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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2화 (82/124)
  • 82화

    곧 있을 축일을 준비하느라 하련방은 물론이고 이 일대 전부가 분주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장소에서 해월과 연진은 그에 무관한 사람처럼 한가로웠다.

    해월이 어떤 얘기를 꺼내면, 연진은 실없이 웃었다. 그러면 해월은 그게 좋아서 따라 웃고 말았다.

    평화롭고 따스한 어느 봄날과 같은 순간이었다. 낙엽의 색이 바래고, 찬바람이 부는 가을임에도 해월은 봄을 느꼈다.

    만면에 그득한 미소는 나른했고, 흑청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너울거렸다.

    해월은 제 몸이 꽤나 가벼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나부끼는 바람도 마냥 차지 않고 부드럽게만 느껴졌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이토록 따스한 것이로구나.

    문득, 해월은 연진의 머리에 손을 뻗어 묻은 것을 떼어 주었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연진은 순간 몸을 굳혔다.

    “민들레 씨앗이네.”

    바람을 타고 날아왔나 보다. 짧게 말을 내뱉은 해월은 이내 결심했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있잖아. 나 가고 싶은 곳이 생겼어.”

    “어디를 가고 싶습니까.”

    연진은 느슨한 웃음을 지으며 다소 뜬금없는 해월의 말을 받아 주었다.

    “…이 민들레가 필 때쯤에 바다를 보러 가자.”

    연진은 해월의 눈에서 바다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해월은 자신의 눈과 닮았다는 바다를 여직 본 적 없었다.

    사실은 바다를 보기 싫어했었다.

    백난국의 온갖 지방을 다 돌아다녔음에도 바다를 보지 않은 이유는 그리 넓고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하면 초라한 제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 같아서, 그리되면 애써 외면해 왔던 것들이 드러나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제 눈과 닮았다는 바다를 꼭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면 바다를 보러 가자고. 해월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연진은 지난날 해월이 겨울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겨울에 보는 바다도 좋을 텐데요.”

    연진은 혹여나 제가 겨울을 안 좋아한다고 한 것 때문에 해월이 봄의 바다를 보고 싶다는 걸까 봐 미안해졌다.

    그런 생각을 부정하듯 해월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기왕이면 봄에 보고 싶어.”

    겨울을 너무 오래 껴안고 있었다. 이제는 봄을 좋아해도 될 것 같았다. 그 마음에 확신을 거는 것처럼 해월의 시선은 올곧았다.

    “봄에 볼래.”

    “그래요. 봄이 오면 바다를 보러 가요.”

    연진은 흔쾌히 수락했다. 해월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는 듯이.

    봄을 기다리는 그들의 얼굴 만면에 웃음꽃이 가득 피었다.

    ***

    기방에서의 날들은 안온했다.

    일대를 돌아다녀 보아도 이렇다 할 귀물이나 요괴는 안 보였고 축일이 다가오니 만큼 분위기 자체가 평화로웠다.

    가을바람이 조금 차긴 해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그런 해월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백난국의 황제가 위독하다 하여 황제의 쾌차를 기원하는 소원지였다.

    “암만 위독해 봤자 백성들보다는 훨씬 다복한 인생을 살았을 텐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하련방 담벼락에 붙어 있는 소원지 하나를 보며 해월이 중얼거렸다. 절대적인 지존의 아래에 있는 일개 백성들이 어찌하여 지존을 걱정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백난국이 전쟁을 거듭하여 부국강병을 이룬 것은 사실이나, 큰 이득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전쟁의 이윤은 소수의 지배자가 차지하고 그 밖의 모든 고통은 백성들의 몫이 되어 버렸다.

    고혈을 착취당하면서도 황제의 쾌유를 빌다니. 우매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간드러진 목소리 하나가 해월의 귀에 꽂혔다.

    “그런 소리 하다 잡혀간다 천치야.”

    송 행수였다. 그녀는 너울 달린 전모를 쓰고 있었다.

    “웬일로 밖에 나와 있대.”

    “나라고 기방 안에만 있겠니? 뭐… 곧 들어가려 했지만.”

    해월과 송 행수는 함께 하련방으로 들어왔다.

    “근데 천치 너 표정이 왜 그래?”

    “뭐가.”

    한껏 불퉁한 얼굴을 한 해월은 누가 봐도 불만스러운 사람처럼 보였다.

    “황제 폐하의 쾌차를 기원하는 소원지가 그리도 거슬리니? 너 그러다 진짜 잡혀간다.”

    “그런 것 가지고 잡혀가겠어? 그리고 난 순수한 백난국 혈통도 아닌데 뭘.”

    “그런 것쯤은 네 눈만 봐도 알 수 있고.”

    송 행수가 웃으며 대꾸했다.

    해월은 그것이 조금 못마땅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제가 황제에 대해서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은 사실이니까. 나랏님 욕 좀 한다고 잡혀가겠나. 면전에다 대놓고 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널 자사(刺史, 지방관리)에게 밀고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밀고 해 봤자 그저 장 좀 몇 대 맞고 말겠지.”

    “하긴 그건 네가 익숙한 거니까.”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말씨였다.

    해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너야말로 거슬리는 일이 있나 보지?”

    송 행수가 아무 이유도 없이 저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녀 역시 무언가 탐탁지 않은 일이 있어 짜증이 난 것이 분명했다.

    “맞아. 꽤나 골치 아픈 것을 목도하고 오는 길이거든.”

    “뭔데 그게?”

    “연 씨의 무덤이 파헤쳐져 있었어.”

    “……!”

    조금 놀란 해월은 눈동자 크기를 늘렸다.

    연 씨는 송 행수가 쫓아낸, 이전 하련방의 행수였다. 하련방은 본래 예기보다는 창기들의 기방으로 유명했는데 거기엔 연 씨의 탓이 컸다.

    변태 같은 성벽을 가진 늙은이들에게 기녀들을 바치는 짓을 수없이 반복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송수련이 배반을 꾀했다는 건 암암리에 다들 아는 사실이다.

    “살아서 비참한 삶을 겪어 보라고 살려뒀었는데 얼마 안 가 병사해 버려 허무했었지.”

    송 행수의 말에 해월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녀는 그런 해월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오늘이 그 추악한 여인네 제삿날이라 무덤에 침이나 뱉으러 갔는데 무덤이 누군가에게 파헤쳐져 있더라. 놔두기엔 찝찝한데 누군지는 못 찾을 성싶고… 화가 나서 심술 좀 부렸어.”

    “그냥 묘적(墓賊)의 짓일 수도 있잖아.”

    “내가 그년 무덤에 은화 하나라도 넣어 놨을 것 같니? 시신을 가루 내어 길에 버리려던 걸 후일을 생각해 참은 거야.”

    원망을 품은 대상에게 복수하고 싶거든, 업보를 쌓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해월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일부러 흉한 자리에다 무덤을 만들긴 했지만.

    해월은 턱을 매만졌다. 송 행수 성격상 고작 무덤 비워진 것 때문에 이리 날카로워진 것은 아닐 테고 분명 걸리는 것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시신이 사라졌구나.”

    시신이 없어진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시신을 가져간 이유는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열을 내는 게 분명했다.

    송 행수는 찡그린 미간을 풀며 사실을 토로했다.

    “…그깟 시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요새 이 근처가 흉흉하기도 하고. 좌시할 수는 없어.”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마물의 기운이 안 느껴졌어.”

    “네가 일을 미숙하게 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이건 내 기우이겠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거든.”

    송 행수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녀의 예견을 얕보지는 않는지라 해월도 덩달아 생각이 많아졌다.

    “곧 축일이잖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본래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생기는 법이니까.”

    “다가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몰라. 일단 지켜보는 수밖에. 내가 떠나기 전까지는 도와줄 수 있지만, 그 이후엔 알아서 해.”

    “매정하긴. 그러시든가.”

    송 행수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매만지다 늘 끼워져 있던 지환이 없어 잠시 멈칫했다. 은명에게 내어줬단 사실을 깜빡한 것이다.

    그 짧은 정적이 의아해진 해월은 송 행수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송 행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은 어디 계셔?”

    “방에. 내가 시킨 일이 있거든.”

    “네 제자니까 감히 참견할 순 없지만 귀한 핏줄에게 함부로 그런 걸 가르쳐도 되는 거야?”

    백난국은 영하를 제외한 자들이 영력을 습득하는 것을 단속하는 데다 귀족이 영력을 쓴다면 모반의 씨앗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영력은 신성한 능력이니 뭐니 하면서 온갖 귀한 직함은 다 달아놓아 황궁의 전유물로 다루어 왔는데 그것에 금이 갈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 같은 천민이 부리는 영력은 천대받지만, 그 애가 그 힘을 귀중하게 쓴다면 꼭 영하가 되지 않더라도 공대 받을 거야.”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옛 나라들처럼, 더 이상 이 일이 천대받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해월은 믿고 있다.

    그 믿음이 실현되는 날에 제가 없더라도, 꼭 그리되길 바란다.

    ***

    방으로 돌아온 해월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연진을 보고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해월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 되었다.

    ‘쟤는 참… 우직하다 해야 할지 어리석다 해야 할지….’

    연진이 심병을 앓는 것 같다 토로하기에 방에서 명상이나 하라고 일러두고 저는 외출을 했다. 그 뒤로 반 시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명상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같은 자세를 오래 유지하고 있으면 분명 힘들 법도 한데. 뭘 어떻게 해야 저렇게까지 우직하게 굴 수 있는 건지 신기했다.

    해월은 눈을 감고 자세를 정좌하고 있는 연진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리고 소리를 치는 것과 동시에 뒤에서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야!”

    그 무게에 연진의 등이 잠시 앞으로 숙였다가 이내 바로 섰다.

    “사부?”

    “뭐야. 재미없게 왜 안 놀라.”

    연진의 반응이 심심하기 그지없어 해월은 실망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연진은 제 목에 감겨 있는 해월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내 기척이 느껴졌다고?”

    흠칫 놀란 해월은 연진을 끌어안은 팔을 풀지도 않은 채 반문했다. 기척을 느꼈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기척을 완전히 숨기고 다가갔는데…?

    해월은 기척을 숨기는 데 일가견이 있다. 마음먹고 제대로 임한다면 개미 한 마리의 움직임보다 약하게 움직일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방금, 해월은 제대로 기척을 숨겼다.

    “…….”

    당황한 해월이 입술을 달싹이자 연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명상을 오래 하면 감각이 배로 예민해지니 그런가 보다 하려 했지만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영력을 체득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고 그 수준도 아직 높지 않은데 명상 조금 했다고 이렇게까지 기민해지다니.

    “너….”

    “…….”

    “진짜 재수 없다.”

    “예?”

    느닷없이 나온 해월의 말에 연진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반면 심각한 얼굴을 한 해월은 둘렀던 팔을 풀고 연진의 앞에 마주 앉았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는 해월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연진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해월은 연진을 쳐다보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실력자를 제자로 들이다니.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꼴 아닌가. 물론 제대로 키우려 들인 것이지만.

    기쁘긴 한데 묘하게 떨떠름하고… 아무튼 복잡했다. 어찌 되었든 이렇게 된 이상 지금 제가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다.

    “…넌 정말 영하가 되면 안 되겠다. 앞으로 신궁 방향은 쳐다도 보지 마.”

    “그게 무슨….”

    “내 눈에 흙이… 아니 내가 눈감기 전까진 절대 안 돼.”

    “…설명이라도 좀 해 주십시오.”

    “네가 영하라도 되면 배가 아파서 못 살 것 같아.”

    해월은 불친절하게 답을 하며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몸서리를 쳤다.

    평화를 위해 살상이 가능한 주술은 다루지 않는다면서, 진정 척박한 땅은 정화하는 시늉도 하지 않는 그 가식적인 집단에 연진이 속한다고 생각하니 피가 끓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됐고. 약조나 해. 절대 영하가 되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연진은 마지못해 일단 대답했다. 어차피 영하가 될 수도 없고,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해월이 저렇게까지 말하니 우선 맞춰 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사부는요.”

    “어?”

    “저와 약조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무슨 약조…?”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약조 말입니다.”

    해월은 은근히 중요한 것들을 잘 까먹는 경향이 있었다. 지난번 약조를 흐지부지 넘겨서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연진은 이 기회에 확실히 바로 잡으려 했다.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죠?”

    해월은 뻘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연진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까먹고 있었다. 하지만 입은 착실히 거짓말을 내뱉었다.

    “…안 잊었어.”

    그 떨떠름한 목소리에 연진은 씨익 웃었다.

    해월은 어쩐지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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