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78화 (78/124)

78화

“왜 오라니까 또 안 와.”

연진이 막상 멍석을 깔아 주면 올라앉지 못하고 당황스러워한다는 걸 알게 되자 해월은 지금 이 상황이 퍽 유쾌하게 느껴졌다.

“…….”

해월의 재촉에 연진은 홀린 듯이 해월의 곁에 누웠다. 혼자 눕기에 넓었던 이부자리는 두 사람이 누우니 딱 알맞았다.

사실 체격이 큰 연진이 차지하는 공간이 더 컸다.

떡 벌어진 연진의 어깨를 잠시 감상하던 해월은 약간의 패배감을 느꼈다.

“무인 가문 출신이라 그런지 역시 넌 몸이 좋은 것 같아. 솔직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 말에 연진은 그런가보다 싶었다. 딱히 활동을 안 해도 체격이 왜소했던 적이 없었으니까.

일단 체격이고 뭐고 옆에 누워 있는 해월이 신경 쓰여서 몸이 굳었다. 한방을 쓰더라도 이부자리를 갖고 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같은 이불을 덮을 줄이야.

딱딱한 자세로 누운 연진을 보던 해월은 쿡 하고 웃음을 흘렸다.

“내 버릇은 네가 다 버려 놓은 것 같아.”

“예?”

연진이 반문에 해월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해월은 제가 어리광을 부리는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도 아니었나  보다.

저보다는 한참 어린 제자한테 칭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아직 저는 어린 날에 멈춰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참을 옅은 웃음을 짓던 해월이 이윽고 웃음을 멈추고 운을 뗐다.

“너도 혼자 자던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을 텐데 너는 어떻게 버텼어?”

연진의 성숙한 성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새삼 궁금해진 것뿐이다.

“딱히… 어릴 적엔 보통 부모와 같이 자겠지만 전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연진은 무심한 어투로 답했다.

연진은 이미 어릴 적부터 혼자 방을 쓰고, 혼자 잠자리에 들었다. 그것이 귀족가의 법도였으니까.

자식에게만큼은 한없이 자애로웠던 아버지도 연진과 함께 잠을 자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서운했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제 아들이 혼자 보내는 날이 많아질 것을 알고 미리부터 적응할 수 있도록, 그리 한 것이었다.

해서 연진은 밤이 외롭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말이 담고 있는 속뜻은 제법 안쓰러운 것이었는데 어투가 여상해서 해월은 괜한 걸 물어봤나 걱정스러웠다.

해월의 얼굴에 쓰여진 감정을 읽은 연진은 피식 웃었다.

“괜한 걸 물은 것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넌 은근히 내 속을 다 아는 것 같아. 사람 보는 눈치가 그리 좋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영민한 것과 이런 쪽의 눈치는 별개였다. 연진은 대체로 기민하지만 사람 보는 눈치는 별로 없어 보였다.

“…….”

연진은 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하는 꼴 아닌가.

그 생각을 알 리 없는 해월은 살풋 웃고는 말을 보탰다.

“그래서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귀한 거니까.”

먼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앞서서 알아채고 손을 뻗어 주니 고마울 수밖에.

“이놈 이거 독심술이라도 배운 거 아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저라고 사부의 속마음을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해월의 생각과 달리 연진은 자신이 해월의 속내를 너무 몰라서 속이 쓰렸다.

짤막한 감정은 너무도 쉬이 보이건만, 깊고 넓은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 비대한 외로움의 크기를 감히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러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해월이 좋았다. 쉬이 알기 어려운 사람, 그 비밀스러움이.

해월은 연진의 말을 듣고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넌 언제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 주거든.”

다정하다는 말도, 떠나자는 말도. 다 해월이 원했던 말들이다. 저 스스로 하기에는 어려운 말들이라 누군가 해 주길 바랐던 말들. 그 말들을 연진은 다 아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런 연진을 아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단순히 제자를 넘어 자식이나 형제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가족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제대로 된 가족은 이번 생에 없다는 것이 느껴져서.

하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꼭 피로 맺어지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건 지난 경험들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방적일지라도 가족이라면 가족이지 않겠는가.

“진아, 너 내 아들 할래?”

“……!”

너무 황당한 소리라서 연진은 헛숨을 삼키다 사레에 들렸다. 격하게 당황한 연진과 달리 해월은 천연덕스러웠다.

“그냥 해 본 소린데 뭘 그리 놀라.”

“…제가 사부의 아들을 왜 합니까.”

“안 될 게 있냐. 사부(師父)나 부(父)나 비슷하잖아.”

“…….”

연진은 말을 하지 않고 눈빛만으로 헛소리 말라는 뜻을 전달했다. 물론 해월은 그 전달을 가볍게 무시하고 웃었다.

“야 나도 열여덟 살 아들 두기는 싫거든? 여덟 살이면 모를까…막말로 네가 내 아들뻘은 아니잖아.”

“허면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월의 기준에서는 가족이 되자는 말이 그다지 갑작스러운 소리가 아니었다.

“그냥 우리가 가족이 되면 어떨까 해서 해 본 소리야.”

“…그런 것이라면 부자 관계보다는 의형제가 낫지 않겠습니까.”

연진이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월이 꺼내는 말이니 맞장구쳐 주는 것뿐이지 연진은 해월과 그런 식으로 가족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자 관계 같은 황당무계한 소리는 물론이고 의형제도 싫었다. 지금도 충분히 배덕감을 느끼고 있는데 정말 그런 관계가 되어 버리면 서너 배는 더한 배덕감을 느낄 것 같아서였다.

연진에게 잠재된 불만을 겉핥기식으로 읽어 낸 해월은 일부로 짓궂게 물었다.

“왜? 너 혹시 나 형이라고 부르기 싫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는 무녀독남입니다.”

해월은 칫 하고 입술을 한 번 삐쭉였다.

“하여간 꽉 막혀서는….”

농담 한 번을 안 받아준다. 나중에는 농담을 받아주는 훈련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네가 꽉 막힌 게 퍽 재밌고 좋다. ”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해월은 후자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허면 저도 좋습니다.”

즉각적이고 직설적인 대답이었다. 해월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 맹목적인 제자를 어쩌면 좋나 싶어서.

자식을 품에 싸고도는 부모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물론 해월은 그 자식의 입장을 겪어 본 적은 없었다.

이러다 자식 바보가 아니라 제자 바보가 되면 어떡하나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보다는 이 제자부터가 바보 같지만.

“바보야. 그런 말은 나중에 은애하는 이가 생겼을 때나 해 주는 거야.”

해월은 괜히 연진에게 지청구를 주었다. 좋다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 것 같아서 좀 아끼라고 조언하는 것이다.

“…저 바보 아닙니다. 그러는 사부야말로 송 행수에게 천치라 불리시지 않습니까.”

“야 그건 송 행수가 멋대로 부르는 거고.”

“어찌 되었든 전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완강한 부정이었다. 연진은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을 듣기 싫었다기보다 해월에게 그런 사람으로 취급당하는 게 싫었다.

가뜩이나 해월은 늘 저를 어리게 취급하니 말이다. 사실 겉모습만 보면 해월이 더 어리게 생겼는데 이건 왠지 억울했다.

해월은 연진의 기분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그래 너 똑똑한 거 다 알지. 처음 봤을 때도 엄청 어려운 책 읽고 있었잖아. 근데 넌 아직 세상을 몰라. 지금은 아닌 것 같아도 인연이란 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거거든. 혹시 알아? 네게도 다른 가족이 생길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앞날을 예견할 수는 없는 법이다. 행운도 불운도 언제나 정면에서 오지는 않으니까.

막아 볼 틈도 없이 가까이에 오고 나서야 알아채는 것, 그것이 운이었다.

“너와 연을 맺게 될 사람도 그 연이 닿기 전까지는 너와 맺어질 줄 꿈에도 모를걸?”

“…그런 것 같기는 합니다.”

연진은 쉽게 수긍했다. 연이 맺어질지 안 맺어질지는 모르지만, 일단 꿈에도 모르고 있는 건 맞아 보이니까.

“사부의 인연도 어디엔가 있을 겁니다. 어쩌면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르고요.”

“하하. 있기는 할까. 있어도 이름 모를 그분한테는 너무 미안한데.”

장난기와 진심이 반반씩 섞인 말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어렵게 기다려온 상대가 고작 나라면 좀 별로이지 않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해월의 자조를, 연진은 곧장 부정했다.

“사부와 인연이 될 사람은 분명 좋아할 겁니다.”

사뭇 진지한 어투에 해월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풉. 그래 팔이 안으로 굽는 것도 좋네. 우리 도련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

“사설이 너무 길었다. 이만 자 여독이 쌓여 피곤할 텐데.”

어둠이 드리워져서 다행이었다. 어둠이 아니었으면 연진이 정색하는 얼굴을 조금의 가림도 없이 봐야 할 테니까.

“…잠이 안 옵니다.”

“그래도 얼른 자. 아니면 뭐 옛날얘기라도 읊어주랴?”

해월이 농담으로 꺼낸 이야기에 연진은 솔깃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옛날얘기요?”

해월은 순간 아차 싶었다. 하지만 뱉은 말을 주워담을 수는 없었다.

“그… 나도 재밌는 옛 설화 같은 건 잘 모르는데.”

“설화 말고 사부의 옛이야기를 해 주시면 안 됩니까?”

“내 얘기? 글쎄… 그날이 그날 같았어서 별로….”

연진에게 해 줄 만한 재미난 이야기나, 가르침이 될 법한 무용담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지루한 이야기라도 꺼내야 이놈이 잠을 잘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해월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하련방에 온 김에 이곳 주인의 뒷얘기나 할까.”

“송 행수 얘기를요?”

“어차피 한 번은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송수련이 어찌하여 하련방의 주인이 되었는지 말이야.”

송수련은 이 큰 기방의 주인이 되기엔 이른 나이임이 분명했다. 그 점이 연진도 의문스러웠다.

연진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해월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너도 알다시피 나와 송 행수는 같은 단곡 출신이야. 우리 마을은 백난국에서 소외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고.”

해월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금의 화려한 송 행수의 모습을 보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연진이 안 믿기는 것도 당연했다. 비단 연진뿐만 아니라 이 하련방의 누구도 송 행수의 그런 시절을 모를 것이다.

그건 송 행수의 부단한 노력의 결과이기도 했다. 누구도 함부로 넘볼 수 없도록 늘 화려한 치장을 하고, 외부인에게 얼굴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도록 했으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송 행수와 내가 고향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은 거의 없어. 옛날에는 서로 안면만 튼 사이였지.”

“허면 어찌 지금처럼 지내시게 된 겁니까.”

해월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음성을 냈다.

“누차 얘기하지만, 송 행수와 내가 무슨 사이라도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한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지난번처럼 송 행수가 싫어서 질색하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여상하기만 해서 되레 이상하게 느껴지는 차분함. 연진은 괜스레 긴장을 느꼈다. 해월이 무슨 얘기를 꺼낼지 호기심 섞인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그리고 뒤이은 해월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가 송 행수의 아버지를 죽였으니까.”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78)============================================================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