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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5화 (75/124)

75화

해월은 의아한 속내를 감추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송 행수가 저만큼이나 자신의 옛이야기를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다 고향 관련한 이야기는 더더욱. 남들은 하나둘쯤은 가지고 있을 고향에 대한 연민과 추억이, 저희에겐 없었다.

“또 뭐라고 했어?”

“사부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익숙한 관계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구나.”

그건 송 행수의 말이 맞는지라 해월은 선선히 답했다. 꽤나 시원스러운 태도에 연진은 당황했다.

“저는 사부께서 그분을 가까이 여기는 줄 알았습니다.”

“나와 송 행수는 그런 사이 아니야.”

해월이 대놓고 정색했다. 송 행수와 친밀해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구만리 밖에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애초에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될 수 없다. 그냥 서로 빚을 져서 서로 갚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아무리 못마땅해도 그저 넘어가는, 그 저변엔 친밀함이 아니라 태만함이 있는 것이다.

“그거 말고는 송 행수가 달리 헛소리한 거 없었어?”

해월은 걱정스러운지 재차 물었다.

“…특별히는 없었습니다.”

“정말?”

“예, 정말요.”

단호한 연진에 해월은 한결 의심을 거뒀다.

“그보다 손부터 치료받는 게 어떻겠습니까.”

“괜찮아. 이깟 생채기가 뭔 대수라고.”

연진의 표정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저 희고 고운 손에 찢긴 상처는 어울리지 않았다. 해월이 해 주었던 것처럼 자신도 치유술을 완벽히 쓸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얼핏 그 감정을 읽어 낸 해월은 괜찮다며 연진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연진은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해월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에 걱정이 묻어났다. 그 무거운 감정의 무게에 해월은 순간 손을 뒤로 뺐다.

‘아… 싫은 건 아닌데.’

혹시 연진이 오해했을까 싶어 뒤늦게 무어라 말을 보태려 했지만, 머릿속이 하얘져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연진은 그 손을 다시 잡지 않고 그저 타이르는 말을 했다.

“고운 손인데 흉이라도 지면 어찌합니까.”

“내 손이 뭐가 곱다고… 그리고 사내자식이 흉 있다고 문제 될 게 있나.”

흉이라면 이미 손 외에 다른 부위에도 많았다. 등에는 사내의 손바닥 길이만 한 자상이 네 군데, 옆구리엔 마물에게 긁힌 자국이 세 군데,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상흔들이 수두룩했다.

해월에게 이 정도 생채기는 상처 축에도 못 끼지만, 연진의 입장에선 아니었다.

“조금 더 몸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상처의 깊이가 어떠하든, 상처는 상처다. 연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처에 무딘 이 가여운 스승을 제가 돌보아 주기로.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길 바랐다.

“왜 또. 신체발부 수지부모니 뭐니 하면서 잔소리하게?”

해월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연진은 제 몸을 귀하게 여기는 편이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제 부모님이 남겨준 소중한 유산이라는 생각에.

연진의 부모는 그에게 특별히 남긴 유산이 없었다. 추억이 깃든 물건 하나조차도 강석요가 가주가 되면서 전부 치워 버리고 태워 버렸으니까. 그래서 부모가 물려준 신체가 귀할 수밖에 없었다.

해월은 제 손바닥을 펼쳐 한 번 쳐다보았다. 사내치고는 다소 작고 선이 가는 손. 오랜 시간 칼을 쥐거나 험한 일을 한 덕에 손바닥 곳곳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부드러운 손등의 피부와는 대조되는 거칠함이었다.

손은 그저 손에 불과하다. 부모님이 물려준 귀한 자산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 몸은 아낄 필요가 없다.

해월은 손을 말아쥐고 이내 팔을 내렸다.

“그래도요. 저를 봐서라도 몸을 보중하시면 안 됩니까.”

해월은 순간 말을 잃은 사람이 되었다. 연진에게서 몸을 아끼라는 말을 들은 게 처음이 아닌데, 유달리 마음에 박히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대충 웃거나 실없는 소리를 하며 넘어가려던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연진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다. 그러기 싫었다. 저를 믿고 따라주는 그가 하는 말들을 가벼이 여기고 의미를 퇴색시키는 건, 정말 싫었다.

“…그래, 알았어.”

중얼거리듯 나온 작은 대답에 연진이 크게 반색했다. 그래봤자 무표정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약한 미소였지만, 해월은 연진이 기뻐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연히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지독한 심병일지도 모르겠다.

“잘 생각했습니다.”

연진은 해월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그 바람에 순간 멈칫한 해월이 뒤늦게 역정을 냈다.

“내가 네 제자냐? 왜 머리를 쓰다듬어.”

“기특해서 쓰다듬은 겁니다.”

뻔뻔한 대꾸에 기가 찬 해월은 헛웃음을 지었다.

“제자를 들인 건지 호랑이 새끼를 들인 건지….”

자조적인 말에 연진은 살포시 웃었다.

“제자면 어떻고 호랑이면 어떻습니까. 그래도 당신이 들인 건데.”

할 말이 없어져서, 해월은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제 갈 길을 걸었다.

“같이 가요.”

뒤따라붙는 연진을 괜히 쏘아보던 해월은 이내 풀어진 웃음을 지었다. 꼭 어른이 시야에서 벗어나면 겁을 내는 아이처럼 구는 게 웃겨서 웃은 것이었다.

연진도 열여덟 살이면 성인이고, 외관만으로는 앳된 티가 그리 많이 나지 않지만. 지금 해월에겐 연진이 마냥 어리게 느껴졌다.

해월은 다치지 않은 손으로 연진의 옷소매를 붙잡은 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잘 따라와. 기방에서 미아 되기 싫으면.”

연진이 어리다는 점을 콕 집어 놀리는 말이었다. 이에 연진은 피식 웃더니 선선히 응수했다.

“누구처럼 기녀들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잘 따라가야겠습니다.”

“야, 너 맞고 싶어?”

“세상에 맞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까.”

“너 아주 까불어.”

말은 험악하게 해도 해월의 표정엔 즐거운 기색이 만연했다.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는 이 시간이 좋았다. 장난스러운 말을 꺼내면 같은 놀림 말로 대응하는 태도가, 그 태연함이 재밌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성품이라 생각했지만, 연진에겐 제법 그 나이다운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연진을 이루는 많은 것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걸 아는 사람이 저뿐이라는 특별함. 그게 좋아서 해월은 속도 없이 웃었다.

욕심이란 걸 알지만 이런 시간이 계속되길 바랐다. 죽지 않고 오랫동안 살아서 많은 것들을 보고 싶었다. 연진이 더욱 장성하는 모습도,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서예를 하는 모습도, 바다를 보는 모습도, 좋은 사람을 만나 어여쁘게 정을 나누는 모습도….

아, 그건 좀 서운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연진이 언젠가 혼인하고 싶은 처자를 데려온다면… 어쩐지 가슴이 아플 것 같다.

해월의 복잡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게 된 연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표정이 언뜻 험악했기 때문이다. 절로 눈을 피하게 될 정도로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진아.”

나지막한 부름에 연진이 살짝 바닥으로 내렸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너는 혼인할 거야?”

“…갑자기 말입니까?”

뜬금없는 것도 정도껏이어야 맞추어 줄 텐데 혼인 얘기는 너무 갑작스러웠다. 연진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자 해월이 말을 덧붙였다.

“아니 언젠가는 할 거 아니야.”

“저는 혼인 생각 없습니다.”

연진은 단칼에 답변했다.

“뭐? 정말?”

“예.”

백난국에서 혼인을 안 한다는 건 흔한 경우가 아니다. 천양지차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남녀는 혼인한다.

단순히 혼인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정말 안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연진도 그러지 않을까.

“나중에 가서 생각이 바뀔지도 몰라.”

“아뇨. 저는 혼인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어째 화가 섞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단호함이라 해월은 의아했다. 하긴, 제가 혼인을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시는 사부야말로 혼인 생각 없습니까?”

연진은 자연스레 해월의 의중을 물었다.

“나?”

해월은 푸흡 웃으면서 반문했다. 반면 연진은 한없이 진지했다.

“예, 스물다섯이면 혼인할 법한 나이잖아요.”

스물다섯이면 자식을 보고도 남는 나이다. 백난국에선 보통 스물 남짓에 혼인을 하고, 이립(而立, 서른 살)을 넘기기까지 혼인하지 않는 경우가 몹시 드물었으므로.

“나이 찼다고 다 혼인하겠냐.”

“그건 아니지만, 보통은 혼례를 치르니까요.”

“음… 나도 너처럼 혼인 생각이 없어.”

뒷짐을 진 채 두 걸음쯤 앞서 걸은 해월은 연진을 향해 휙 뒤를 돌아보았다.

“나 같은 거랑 누가 혼인해 주고 싶어 하겠어.”

달빛이 부서져 내린 해월의 얼굴에 은은한 웃음이 가득했다. 하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함이었다.

연진은 해월에게서 달을 느꼈다. 땅에서 보는 환한 달의 앞면이 아니라, 어둡고 쓸쓸한 달의 뒷면을. 그가 달의 뒷면에 기대어 사는 자로 보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그 공허함을 홀로 견디는 것처럼.

연진은 해월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도 서글퍼졌다. 해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가볍게 손을 잡거나 소매를 잡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기 위해서.

해월은 순식간에 연진의 품에 갇혔다. 크고 단단한 손이 등을 완전히 감쌌다.

“…진아?”

아무런 징조도 없이 저를 안고 어깨에 고개를 묻는 연진이 의아해서 해월은 몸을 뒤척였다. 그러나 연진은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사람처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힘을 풀라는 뜻으로 팔뚝을 툭툭 쳤는데도 연진이 힘을 풀지 않아 그저 그의 품에 파묻혀 있게 되었다.

어깨를 전부 감싸고 있는 단단한 팔이, 귓가에 흩어지는 숨결이 모두 생경했다. 왜일까. 연진과 처음 포옹하는 것도 아닌데 이전보다 더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와 하는 포옹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그 품은 여전히 견고한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래, 이것은 이상한 것이었다.

해월은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 먼 달의 나라에 떨어진 것처럼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이상했다. 이 서늘한 밤공기도, 어깨에 닿은 온기도,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의 무게도….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이 고동 소리를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인데, 왜 이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지. 가끔씩 하던 포옹과 다르지 않을 터인데, 왜 이리 절박하게 느껴지는 건지. 해월은 알지 못했다.

“너… 오늘 이상해.”

숨결처럼 흘러나온 말에 연진은 작게 웃었다. 연진의 미소에 해월은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하단 소리 듣고 웃는 사람은 이 녀석밖에 없지 않을까.

연진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운을 뗐다.

“당신도 이상해요.”

연진은 당신을 만나 저 역시 이상해졌다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건 해월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꼴이므로.

해월에게 충동을 느낀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었다. 그러니 이 충동을 없애진 못하더라도 막아야만 했다.

지금처럼 끌어당기면 그저 안기는 것. 그 이상은 아직 바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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