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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7화 (77/124)
  • 77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동그랗게 치켜뜬 해월의 눈에 등불을 들고 있는 연진이 담겼다. 긴 침묵이 흘렀다. 말문이 막혀 한동안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다가 이내 정적을 깼다.

    “너, 너 안 자고 있었어?”

    해월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어째서인지 뒷걸음질까지 하게 되었다. 설령 마물을 마주해도 앞으로 가길 택했기에 해월은 스스로가 낯설었다. 자세가 형편없이 굳었다.

    그런 해월을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연진은 다시금 질문했다.

    “어딜 다녀오십니까. 이 시각에.”

    “어… 밤 산책을 좀….”

    성의와 신뢰감이 모두 없는 말이었다. 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은 말로 할 때 이실직고 하라는 뜻이 여실히 전해졌다.

    “…송 행수를 만나고 왔어.”

    “송 행수를요? 무슨 이유로요?”

    “…그런 게 있어.”

    차마 송 행수와 네가 한 대화가 신경 쓰여 잠이 안 올 지경이라 물어보러 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만 자러 가.”

    “싫습니다.”

    “싫은 게 어딨어. 스승이 명하면 제자는 군말 없이 따르는 거야.”

    해월은 괜히 마음에도 없는 상하관계를 주장했다. 물론 연진은 해월이 부러 그런다는 걸 알았다.

    대충 무슨 이유로 해월이 송 행수를 찾아간 건지는 알 것 같은데, 그래도 본인 입으로 듣고 싶었다. 이럴 땐 밀어붙이는 게 제격이다. 해월은 은근히 그런 것에 약했으니까.

    “하면 이 방에서 같이 자요.”

    “뭐?”

    준비되어 있던 방은 당연히 두 개. 해월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연진은 어쩐지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저와 같이 방을 쓰고 싶다고 했었다.

    굳이 불편하게 한방을 쓸 필요가 뭐 있나 싶어서 해월은 그 말을 딱 잘라 거절했었다. 그런데 그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왜 굳이…?”

    “사부께서 혼자 주무시는 게 무서우시다면서요.”

    “아니 그건 그리 두려운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그건 무서움보단 외로움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렇지만 그 본의를 연진이 몰랐다면, 저를 위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멀쩡한 방 놔두고 왜 한방을 써.”

    “이 방 넓지 않습니까. 둘이 써도 괜찮을 터인데요.”

    “그건 그렇지만….”

    거절하려던 해월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연진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송 행수를 어찌하여 찾아가셨는지 답하시면 제 방으로 가겠습니다.”

    어쩐지 말려든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어서 해월은 떨떠름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소심한 반항이었다.

    “궁금해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어지는 터라 해월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다문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을 연진은 이미 체득했다.

    “역시 송 행수와 그렇고 그런….”

    “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읍.”

    “조용히 하십시오. 기방 사람들 다 깨겠습니다.”

    연진은 해월의 입을 재빨리 막곤 주의를 주었다. 한차례 진정한 해월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쏜살같이 말을 했다.

    “암만 오해할 게 없어도 그렇지, 나랑 송 행수를 그렇게 보다니…. 송 행수는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하물며 기생인 데다 타고난 노름꾼이라 허구한 날 노름판을 열어서….”

    달변가처럼 설명하는 해월을 연진은 무심히 바라보다가 입매를 늘렸다. 종알종알 입술이 움직이는 게 꼭 참새 같았다. 역시 저는 이상한 사람이 맞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승을 놀려 주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이 야심한 시각에 사내가 여인의 방에 몰래 찾아갔는데 달리 곡해할 것이 있습니까.”

    “야. 그건 곡해가 아니라 음해 수준이거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해월은 기분 나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투명한 감정 표현에 연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하면 왜 가셨는데요.”

    놀리는 어조로 정곡을 찌르자 해월은 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실토했다.

    “너한테 무슨 소리 했는지 물어보러 갔다. 됐냐?”

    연진은 일순 표정을 굳혔다.

    “해서… 송 행수가 무어라 말했습니까.”

    “무어라 말하긴, 헛소리만 잔뜩 들었구먼.”

    차마 연진에게 그 헛소리들을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저와 연진을 엮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놀림 말은 저 하나만 들어도 충분하니까.

    해월이 툴툴거리며 말하자 연진은 당황했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저리 단도직입적으로 송 행수에게 캐물었을 줄이야. 솔직히 조금 놀랐다.

    안심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송 행수는 실없는 소리로 일관한 모양이다. 혹여 해월에게 대화의 내용을 발설했을까 봐 염려했었는데.

    다만 해월은 그 바람에 짜증이 일은 듯했다. 평소엔 그의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가 지금은 손가락 결대로 뒤로 넘어가 있었다. 해월은 답답하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머리를 쓸어 넘기는 버릇이 있다.

    연진은 손을 뻗어 해월의 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해 주었다.

    “……?”

    해월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이제 잘 건데 머리를 정리해 뭐 하나 싶은 것이다. 뭐하냐는 해월의 시선에 연진은 굳이 해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내 해월도 그러려니 했다.

    해월은 연진의 이마를 검지로 툭 쳤다.

    “이제 도련님은 그만 가서 주무시지요. 소인은 이 방에서 잘 테니.”

    어쨌거나 연진이 내건 조건은 충족해 줬으니 이걸로 된 것 아닌가. 이제 각자의 방에서 따로 잠을 청하면 된다.

    해월은 그대로 뒤를 돌아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그런데 사라져야 할 인영이 여전히 방 한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월은 옆으로 돌아누워 턱을 괬다.

    “안 가고 뭐 해.”

    연진이 그 자리 그대로 우뚝 서 있었다. 까만 두 눈동자가 이쪽을 응시해 왔다.

    해월은 그 눈에 서린 생각을 읽어내려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쉽게 그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두워서인가. 얇은 등불의 빛줄기에 의지해서는 이해하기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

    연진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운을 뗐다.

    “…걱정돼서 못 가겠습니다.”

    “뭐? 내가?”

    “예. 사부께서는 기가 허하시잖아요. 혼자 주무시는 것도 무섭다고 하셨고.”

    해월은 자신이 연진에게 단단히 오해 샀음을 깨달았다. 뭐 예상 못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억울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문득 과거 연진과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의 앞에서 기절하고, 코피를 쏟고, 피를 토하고…. 정말 가관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연진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서 연진이 그리 허약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저 또한 그리 걱정했을 테니까. 그뿐만 아니라 솔직히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보호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네 걱정 받을 나이는 아니잖냐.”

    그래도 앞가림은 스스로 하는 게 낫다. 걱정하게 하고 도움을 받는 일에 익숙해지기는 싫었다. 약해지는 것 같아서.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지.”

    “그래도 걱정이 되는걸요.”

    “아이고. 그렇게 걱정되셨어요? 우리 도련님이 이리 마음을 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장난스러운 어투에 연진은 정색과 질색을 동시에 했다. 창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과 옅은 등불에 의지하고서도 그 표정이 너무도 선명히 와닿는 바람에 해월은 웃음을 흘렸다.

    “풉.”

    “…….”

    “너 그 표정 할 때 엄청 웃긴 거 알아? 냉정하게 생긴 놈이 어이없다고 얼굴에 써 붙이고 있으니까 진짜 웃긴다.”

    해월은 야심한 시각 탓에 억지로 웃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 연진은 불퉁한 얼굴이 되었다.

    “…도련님이라고 그만 부르십시오.”

    “도련님을 도련님이라고 하지 뭘.”

    “이제 출가했으니 그런 호칭은 당치 않습니다.”

    “호적에서 지워진 것도 아닌데 왜 그 귀한 신분을 내려놓으려 해.”

    “어차피 그런 것들은 의미 없습니다.”

    해월은 손을 뒤로 하여 머리를 받친 채 다리를 꼬았다.

    “언젠가 네 신분이 요긴하게 쓰일 날이 올 거야.”

    “예?”

    “무엇이든지 두고 보면 쓸모가 있는 법이거든. 그게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연진에겐 해월의 말이 다소 허무맹랑하게 들렸다.

    “그냥… 사람 일은 어찌 될지 모르니 속단하지 말라고. 막말로 네가 다시 귀족으로서 권력을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럴 일은 추호도 없습니다.”

    연진은 강하게 부정했다. 그는 더 이상 가문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덧붙여 그럴 수도 없었다.

    아직 이 지역까지는 소식이 닿지 않은 모양이지만, 조만간 백난국 전역에 한주 강씨가 망했다는 풍문이 퍼질 것이다. 황궁과 귀족들에게 미운털도 단단히 박혔을 테고, 그렇다면 회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선 제 말에 더 일리가 있다. 저는 가문을 버리고 나왔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퇴마사 스승을 따르고 있으니까. 허무맹랑한 쪽은 응당 해월이라 할 수 있다.

    “앞일은 모르는 거야.”

    인생사는 어찌 될지 모른다는 걸 해월은 잘 알았다.

    어렸던 해월은 자신이 나중에 남을 위해 살아가게 될 줄 몰랐다. 자라나면서 고향을 도망칠 생각을 하게 될 줄 몰랐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귀족 제자를 들일 줄도 몰랐다. 모두 예상을 벗어난 일들뿐이다.

    때문에 해월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좁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저 역시 죽지 않고 오래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헛된 희망 같은 걸 품어보곤 한다.

    해월은 자신이 졌음을 깨달았다. 역시 홀로 이 밤을 보내기엔 외로웠다. 이 어둠에 잠겨 숨이 막혀 죽을 거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자조적인 웃음을 지은 해월은 연진을 쳐다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건드렸다.

    “이리 와.”

    짤막한 부름에 연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같이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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