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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81화 (81/124)
  • 81화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연진의 말을 들은 해월은 불현듯 기분이 이상해졌다.

    연진의 음성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느껴져서였다. 본래 연진은 점잖은 어투와 낮은 목소리로 말을 하기에 특유의 견고함이 있었다. 전혀 딱딱하지 않으면서 부드럽고 단정한 그 말투를, 해월은 좋아했다.

    그러나 방금 들은 연진의 말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낯선 것들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해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연진은 이내 몸까지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누워 있었다.

    서로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표정이 잘 보이는 것 같았다.비단 그들이 영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축일에 말입니다.”

    연진이 말을 덧붙였다.

    “사람들이 많아지면 길을 잃기 쉽잖습니까.”

    “…어, 그래.”

    사람들 틈바구니에서는 서로를 잃어버리기 쉬우니, 붙어 있자는 얘기…였다.  해월은 제가 괜히 이상한 판단을 한 건가 싶어 민망했다.

    동시에 해월은 안도했다. 왜 안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긴장이 풀리고 몸이 노곤해졌다.

    그제야 몰려오는 졸음에 해월은 몇 번 눈을 끔뻑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예민했던 감각은 졸음으로 무뎌지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연진은 잠이 든 해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마른 듯한 몸과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작은 미동이 연진의 시야를 채우는 움직임의 전부였다.

    “…….”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연진은 살포시 해월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윽고 작은 얼굴이 품에 닿았다. 한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저보다 작은 해월이었다. 해월이 내쉬는 작은 숨결이 심장에 스며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그란 머리를 살짝 쓰다듬자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감겼다. 전체적으로 작고 동글한 게 해월의 특징인 것 같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혹여 그 웃음소리에 해월이 깰까 한껏 숨을 참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은지 해월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연진은 쓰다듬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소중한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해월을 어루만졌다.

    이마, 눈가, 콧망울… 순서대로 매만지며 종국에 도달한 곳은 입술이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것만으로도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여실히 느껴졌다. 온몸의 감각이 손끝으로 집중되었다.

    “…사부….”

    숨결이 짙은 목소리가 밤의 어둠 사이로 흩어졌다.

    연진은 말을 하는 대신 차분한 눈으로 해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언제까지나 당신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이기적인 욕심일까. 공경심이 아닌 다른 감정을 품었다면, 그것은 저열한 욕망일까.

    이 모든 욕심을 하나도 버리고 싶지 않다는 것이 진정 추악한 본망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제게 무르게 구는 해월의 일면에 기대를 걸고 싶었다.

    그 희망을 붙잡듯 연진은 해월을 끌어안았다.

    연진의 희망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

    “이제 손목은 괜찮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퇴마사님.”

    해월은 아침부터 어젯밤 무뢰배 때문에 손이 상했을 기녀를 찾았다.

    악기를 다뤄야 할 귀한 손이니 혹시라도 안 좋은 후유증이 생기는 것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다.

    다행히 내열만 있을 분, 특별히 상한 곳은 없어서 간단한 치유술만으로도 쉽게 회복되었다.

    기녀의 방을 함께 나서며 연진은 앞장서던 해월의 손목을 붙잡았다.

    난데없이 손목이 붙잡힌 해월은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사부의 손도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나?”

    “아직 찢긴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잖아요.”

    “이 정도면 다 아문 거지 뭐.”

    피만 안 나면 아문 것이라 생각하는 편인지라 해월은 개의치 않았다.

    연진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피 한 방울 안 난 기녀의 손목은 그리 걱정하면서 화살에 쓸려 찢어진 제 손의 상처는 무신경한 게 거슬리는 것이다.

    그 시선의 의미를 대충 짐작한 해월은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축일에 우리 뭐할까.”

    속이 뻔히 다 보이는 짓이었지만 연진은 이에 맞춰 주었다.

    “특별히 할 것이 있겠습니까.”

    “풍등 날리는 거 있잖아.”

    풍등제.

    풍등에 소원을 적어 하늘에 날리면, 천신이 그 소원을 들어준다는 다소 미신적인 행사였다. 하지만 그 광경이 장관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밤하늘을 수놓는 것은 별뿐만이 아니란 걸 보여 주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잖냐. 간절히 빌면 천신이 감복해서 네 소원을 들어줄지.”

    “전 그런 것은 믿지 않습니다.”

    단호한 답변이었다.

    “하긴…그런다고 다 소원이 이뤄지면 왜 불행한 사람들이 있겠어.”

    해월은 한 번도 축일에 소원을 빌어 본 적 없었다. 어차피 그가 바라는 것은 이뤄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약간의 희망도 내버린 채였다.

    냉소적인 해월의 말에 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한 번쯤 믿어 보는 것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뭐? 방금 그런 거 안 믿는다고 말씀하신 분은 어디 갔냐.”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미 삼아 해 보는 거죠. 그리고 풍등을 날리는 것만으로 이미 소원은 이뤄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해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행하길 바라는 소원은 빌지 않으니까요. 행운을 바라면서 소원을 비는 그 순간이, 진정 행복한 순간일 겁니다.”

    앞으로의 행운을 빌며 희망을 품는 그 순간.

    그때가 바로 행복한 순간일 것이라고. 연진은 그리 말했다.

    “…….”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싶어서 해월은 살풋 웃었다. 내일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 행복한 사람이다. 적어도 지금은.

    ***

    송 행수가 하련방을 일대 최고의 기방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아리따운 기녀를 찾는 사내들에게 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와 춤, 서예와 시조를 파는 것. 그 귀한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귀한 피를 가진 그대들뿐이라 속삭이는 현혹(眩惑).

    그것에 넘어가지 않는 귀족들은 드물었다. 그들의 허영심을 채우는 일은 이토록 쉬웠다.

    물론 이러한 쉬운 이치를 실천하는 일은 어려운 법이다.

    높아진 하련방의 위상이 낮아지지 않도록 송 행수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다시.”

    송 행수의 차가운 목소리에 누각에 있던 기녀들은 저마다 눈치를 보다 다시 현을 켰다.

    고운 옷과 치장을 한 여인들이 켜는 현은 한없이 부드러운 곡조를 연주했다.

    “기녀가 켜는 현은 소리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다. 눈까지 즐거운 연주가 진정 아름다운 연주라 할 수 있음이야.”

    송 행수의 가르침을 받은 기녀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들 중 한 명이자, 송 행수에게 가장 많이 혼나는 기녀인 은명은 여지없이 현을 삐끗했다.

    띵.

    아름다운 가락 소리 사이에 유달리 강하게 들리는 엇나간 음. 장내에 정적이 흘렀다. 기녀들만 있는 낮이기에 너울을 쓰지 않은 송 행수의 차가운 얼굴이 여실히 드러났다.

    순식간에 굳은 분위기 속에서 송 행수가 입을 열었다.

    “은명이만 내 방으로 오고 나머지는 전부 가 보거라.”

    “예, 행수 어르신.”

    짤막한 명과 함께 기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예악서는 한없이 엄격한 송 행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들 송 행수에게 눈물 빠지도록 혼나 본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서두르는 것도 있었다.

    송 행수의 방에 단둘이 남게 된 은명은 제 실수를 후회하며 울상이 되어 있었다.

    “…….”

    기적에 이름을 올린 지도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실력이 부족한 것이 면목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제 스스로 실망스러워서였다.

    또 혼이 나겠지 싶어 자포자기하던 순간 송 행수가 운을 뗐다.

    “은명아.”

    예상과 달리 자애로운 어투였다.

    “…예, 행수 어르신.”

    “네가 이 기방에 발을 들인지는 얼마나 지났지?”

    “이, 이제 삼 년쯤 됩니다.”

    “그래. 벌써 그리 세월이 지났구나.”

    그렇게 말하는 송 행수의 말이 꼭 삼 년이나 수련했음에도 여직 부족한 제 실력을 지적하는 것 같아서 은명은 고개를 푹 숙였다.

    “처음 은명이 너를 보았을 때, 미색이 출중하여 반드시 뛰어난 명기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네가 보기엔 어떤 듯싶니?”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미색이 곱지만 다른 기녀들에 비해 특출나게 고운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타고나길 교태를 잘 부리는 성정도 아니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위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로 시선을 내린 은명을 잠시 보던 송 행수는 제 손에 끼워진 지환을 빼내어 서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 지환은 네가 가지렴.”

    “예?”

    “어서.”

    “…예 어르신.”

    송 행수의 채근에 은명은 그 가락지를 제 손가락에 끼워 넣었다. 늘 화려한 것들로만 치장하는 송 행수가 하는 지환치고는 다소 수수하고 투박한 모양이었다.

    송 행수는 지환을 낀 은명을 향해 엷은 미소를 짓다가 열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 묘한 눈빛에 은명 역시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명아. 너는 사람의 성정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본래 사람의 성정은 타고나는 것이라 쉬이 변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사람은 불변하는 것이지.”

    송 행수는 은명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근래 들어 조금 달라졌다.

    “한데… 그래도 바뀌어야겠단 생각이 드는구나.”

    송수련은 턱을 괸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은명은 그녀의 말뜻을 알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어차피 알아듣길 바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송수련은 때가 되었음을 알았다. 과거의 어리석음과 과오를 뉘우칠 때가.

    그녀가 굳이 영석을 깨부수어 해월을 불러낸 데는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바로잡고 싶어서, 억지를 부린 것이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녀와 해월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녀의 부친이 죽었던 날을 입에 담지 않았다. 해월은 그녀를 고아로 만들었고, 그녀는 해월에게 덧씌워진 죄악을 외면했으니 서로의 잘못은 명백했다.

    덮어 두고 외면해 버리는 것. 그것이 그들이 안정을 꾀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사색에 잠겨 흐려졌던 송 행수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내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

    갑자기 터진 그녀의 웃음에 은명은 아리송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송 행수는 배를 부여잡고 박장대소를 했다. 하도 웃어 물기까지 어린 눈에 비친 것은 해월과 연진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정다운 모습으로 붙어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들리진 않았지만, 좋은 일이 있었는지 둘 다 안온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송수련은 해월이 저런 얼굴이 된 모습을 처음 보았다. 넉살 좋고 사람 좋아 뵈는 웃음을 짓는 건 익히 보아 왔지만 저리 아무런 가림없이 웃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저 웃음을 가질 수 있는 건 맞은편에서 똑같이 웃고 있는 저 공자 때문이겠지.

    아, 우스워라. 살다 보니 정말 별일이 다 있었다. 저 바보천치 같은 놈도 저리 웃을 줄 알게 됐다니 말이다.

    “사람이 변할 수도 있었구나.”

    “……?”

    “아무것도 아니란다.”

    송 행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은명을 응시했다.

    “그 지환은 나중에 다시 돌려주렴.”

    “…….”

    “언젠가 너 스스로 뛰어난 기생이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때까지 연습을 게을리하면 아니 된다. 알겠지?”

    “…예, 예!”

    당찬 은명의 대답이 하오의 햇살 속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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