

“어. 주인장 말대로 본래 이런 것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재미가 있으니 말야.”

연진은 어쩐지 제가 짚으면 안 될 곳을 짚은 것 같아 후회가 일었다. 그럼에도 순순히 가진 돈을 전부 내어주었다.

“이거 다 걸겠습니다.”

“이, 이걸 전부 다 걸겠단 말씀이십니까?”

주인장도 해월이 내민 돈을 보고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만일 눈앞의 이 어린 공자가 화살을 명중하여 돈을 따 간다면 그의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다 털어야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공자는 몸집도 작고, 말랑한 약골의 사내로 보였다. 그렇지만 내건 돈이 워낙 커서 괜히 침을 삼키게 되었다.

주인장이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슬쩍 본 해월은 그럼 그렇지 하고 웃었다.

“규칙이 어떻게 됩니까.”

“…화살 다섯 발을 쏴서 홍점에 명중시키면 내건 돈의 두 배를 드리고, 맞추시지 못한다면 내신 돈은 제가 갖게 됩니다요.”

“간단하군요.”

해월은 가볍게 팔을 풀며 선이 그어진 곳에 맞추어 섰다.

뒤에 선 연진은 속삭이듯 작게 물었다.

“활 쏴 보신 적 있습니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야. 나만 믿어.”

해월은 느긋하게 답하고는 주인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인장은 일부러 있는 활 중 가장 쏘기 어려운 활을 골라 해월에게 건네주었다.

여러 사람이 실패하는 걸 봐 온 구경꾼들은 혀를 찼다. 뭣 모르는 공자가 재미 삼아 쏴 보는 모양인데 그저 유흥으로 삼기엔 내건 돈이 너무 컸다. 게다가 누가 봐도 그가 성공할 위인처럼은 보이지 않아서였다.

주위의 우려와 조롱 섞인 시선 속에서도 해월은 평온하게 활대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통에 있던 화살을 꺼내어 오른손으로 시위를 당겼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행인들의 눈이 커다래졌다.

소년 공자가 제 몸의 반만 한 활을 들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고 있는 것이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당길 수 없을 정도로 억센 데도 불구하고 삿갓에 반쯤 가려진 소년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휘이익-

매섭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화살은 정확히 과녁 한가운데 박혔다.

“명, 명중이오!”

이어지는 두 번째, 세 번째 화살마저 명중시켰다. 다섯 번째 화살은 네 번째 화살을 꿰뚫었다.

소년 공자가 화살을 쏠 때마다 누군가는 감탄하고 누군가는 탄식했다. 마지막 화살이 박히고 나서도 행인들은 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활을 내려놓은 해월은 주인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유로운 웃음은 덤이다.

“다 명중시켰으니 이제 돈 주시지요.”

“…….”

놀이판 주인장의 축일 장사는 그 시간부로 끝이 났다.

***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모르는 소리. 돈은 많을수록 좋은 거거든.”

해월은 저잣거리를 돌며 놀이판이란 놀이판은 전부 임하고 돈을 휩쓸었다. 이런 놀이는 웬만하면 안 하는 편이었지만 막상 해 보니 재미가 쏠쏠했다.

“자고로 재물이란 죽어서도 관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쓸어 담고, 저승에 가서도 부족하지 않도록 모아야 하는 거야.”

“죽어서 갖고 갈 수도 없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금화와 은화를 자루째 들고 있는 해월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월이 즐거워 보이니 연진도 더 이상 지청구를 주지 않았다.

축일의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저마다 풍등을 날릴 채비를 했다. 해월도 재빨리 풍등을 샀다. 꽤 높은 값을 주고.

이전의 해월이었다면 풍등이 다 거기서 거기라며 싼값의 물건을 골랐을 것이다. 사실 그 생각엔 변화가 없지만, 지금은 기분 값이라는 걸 치르고 싶었다.

풍등에 매달 소원지를 쓰던 해월은 문득 연진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원 적어?”

“비밀입니다.”

싱거운 대답에 해월은 저절로 입술을 오므렸다. 이에 연진은 설명을 덧붙였다.

“본래 소원은 남에게 말하는 순간 효력이 떨어진다더군요.”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믿었다고… 그런 건 누가 알려줬어?”

“송 행수가 말해 줬습니다. 그 말을 믿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좋은 거 알려줬다 아주.”

종종 연진과 송 행수가 대화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리 길게 얘기하는 것 같지도 않고 두 사람의 표정도 무던해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돌이켜 보니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찝찝한 마음으로 적어서일까. 소원지에 단 두 글자만 적었음에도 글자가 삐뚤어서 보기가 좋지 않았다. 해월은 종이를 구긴 채 새 종이를 꺼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부리지 않을 사치의 일종이었지만 기왕 비는 소원이니 잘 적어야겠단 생각이었다.

그렇게 적은 소원은 해월이 언제나 바라는 그것이었다.

[安定]

안정.

해월이 바랄 수 있는 최대의 소원이자, 최선의 소원. 단출한 그 두 글자가 가지는 의미를 헤아릴 사람이 있을까. 허황되거나 가벼운 바람조차 하지 않으며 살아왔기에 원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았다. 흘러가는 대로 살고, 그리되어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삶이 아니라고.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사는 건 우리 속 가축의 삶이라고. 이제는 그렇게 여겨졌다.

검은 먹으로 쓰여진 간절한 그 단어를, 해월은 애틋한 손길로 쓰다듬었다. 이 소원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지길 바라는 희망을 품는 것이다.

“이제 올릴까요?”

“응. 올리자.”

그들은 들고 있던 풍등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둥실 떠오른 풍등은 하늘에 닿을 것처럼 위로 올라갔다.

저 밤하늘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토록 많은 이들의 소원이 닿을 저곳은 정말 천신이 인간을 관망하는 곳일까.

실없는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해월은 그런 질문을 되뇌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등불의 불빛들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고, 바랄 정도로.

그때, 바닥을 향해 있는 해월의 손을 커다란 손이 감싸 쥐었다. 그 온기에 해월은 홀린 듯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무얼 하고 놀까요.”

다정하게 묻는 어투가 묘하게 간질거렸다.

“사부, 혹시 어디 아픕니까.”

“어?”

“얼굴이 조금 붉은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해월은 고개를 숙이며 공연히 붉어진 뺨을 대충 숨겼다.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조금 흥분된 것 같다. 심장이 북을 치듯 울리는 게 느껴졌다. 혹여나 이 소리가 연진에게 닿을까 봐 해월은 살짝 몸을 수그렸다.

“괜찮아.”

무엇이 괜찮다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은… 괜찮은 것 같다.

“밤공기가 차서 고뿔에 걸릴까 걱정입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그리고 아직 겨울도 아닌데 뭘.”

“그래도요.”

걱정하는 기색을 지우지 않은 연진은 두 손으로 해월의 뺨을 감쌌다. 살짝 볼이 눌린 해월이 왜 그러냐는 듯이 연진을 쳐다보았다.

연진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뺨을 감싸고만 있었다. 연진의 귀 끝과 해월의 뺨은 모두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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