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다음날이 되어 해월은 송수련이 입을 만한 옷을 구해다 주었다.
옷을 받아 입은 송수련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여인의 옷은 대체 어떻게 구했대….’
‘다른 집에서 받은 거야.’
여인의 옷을 준 그 집 주인은 해월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옷이나 받고 저리 가라는 식의 냉대를 받긴 했으나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송수련은 옷자락을 매만지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꼬맹… 아니, 선해월.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
해월은 말없이 송수련을 쳐다보았다.
‘너는… 네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은 생각 없어? 화가 났던 적은?’
‘글세… 잘 모르겠어. 넌 네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싶어?’
‘…….’
송수련은 알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자신을 팔아넘기고 받은 돈으로 허구한 날 노름을 하는 아버지이지만, 유일한 혈육이자 의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면서 그 모든 것의 시초인 아버지를 수도 없이 원망했다. 죽이고 싶었던 적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 원망이 정말 실제일까. 머리끝까지 뻗친 화가 이상한 곳으로 가 버린 것은 아닐까.
송수련은 여직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그녀와 달리 해월은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네 아버지는 네 삶에 필요 없을 것 같은데.’
‘…….’
‘발목만 잡고 귀찮은 일만 늘어날걸.’
간단한 말들에 송수련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네 아버지가 네 숨을 막히게 하거든, 너도 똑같이 하면 되잖아.’
‘너… 미쳤어? 나더러 아버지를 죽이란 말이야?’
‘쓸모가 없으니 죽는 게 마땅하지 않나.’
너무나 평온한 목소리라서 송수련은 되레 기시감을 느꼈다. 짙은 불쾌감마저도 느껴졌다.
해월은 묵묵히 주구를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갔다 올 테니 방에 있어.’
‘밖에 눈이 저리 오는데 어딜 간다는 거야.’
어제보다 눈보라가 더 거세진 탓에 자칫하면 안 좋은 일을 겪을지도 몰랐다.
물론 해월은 신경도 안 썼다. 그는 눈을 좋아했고 이런 눈보라에 갇혀 죽을 거였음 진작 죽었을 테니까.
그저 마을 어귀에 붙여 둔 부적을 바꿀 때가 된 것뿐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 나중에 하나 지금 하나 똑같지 않나 싶었다.
송수련이 그런 해월을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해월은 그대로 집을 나섰다.
***
불을 잔뜩 땐 덕에 훈훈해진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송수련은 두들겨 맞은 탓에 뻐근한 몸을 풀 겸, 마당의 눈을 쓸고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보라는 아까보다 좀 잦아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마당에 발을 딛고 한 켠에 있던 빗자루로 눈을 쓸었다. 눈이 이리 많이 오는 상황에서는 쓸모없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은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리 오래 눈을 치운 것도 아니었다. 거진 일각쯤 지났을까.
‘송수련.’
수백 번은 들었던 괴팍한 목소리.
‘……!’
송수련은 반사적으로 몸을 굳혔다.
‘이년이 기껏 기방 문턱 넘겨 놨더니 왜 다시 돌아와?!’
‘아버지…!’
‘이 계집년이 왜 주술사 집에 있는 거야?’
질문을 하는 듯했지만, 그저 강압적으로 위협하는 말이었다.
송 씨는 겨울을 나기 위해 선학경에게 구걸을 하려다 우연히 제 딸을 보고 만 것이다. 불운도 이런 불운이 없었다.
딸이 여기저기 얻어맞아 성치 않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지, 송 씨는 거칠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 고통에 신음을 삼킨 송수련은 안간힘을 쓰고 버텼다.
‘다시는 그곳으로 안 돌아가요!’
‘뭐?’
‘그런 끔찍한 곳으로는 못 가요 절대.’
‘네깟 계집 팔자에 기방에서 호의호식하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어딜 배부른 소리야?’
‘안 간다니까!’
송수련이 거칠게 송 씨의 손을 뿌리침과 동시에 송 씨의 뺨에 손톱에 긁힌 상처가 났다.
송 씨가 뺨을 매만지자 그 손에 혈흔이 묻어났다.
분노가 일은 송 씨는 그대로 송수련의 뺨을 내리쳤다.
짝.
파열음과 함께 송수련은 그대로 눈밭에 쓰러졌다. 가까스로 아물었던 입술이 다시금 터졌다.
‘이젠 하다 하다 아비에게 피를 보게 해?!’
두툼한 주먹이 그녀의 얼굴을 몇 번이나 때렸다.
‘네 어미도 이렇게 잡았어야 했는데.’
‘…….’
송수련의 모친은 진작 딸을 두고 도망갔다. 그 흔한 서신 하나 안 남기고. 아니, 못 남겼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모두 글을 읽을 줄 몰랐으니까.
흰 눈에 흩뿌려진 제 핏물을 본 송수련은 넋이 나간 채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은 몇 번이나 겪었는데, 또다시 이번만은 다르지 않을까 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제 어리석음에 대한 자조였다.
춥고, 아팠다.
그렇게 눈을 감던 찰나, 언 뺨 위로 뜨거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도 맞아서 감각이 이상해진 것인가. 내리는 눈이 뜨겁게 느껴지다니.
송수련은 손등으로 뺨을 한 번 쓸고는 가늘게 눈을 떴다. 그녀의 흰 손등에 묻어 있는 것은 검붉은 피였다.
‘……!’
그제서야 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목도한 송수련의 얼굴에 금이 갔다.
‘커헉! 컥!’
송 씨가 무릎을 꿇은 채 연거푸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 밑에 쓰러져 있던 송수련은 그 뜨거운 피가 제 몸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낡긴 했어도 멀끔했던 옷이 순식간에 피로 젖었다.
송 씨는 제대로 된 말도 잇지 못하고 연신 피를 뱉다가 이내 그녀의 옆으로 고꾸라졌다.
송수련은 눈동자를 굴려 쓰러진 제 아비를 보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멍한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건 무감한 얼굴을 한 해월이었다.
‘거봐. 귀찮은 일만 생기잖아.’
해월은 자세를 낮추어 송 씨의 등에 박아 넣었던 칼을 빼내었다. 그 바람에 해월의 얼굴에도 핏방울이 튀겼다.
해월은 대수롭지 않게 칼을 갈무리하고 송수련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의 말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핏방울이 묻어 있었다.
송수련은 구역질이 나와 고개를 돌린 채 속을 게워냈다.
해월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다 죽은 송 씨의 시신 위에 부적을 붙였다. 원귀가 되지 않도록 미리 처신하는 것이었다. 해월은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늦기 전에 온 것 같아 조금은 다행으로 느껴졌다.
해월의 태연한 행동을 보던 송수련은 문득 제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죽길 바라서, 그가 죽는 상상을 수도 없이 했건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되레 이상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꿈처럼 아득히 느껴졌다.
왜일까? 아버지가 죽어서? 저런 인간도 아버지랍시고 죽은 게 안타까운 건가?
모르겠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송수련조차 제 눈물의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속이 무너지는 듯이 슬펐다. 그리고 기쁘기도 했다.
그녀가 울다 웃기를 반복하자, 한없이 무감각했던 해월의 얼굴도 흔들렸다.
‘…….’
해월은 머리가 조금 아팠다. 찬 공기를 너무 오래 마셔서 고뿔에 걸린 모양이었다. 눈앞에 있는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 열감 때문이겠지.
두 사람은 송 씨의 시신을 사이에 둔 채, 한참 동안 차가운 눈보라를 맞으며 서 있었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돼. 애초에 그럴 마음도 없겠지만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겠냐.”
그건 해월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죽인 사람의 딸을 좋아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아직도 송수련이 그때 무슨 마음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고.
후에 선학경이 송 씨의 시신을 수습해 주었다. 어차피 송 씨의 괴팍한 성정 덕에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고 그저 추운 날에 밖을 나섰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해월은 선학경에게 크게 혼났지만, 그러려니 했다. 송수련이 죽는 것을 막았으니 그걸로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송 씨에 의해 다시 어디론가 팔려 가거나 그에게 맞아 죽었을 테니.
후회는 없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
해월과 송 행수의 옛이야기를 듣는 내내 연진은 말이 없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까닭이다.
위로를 건네기엔 해월은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칭찬할 일도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여직 의문인 것은 있다.
그런 일이 있던 사이치고는 송 행수와 해월의 관계가 퍽 원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얼굴을 마주하기 껄끄러울 법한데 그들은 서로 살벌한 대화를 나눌 뿐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해월이 말을 이었다.
“그 뒤로 송수련은 기방으로 돌아갔어. 몇 년 후에 다시 찾아와서 기방의 행수가 되고 싶다고 도움을 청하더라.”
해월은 그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거절을 못 했다는 말이 더 옳을 것이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해월이 그녀의 부친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고아가 된 것은 해월의 탓이었다.
“이전 하련방 행수의 혼을 빼놓고 자신을 도와줄 만한 귀족들을 포섭해 달라는 부탁이었어.”
그런 일엔 주술이 제격이었다.
사술을 걸어 정신을 놓게 하고, 늙은 귀족들의 병환을 치료해 주면서 일은 쉽게 풀렸다.
해월이 관여한 것은 거기까지였고 뒷일은 알아서 하겠거니 했다.
“이전 하련방 행수는 심하게 기녀들을 괴롭히던 데다가 어린 동기들을 변태 같은 늙은이들한테 팔아넘긴 여인이라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어. 내가 한 일은 그뿐이었고 나중에서야 행수의 자리에 올랐다는 얘길 들었지.”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몰랐습니다.”
“솔직히 나도 놀랐어. 정말 송수련이 행수가 될 줄은 몰랐거든.”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리는 사람은 많아도, 스스로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송수련은 그걸 해낸 여인이었다.
그렇기에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에 기방의 주인이 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이리 번성시키기까지 했으니 그 재기는 결코 낮잡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두어 번… 오며 가며 객잔 삼아 며칠 머물렀어. 그때마다 기방에 부적을 붙여 주거나 주구를 내어주곤 했지.”
지난 기억은 아예 없는 것처럼 둘은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 송 행수가 영석을 부쉈다면서요. 그건 무슨 얘깁니까.”
“더는 찾지 말라는 뜻에서 내 힘 일부를 영석에 담아 줬거든. 그걸 부수는 바람에 그 힘이 내게 돌아오게 됐고.”
연진은 짐짓 놀랐다.
“영력을 그리 내어주면 사부께서 위험하신 거 아닙니까.”
“괜찮아. 다 내어준 것도 아니고 반절만 준 건데.”
“…….”
연진은 의문스러웠다.
반절‘만’ 내어준 게 아니라, 반절‘이나’ 내어준 것 아닌가?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다지만 흔한 물건 같은 것도 아니고 퇴마를 할 때 꼭 필요한 영력을 반이나 내어주고서 괜찮다니.
오히려 그런 영석을 부순 송 행수에게 감사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연진의 심각한 분위기를 읽어 낸 해월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안 죽었잖아.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한주까지 간 거고. 그러다 널 만난 거니까 운이 좋았지.”
“속 편한 소리 하십니다.”
“하하. 그런가?”
“그런가가 뭡니까.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마세요.”
연진의 지청구를 받은 해월은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어차피 이젠 힘들어서 하고 싶어도 못 해.”
“듣던 중 다행이군요.”
해월은 제 안전을 우선시하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모두가 자신만을 우선하여 생각하는 세상에서 어찌 자신을 뒷전으로 생각한단 말인가.
마음 같았으면 이 밤 내내 해월에게 당부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해월은 그런 말들을 잔소리로 치부하고 흘려들을 게 뻔했다.
해월은 연진 쪽으로 돌아누우며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곧 축일이야.”
“정말 축일까지 이곳에 머무실 요량이셨습니까.”
“그러기로 했으니까. 약조한 것은 지켜야지.”
약조란 것이 본래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해월은 유달리 약조를 잘 지키는 편이었다.
그렇게 살라고 어린 날부터 수없이 언동을 제지당해서인지,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하게 되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꺼림직해서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 저와도 약조 하나 해 주십시오.”
“그래…. 어?”
무의식중에 승낙하던 해월은 뒤늦게 반문했다.
“무슨 약조를…?”
저와 연진이 딱히 약조할 게 있나 싶어 의문이던 차에 견고한 목소리가 들렸다.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조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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