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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6화 (76/124)

76화

“…언제는 안 이상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며.”

해월이 입술을 삐쭉이며 불퉁하게 말했다.

“그런 이상함이 아닙니다.”

연진은 해월을 달래듯 말을 덧붙였다. 기이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이상하다는 말 외에 지금의 기분을 표현할만한 마땅한 단어가 없어서 그랬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발을 딛고 서 있는 땅이 울렁이고 숨이 가빠졌다.

이건 제 상식을 벗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분명했다. 저는 이미 해월의 열광에 함락당했다. 승부를 내건 내기는 아니지만, 연진은 자신이 졌다는 것을 알았다. 더 사색하고 아끼는 쪽이 진 것일 테니까.

해월은 연진의 팔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 품에서 슬쩍 벗어났다. 그리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한 발자국. 그들 사이의 거리였다. 서로가 너무도 잘 보이고, 서로를 알기에도 무리가 없는 거리였지만 맞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으나 그러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없는 거리.

그 거리는 해월이 벌린 것이었다. 해월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껏 봐 온바 연진은 대체로 어른스럽고 이성적이었다. 가끔은 저보다도 더 성숙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방금처럼 느닷없이 저를 껴안고 어리광을 부리듯이 구는 일은 없었다. 간혹 그와 비슷한 일은 있었어도, 그건 엄연히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안 좋은 일을 겪고 난 후도 아니었고 여러모로 뜬금없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쉽사리 결론을 내지 못했다. 혼란스럽고 복잡하기만 하다.

“…너 진짜 이상해. 나 없을 때 무슨 일 있었어?”

“없었습니다.”

답변은 짧고 간결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허무로 덮일 정도로.

연진은 오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답답한 기분에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짧은 머리칼은 손가락의 결을 따라 뒤로 넘어가다가 부스스한 형태가 되었다.

이마와 눈썹이 훤히 드러나자 인상이 강해졌다. 평소보다 냉연한 기색이 더욱 짙었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혼돈 속에서 내려진 가장 합당한 추론을, 해월이 급작스레 내뱉었다. 그 바람에 연진의 눈동자가 살짝 크기를 늘렸다.

“…둔한 건지 예리한 건지….”

연진은 혼잣말을 곱씹었다. 해월이 둔하거나 예리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 줬다면 더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뭐…?”

해월은 연진이 하는 말의 저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얘가 오늘 이상하다 싶더니 헛소리를 하는구나 싶을 뿐이었다.

피식, 작게 웃음을 지은 연진은 그대로 손을 뻗어 부스스해진 해월의 머리를 차분하게 정리해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과 비슷한 행위였다.

연진이 가까이 다가오자 늘 그에게서 나던 시원한 향이 짙어졌다. 해월은 괜히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제가 숨기는 게 있다면요.”

“…….”

“물어보시렵니까.”

장난인지 도발인지 경계가 모호한 말이었다.

“…네가 숨기는 게 있다고 해서 내가 그걸 캐물을 권리는 없어. 말하고 싶지 않다면 하지 않아도 돼.”

해월은 연진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선택할 권리는 그에게 있고 그걸 해치지 않을 거라는 뜻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연진은 해월이 스스로 선을 긋는 만큼 타인의 선도 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이내 연진의 고개가 해월에게로 기울었다. 코끝이 살짝 닿았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숨결이 얽혔다.

“술 냄새.”

나지막하게 음성이 떨어졌다. 해월은 저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 기녀들이 술을 건네줘서.”

“그걸 주는 대로 다 마셨습니까. 볼도 많이 빨간데.”

“몇 잔 안 마셨어.”

“정말요?”

“어, 정말.”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추궁당하고 변명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송 행수가 가끔 귀객에게 내어주는 방이 있어. 일단 그 방으로 가자. 아마 준비되어 있을 거야.”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 해월은 딴소리를 했다. 연진이 또 이상하게 굴까 봐 무작정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계속 잔소리하리란 예상과 달리 연진은 군말 없이 절 따라왔다.

잡은 손으로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날이 서늘해져서 이 온기가 더욱 뜨겁게 느껴지는 건가. 그리 생각하던 해월은 이내 길어지는 고민을 갈무리했다.

***

칠흑처럼 깜깜하고 어두운 밤.

화려한 치장을 모두 거둔 송수련은 야장의를 입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큰일이 없는 한 송수련은 곧장 잠이 드는 편이다. 그러나 깊게 잘 순 없었다. 그녀의 노련함이 문제였다.

오랜 시간 쌓은 관찰력과 예민함. 그 노련함은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해 주어 깊게 잘 수 없게 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티끌만큼도 눈치챌 수 없었을 테지만, 송수련은 금세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바로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걸.

“…천치야. 네가 내 방문을 부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만, 이 야밤에 여인네 방을 이리 서슴없이 찾아오면 어떡하니.”

그 말에 따라붙는 것은 고요함 뿐이었다. 가늘게 눈을 뜬 송수련은 몸을 일으켜 창가에 다가섰다.

“용무가 있으면 얼른 처리하고 가.”

그녀의 말에 바깥에 있던 해월이 창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사뿐한 걸음은 어떠한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기민한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누군가 창가에 있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해월은 느닷없이 찾아온 사람치곤 여상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달빛으로 확인한 송수련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막 나갈 땐 제대로 막 나간다니까….’

다양한 인간 군상을 겪은 송수련이지만, 해월이 가장 종잡기 어려운 인간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용무는?”

“아까 내 제자한테 무슨 얘기 했어.”

해월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싸늘하고 고압적인 어투였다. 평소 서글서글하게 웃는 낯 속 숨겨져 있던 냉연한 이면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 고작 그게 궁금해서 이 야심한 시각에 나를 찾아왔다?”

송수련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해월은 차가운 얼굴로 답을 종용했다.

“묻는 말에 답이나 해.”

“네가 내게 이렇게 찾아왔다는 건 이미 그 공자님께 물어보고 온 것이겠지?”

“…….”

연진은 묻는 말에 이상한 답을 늘어놓았다. 해월은 그 말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분명 송 행수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한데, 연진을 추궁하고 싶지 않으니 그녀에게 따져 묻는 것이었다.

“공자님께서 제대로 된 답변을 안 해 준 모양이구나.”

송 행수는 눈치가 빨랐다. 어릴 적엔 아비에게, 자라날 땐 지아비에게, 기생이 되고 난 후부터는 귀족들에게 눈치를 받으며 살았다. 그런 여인이니 기민한 것은 당연했다. 오랫동안 예민하게 살아온 인간 특유의 날카로움이었다.

하지만 그건 해월도 마찬가지였다. 작금의 상황에서 한 발 물러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송 행수. 네가 내게 무슨 짓을 하든 난 조금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 애는 건들지 마.”

“어째 부탁이 아니라 협박으로 들린다?”

“잘 알아들었네.”

해월은 본래 타협보단 협박을 좋아한다. 게다가 대상이 송 행수라면 더 거리낄 이유가 없다. 연진이 이상해진 이유를 송 행수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 우습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데… 그런 것치곤 너와 공자님 사이가 아주 좋던데?”

“무슨 소리야.”

의미심장한 송 행수의 말에 해월은 반사적으로 날을 세웠다. 그녀가 입을 열어서 딱히 좋은 이야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야밤에 서로 얼싸안고 있길래 아주 각별한 사이인 줄 알았지”

“윽, 그건….”

이 방에서 하련방의 전경이 대부분 보인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게 이리 작용할 줄은 몰랐기에 해월은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괜히 찾아왔다. 헛소리할 거라 예상은 했었지만, 이건 그 수준을 넘어 거의 망발이었다.

“하아… 네가 무슨 말을 할지 알겠으니, 그냥 하지 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다른 얘기일 수도 있잖아.”

“누굴 속이려 드냐. 이상한 소리일게 빤하구만.”

“사제지간이 좋아 보였다는 얘긴데 뭘. 네 귀엔 이게 이상하게 들리니?”

“하….”

하다 하다 연진과 저를 그런 관계로 보다니. 이건 선을 넘는 짓이다. 저는 별의별 오해를 다 받아도 상관없지만, 연진은 아니다. 귀신에 씌어서 정신이 나가 사람 구실을 못 한다는 음해 속에 살았던 연진이다.

그 애가 더는 사람들의 오해 어린 시선 속에 갇혀 사는 건 싫었다. 고작해야 송 행수 한 사람이 하는 오해라 해도 신경이 안 쓰일 리 없었다.

“너는 내가 하는 말이 죄다 헛소리로 들리니?”

“그럼 그게 헛소리가 아닌가.”

“천치. 너는 꽉 막힌 구석이 있어서 문제야. 비역질만을 위한 색주가도 널린 게 백난국인데, 남색이 뭔 대수니?”

논점을 흐리는 말이었다.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남색이고 여색이고 난 관심 없어. 그게 제자라면 더욱이 없고. 계속 헛소리할 거면 이만 갈게.”

색에 대해서 어떠한 탐욕도 없다고 할 수 있는 해월이었기에 매정한 어투는 덤이었다. 게다가 사제지간을 그런 관계로 보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명백한 해월의 적의에 송 행수는 특유의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너도 연심을 가져 봐. 그럼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질 거야.”

“그걸 해서 얻는 이득이 뭐 있어. 그리고 연심을 혼자서만 갖나.”

보통 사람의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상대하는 퇴마사임에도, 해월은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믿지 않았다. 가령 연심 같은 뜬구름 잡는 감정들. 흐릿한 기억 속에 남은 편린. 제 친부모가 짐승의 교미처럼 정사를 나누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들 사이에도 욕정에 가까운 연심이 있었을 터. 저는 그 연심의 산물이다. 때문에 해월은 그 연심에 침을 뱉었다.

해월은 들어왔던 창가에 발을 올리곤 슬쩍 뒤를 돌아 송 행수에게 경고를 전했다.

“무사들의 경계가 너무 느슨하던데. 더 기민한 자들로 바꿔.”

“이 근방에서 제일 뛰어난 녀석들로 직접 차출했으니 내 호위들은 죄가 없어. 네가 너무 날쌘 탓이지.”

송 행수의 답변에 해월은 할 말을 잃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기에 충고해 준 것이었는데, 본인이 필요 없다면야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처소로 돌아온 해월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소득 없는 대화를 위해 귀찮은 것을 무릅쓰고 간 것이 아닌데.

괜한 헛소리를 들어서 그런지 귀가 꺼림직했다. 가슴께가 묵직한 것은 덤이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한데, 뭘 놓친 건지 몰라서 더 탐탁지 않아졌다.

연진이 자고 있는 방은 사위가 고요했다.

‘계속 자고 있나 보네.’

다행이라며 안심하려던 그때, 귀신의 속삭임보다 소름 끼치는, 낮고 차가운 음성이 해월의 귀를 찔렀다.

“어딜 갔다 오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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