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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9화 (79/124)

79화

해월이 열댓 살쯤 되었을 무렵의 어느 겨울날이었다.

선학경이 인근 마을에 일이 있어 집을 비우고 해월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얀 눈을 보면서 해월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고 그 땅을 밟으면 소복소복 포근한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좋아서 추위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한참이나 길을 서성였다.

뺨이 얼고 콧속이 아릴 정도의 추위였다.

그렇게 반 시진쯤 지났을까.

해월은 멀리서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저를 향해 다가오는 이는 누가 보아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손발도 얼어붙었는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 느릿한 발이 멈춰 선 것은 해월의 바로 앞에서였다.

털썩.

쓰러진 이에게 가까이 다가간 해월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송수련…?’

해월보다 먼저 단곡에 터를 잡고 살던 송 씨의 하나뿐인 딸, 송수련이었다.

이웃에게 도움은 주어도 관심은 주지 않는 해월인지라, 송 씨의 딸이 어째서 제 집 앞에서 쓰러진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름도 송수련이 맞긴 한 건지 헷갈렸다.

게다가 멀찍이 있을 때는 몰랐는데 송수련은 상당히 귀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단곡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구경도 못 할 정도로.

다만 여기저기 헤져 있는 데다 그 틈새로 상처가 제법 보였다. 눈을 오래 맞았는지 온몸이 얼음장이었다.

치료가 시급해 보여서 송 씨에게 데려다주지 않고 일단 집에 들였다.

아궁이에 불을 한가득 떼고 다시 방에 들어와 살펴본 송수련의 상태는 얼핏 봤던 때보다 더 심각했다.

멍석말이라도 당했는지 마른 몸은 온통 멍투성이인 데다 얼굴도 수차례 맞은 듯 입술이 터져 있었다.

해월은 즉시 약을 지어 환부에 발라 두고 얼어붙은 옷은 대충 갈무리한 뒤 두꺼운 이불을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저 송수련이 깨어날 때까지 곁에 앉아 있었다.

심한 상처 때문에 며칠을 앓아도 부족할 것 같았는데 송수련은 의외로 눈을 금방 떴다.

송수련은 몸을 일으키며 곧장 경계부터 했다.

‘너, 너 뭐야!’

고맙다는 인사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기껏 보살펴 준 보답이 이런 냉대라니. 탐탁지 않은 마음에 해월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쓰러져 있길래 들인 거야. 몸은 좀 괜찮아?’

‘…….’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송수련은 주위를 살폈다. 우려하던 장소는 아니었는지 그녀는 안심하는 듯했다.

‘…너 선해월이지. 선학경 아저씨네 양자.’

‘맞아.’

‘…아저씨는?’

‘볼일 있어서 다른 마을 갔어.’

‘그렇구나.’

순간이지만 송수련의 얼굴에 비친 절망을 읽어 낸 해월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눈이 그치지 않을 테니 내일 본가로 돌아가. 부군께서 걱정하시겠다.’

‘…뭐…?’

‘부부싸움이라도 해서 도망 온 모양인데 이 엄동설한에 집 밖을 나서는 건 무모한 짓이야.’

늙다리 귀족에게 시집을 가서 겪었을 사정들은 대충 알 만하다만 이런 날씨에 도망을 온 것은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짓이었다.

살고 싶어서 도망을 친 것일 텐데, 이렇게 궂은 날엔 죽고 싶어서 도망을 친 것과 다름없으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송수련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그 노인네가 죽은 지가 언젠데. 너 나 기생된 거 몰라?’

‘아, 그랬던가.’

담백하다 못해 심심한 반응이었다. 적어도 놀라는 척이라도 했으면 조금 나았을까.

송수련은 또다시 헛웃음을 지으려다 터진 입가가 쓰려서 인상을 찌푸렸다. 개새끼들. 암만 도망치려 했다지만 기녀 얼굴을 이리 만들다니. 자비를 바라고 도망친 것은 아니지만 가혹한 처사임은 분명했다.

해월은 욕을 짓씹는 송수련에게 약재를 건넸다.

송수련은 아무 말 없이 그 약재를 받아들고 대충 입가에 발랐다. 이미 한차례 발랐던 모양인지 상처 부위가 약재로 젖어 있었다.

방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송수련은 그저 묵묵히 앉아 있었고 해월도 말없이 서랍에 있던 주구를 정리했다.

‘…야.’

정적을 깬 건 송수련이었다. 짤막한 부름에 해월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침묵이 다시금 흐르는 동안 해월은 송수련이 할 말을 기다려 주었다.

‘…내 아버지한테 나 여기 왔다고 하지 마. 절대로 말해선 안 돼.’

‘그럴 거면 왜 여기 온 거지? 하나뿐인 아비에게라도 의탁하러 온 거 아닌가.’

‘난 그런 게….’

해월의 말에 반박하려던 송수련은 이내 자조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씁쓸하기 짝이 없는 음성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수없이 도망을 쳤지만 언제나 목적지는 제 고향이었다.

도망쳐 봐야 갈 곳이 없으니까. 결국엔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게 고향이든 끔찍한 그곳이든.

송수련은 그런 여인이었다. 암흑으로 흘러 들어가는 인생을 어떻게든 양지로 꺼내려 발버둥 치는 사람. 그럼에도 막을 수 없는 세상 풍파에 속절없이 흔들려 버리고 마는, 그런 안타까운 삶.

기방에서의 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배를 곯지는 않았으니. 그러나 배를 안 곯는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런 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

송수련은 해월을 쳐다보았다. 해월은 송수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의문스러운 얼굴이 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기방에서 도망치다가 매질을 당한 모양인데 그렇게 매질 당할 거 알면서 왜 굳이 도망을 치는 거야? 안 아픈 게 좋잖아.’

‘…이깟 매질보다 거기서 사는 게 내겐 더 지옥이야.’

‘왜? 기방은 좋은 옷도 있고 온갖 산해진미도 다 먹어볼 수 있다던데.’

기방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어린 해월에게 기방은 그리 나쁜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서 썩어 갈 바엔 차라리 화려한 곳에서 썩어 가는 것이 낫지 않나. 적어도 귀한 옷을 입고 귀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그 삶이 제 삶보다는 나아 보였다.

‘…….’

송수련은 주먹을 움켜쥔 채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비단옷과 산해진미가 사람을 살게 하는 게 아니야.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숨이라고. 그곳은 숨이 막혀서 살 수가 없어.’

두 번의 혼인 생활보다 기방에서의 시간이 그녀에겐 더욱 끔찍했다. 그저 숨을 쉬고 싶은 마음에 도망을 친 것이다.

아래로 향한 송수련의 눈빛은 공허했다. 그 공허를 알 수 없었던 해월은 다시금 말을 꺼냈다. 꼭 겨울의 눈처럼 차가운 말을.

‘그리 기녀의 삶이 싫다면 차라리 돈 많은 나리들 첩실 자리를 알아보지 그랬어.’

‘…너 내 말을 듣기는 했니?’

‘들었는데 왜.’

‘그러는 너는 선 씨 아저씨한테 구박받으면서 도망 안 가는 이유가 뭔데.’

송수련이야 일찍이 시집을 갔다 보니 해월과 마주할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선학경에게 매질을 당하는 해월의 모습을 간간이 본 적 있었다.

다리에서 피가 철철 나도록 맞아도 비명 한 번 안 지르기에 보통은 아닌 줄 알았지만 직접 말을 섞어 보니 역시 정상은 아니었다.

‘그냥. 아버지랑 같이 사는 지금이 내겐 최선이니까. 지금 이거보다 나은 선택은 없어.’

‘…그건 네가 벗어나 본 적 없어서 그런 거야. 넌 모르겠지만 난 도망치면서 며칠 동안 길바닥을 전전할 때가 제일 행복했어. 그걸 한 번 맛본다면 너도 이전으로 돌아가긴 어려울걸.’

송수련이 단정 짓듯 말하자 해월은 곧바로 부정했다.

‘예단하지 마. 난 너와 다르니까.’

‘나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 주제에 말하는 본새하고는….’

송수련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해월은 송수련과 달랐다. 하나씩 포기해 왔던 그녀와 달리 해월은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살고 있었으니까.

애초에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맞지 않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너보다 한참 어린애한테 치료받지 않았으면 넌 다리를 잘라 내야 했을 거야. 치유술이 없었더라면 분명 살이 썩었을 테니.’

‘흥! 기생이 얼굴만 반반하면 그만이지.’

그러면서도 송수련은 유독 천이 많이 감겨진 제 다리를 슬쩍 보았다. 다리 부근을 특히 강한 힘으로 여러 번 밟힌 기억은 있었다. 이 추위에 동상까지 걸렸기에 그대로 두었으면 해월의 말대로 정말 잘라 내야 했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 반반한 얼굴도 지금은 멍투성이였지만.

해월은 주구를 정리해 놓은 서랍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기생은 춤과 노래를 파는 예인들이지 미색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나.’

‘역시 꼬맹이라 뭘 모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백난국땅에서 너밖에 없을걸. 기생은 다 같은 창기 아니냐는 사람들이 수두룩이야. 실제로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

송수련은 기녀로서 머리를 올렸던 날을 떠올리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잔재하는 것조차 끔찍한 기억이다.

나만의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삶에, 유일한 그녀의 것은 몸뿐이다. 그것마저 타인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싫었다.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데 그거 하나조차 내 맘대로 못 한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지… 넌 몰라.’

‘맞아, 난 몰라. 하나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네가 배운 게 예악이 아닌 게 되는 건가?’

‘…….’

송수련은 할 말을 잃고 멍한 얼굴이 되었다.

해월은 송수련의 표정을 살피지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너 스스로를 창기라고 생각하면 창기가 되는 거야. 남이 무어라 한들 네가 예인이라 하면 예인이 되는 거고.’

고저 없이 단조로운 목소리가 송수련의 귀를 찔렀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낀 그녀는 힘없이 웃었다.

‘너… 바보 천치인 줄 알았는데 제법 말을 잘하는구나.’

‘너한테 칭찬받으려고 한 얘기 아니거든.’

그사이, 추위는 점점 더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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