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해월이 종종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연진이 답했다.
“…무척 엄한 분이시란 얘길 들었습니다.”
그 말에 송 행수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엄한 정도가 아닙니다. 제가 삼세번을 살아도 그만큼 무서운 분은 다신 못 볼 것 같거든요. 내 아버지도 최악이었지만, 선 씨 아저씨 앞에서는 이름 석 자도 못 내밀어요.”
과장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제 아버지는 딸을 어떻게든 이용하려고 혈안이었다면, 선학경은 해월을 잡지 못해 안달이었달까.
그녀는 몇 번이고 아버지를 피해 달아났었는데, 해월은 그 모진 고생을 하고도 제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양아들이면서도. 그래서 해월을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대체 어느 정도로 엄하셨길래 그럽니까. 사부의 다리에 난 흉도 그 아버지란 분 때문에 생겼다던데.”
“그것까지 알아요?”
송 행수가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짐작한 것보다 더 이 사내를 특별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재밌어졌다.
“옛날에 자기 나라에서 이름을 날린 주술사였다는데, 살인귀라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답니다. 그만큼 사람 자체가 엄하고 독해요.”
그뿐이면,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
“그런 사람 손에 자라났으니 저 애 성격이 그 꼬라지인 것도 이해는 가지만.”
연진은 송 행수의 저속한 표현이 거슬렸지만, 얘기가 끊길까 봐 일단 듣고만 있었다.
“그래도 그 아저씨는 마을에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단곡 일대에서 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거든요.”
“…그렇게 인정 있으신 분이 자기 양아들을 왜 그리 모질게 대한 겁니까.”
“그것까진 몰라요. 그런 걸 서로 말할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닌지라.”
“사부께서는 당신을 꽤 친밀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요.”
적어도 연진의 생각엔 그랬다. 해월은 명백히 송 행수를 싫어하고 있었지만, 보통이라면 싫다는 감정조차 가지지 않았을 그다. 아마 나름의 의미가 있는 사람일 터. 그게 영 내키지는 않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친밀하다기보단 그저 서로에게 익숙한 겁니다. 공자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봤거든요.”
그 말에 연진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안 좋은 의미로 그런 거니까 혹시나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심하란 말에도 연진은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 볼꼴 못 볼 꼴 다 봤다고?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해월은 송 행수의 문란한 행각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이미 다 보았기 때문일까.
이내 쓸데없는 생각이란 판단이 선 연진은 속으로 탄식했다. 바보도 아니고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나 싶었다.
“오늘 여러모로 결례를 저질렀으니, 제가 내어드릴 수 있는 건 다 내어드리겠습니다. 좋은 방, 산해진미 그리고 아름다운 기녀까지요.”
그녀가 얼핏 농염한 투로 이야기하자 연진은 정색했다.
“뒤에 제안하신 것은 사양하겠습니다.”
송 행수는 아쉬운 목소리로 답했다.
“저런 안타깝네요. 사양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그 애 얘길 더 해 드릴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런 조건이 걸린다면 전 사부에게 직접 듣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연진의 완강함에 송 행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 연모는 내 몫이니 혹여 관여하시려거든 관두십시오.”
“관여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그리고 저는 공자님 편이니, 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송 행수의 말이 품고 있는 속뜻을 완전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해월에게 제 연심을 고하진 않을 거란 확신이 섰다.
“하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
해월은 오래간만에 제대로 혼란에 빠졌다. 사람을 구슬리는 게 일상인 여인들 틈바구니에 있으니 가만히 있어도 정신이 아찔해졌다. 한 잔 두 잔 건네는 술잔을 받다 보니 머릿속이 어질어질했다.
간신히 정신 줄을 부여잡고 있었는데, 또다시 기녀들에게 이끌려 어디론가 움직이게 되었다.
“…저기 낭자들,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퇴마사님도 참. 원래 술은 장소를 옮겨 가며 즐기는 겁니다.”
“언니 말이 맞아요. 장소가 달라지면 같은 술도 맛이 달라지거든요.”
“아니 내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좀 놓아달라 말하고 싶은데, 저를 반겨주는 이들을 무시할 수도 없어 끌려만 갔다.
그런 그들의 발걸음이 한 사람에 의해 멈추게 되었다. 널린 게 주색잡기에 바쁜 사내들이다 보니 개중엔 언제나 민폐를 끼치는 이가 있다. 딱 보아도 달큼하게 술에 절여져 있는 주정뱅이 하나가 해월의 옆에 있던 기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네년 하룻밤 값은 얼마나 되느냐?”
저질스러운 말에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손목을 잡힌 기녀는 이 정도 진상은 우습다는 듯 가식 어린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저는 몸을 파는 창기가 아니라 예기입니다. 제 노래와 춤을 즐기고 싶으시다면 값을 치르십시오.”
“뭐 이년아? 기생이 다 같은 기생이지 예기는 무슨… 어차피 다 노류장화 아니더냐!”
주정뱅이 사내는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패악을 부렸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하련방의 기녀들도 만만치는 않았다.
“저희 하련방의 기녀들은 몸을 팔지 않습니다. 더 이상 저희를 붙잡으신다면 무사들을 부르겠습니다.”
“뭐라? 내가 팔라면 파는 것이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이리 대하는 것이냐? 내 증조부가 말이다, 과거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셨고! 어!”
너무 뻔한 말에 해월은 하품이 나올 뻔했다. 흔한 주정뱅이 중 하나라 제가 굳이 나설 것도 없겠다 싶어, 이 틈을 타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차에 주정뱅이가 기녀의 손목을 우악스레 틀어쥐었다.
“꺄악!”
손목이 꺾이는 통증에 기녀가 비명을 질렀다. 이에 해월은 즉각적으로 사내를 기녀와 떼어냈다.
“낭자 괜찮습니까.”
“…예.”
그 기녀는 손목을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월은 험악한 눈으로 주정뱅이 사내를 노려보았다.
“뭐, 뭘 째려봐 이놈이!”
요즘 왜 이리 손목 부러지고 싶어서 안달 난 자들을 자주 마주치는지 모르겠다. 아니, 원래 넘쳐나던 무뢰배들을 한동안 보지 못했을 뿐인가.
“여인을 함부로 대하는 우를 범하셨으니 봐 드릴 이유도 없겠군요.”
“뭐? 야! 이거 놔!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모릅니다. 관심도 없고요.”
“딱 보니 천민 같은데,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해월은 주정뱅이의 막말에 그대로 손목을 꺾어 버렸다. 우두둑, 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아아악!”
사내는 죽겠다는 소리를 내며 땅을 굴렀다. 해월은 거기서 굴하지 않고 사내의 손을 밟았다.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에 사내는 울지도 못한 채 비명만 연이어 내질렀다. 그 사이 사내의 옷소매 속에서 신분 패를 꺼내 본 해월은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렸다.
“귀한 핏줄도 아니시면서 어찌 이런 짓을 하십니까. 이곳은 당신 같은 사람이 으스대라고 있는 곳이 아닙니다.”
“퇴마사님 그만하셔도 됩니다!”
기녀들의 만류에 해월은 싸늘한 얼굴로 사내의 손을 짓밟던 발을 뗐다. 그 사이 하련방 곳곳에 대기 중이던 무사가 다가와 사내를 질질 끌고 사라져주었다. 해월이 주정뱅이에게 손목을 잡혔던 기녀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더는 술자리를 가질 분위기가 아니군요. 오늘만 날인 것은 아니니 나중을 기약하도록 합시다.”
기녀들은 해월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월은 자리를 벗어나 발걸음을 움직였다. 일단 무작정 걷고는 있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원래 목적 없이 걸음 하는 게 일상이었다.
느닷없이 악재를 마주치고, 그 악재를 물리치고, 또 걷고. 그러다가 또 불행을 만나고. 그런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삶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혼자 걷는 고독감은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그도 아니었나. 자조적인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해월의 시야에 연진이 들어왔다. 저를 찾아다녔는지 조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연진의 얼굴엔 안도감이 번졌다. 해월이 가까이 다가서자 연진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대체 어디를 갔던 겁니까.”
“…나 찾아다녔어?”
“당연하죠.”
“기특하네.”
연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던 해월은 제 손을 보고 멈칫했다.
“아….”
주정뱅이의 손을 꺾으면서 힘을 좀 세게 줬는지, 일전에 찢어진 상처가 다시 벌어져 있었다. 손에 감긴 손수건 위로 다시금 붉은 핏방울이 번져 나갔다. 연진이 다급히 손수건을 풀어 상태를 살펴보았다.
“손 함부로 쓰신 거 아닙니까.”
“…아니 뭐 그리 함부로 쓴 것까진 아닌데….”
연진이 날카롭게 쳐다보자 해월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아까 기녀들한테 추근대는 놈이 있길래 조금 손봐준 것뿐이야. 별일 아니었어.”
“별일 아니긴요. 상처가 이리 벌어졌는데.”
“이런 생채기 가지고 뭘.”
“송 행수에게 부탁해서 약재를 받아야겠습니다.”
“아니 됐다니까… 야, 잠깐만.”
해월은 송 행수에게 달려가려는 연진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 보니까 너 송 행수랑 무슨 얘기 했어?”
송 행수의 평소 언행을 알기에 경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했을지 짐작이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전혀 예측되지 않았다. 연진에게 무슨 헛소리를 해댔을지 상상하니 머릿속이 아득해지지만, 일단은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별 얘기 안 했습니다.”
“별 얘기 안 했기는, 누가 봐도 별 얘기한 표정인데.”
연진은 태연한 모습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필 이럴 때 날카로워지는 해월의 촉이 원망스러웠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무마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건 그저 말을 숨기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약간의 진실을 내어주고,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잠시 감추는 것뿐.
“그… 사부의 아버님 이야길 했습니다.”
“송 행수가 우리 아버지 얘기를?”
“예. 그분께서 보시기에도 엄한 아버지셨다고….”
“송 행수가 그 얘기를 할 리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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