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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3화 (73/124)

73화

송 행수가 흰 너울이 달린 전모를 쓴 채, 우아하게 주름진 치마를 찰랑이며 다가왔다. 그리고 연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니 그렇습니까, 공자님?”

“내게 말입니까…?”

송 행수가 제게 할 말이라니. 암만 생각해 보아도 뜬금없는 것이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에 이렇다 할 얘기도 나누지 않았고, 서로 별 관심 없는 것으로 판단했는데. 잘못 생각한 것이었나.

“예, 공자님께요.”

“애한테 뭔 짓 하려고.”

해월은 본능적으로 연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천치야. 너 하나로 저 풍채 좋은 공자님이 가려진다고 생각하는 거니?”

“죽고 싶다는 말을 그런 식으로 하는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쳐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송 행수는 그저 우아하게 웃을 뿐이었다. 해월은 싸늘한 얼굴로 연진의 옷자락을 잡고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목적지는 불분명했지만 대충 송 행수가 손님들에게 내어주는 방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송 행수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잠깐이면 돼.”

“무슨 잠깐.”

“공자님이랑 할 얘기 있다니까.”

해월은 송 행수의 갑작스러운 억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송 행수랑 할 얘기 있냐?”

“예?”

“할 얘기 있습니다. 그죠, 공자님?”

연진이 당황스러울 것은 생각하지 않는 두 남녀의 행각에 그 자리에 있던 기녀까지 덩달아 당황했다. 하지만 이곳은 하련방이었다. 간단히 말해 송 행수의 본진이라는 말이다.

“퇴마사님!”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십여 명은 되는 기녀들이 해월을 둘러싸며 반가워했다. 연진과 떨어져 여인들 사이에 갇힌 해월은 얼떨떨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기녀들이 그저 반가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고, 거의 납치하는 수준으로 해월을 이끌기 시작했다.

“오셨으면 오셨다고 말씀을 하셨어야죠!”

“어째 퇴마사님 미색은 몇 년이 지나도 그대로네요. 저희 기생들 다 기죽겠습니다.”

“오래간만에 오셨는데 오늘은 저희와 함께 놀아요!”

“아, 아니 저기…!”

기녀답게 구슬리는 재주가 뛰어난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이미 해월이 자신들을 적극적으로 뿌리치는 성정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해월이 뭐라 답하거나 거부하기도 전에 밀어붙여 버렸다.

누가 보면 엄청난 정을 나눈 지기들인 줄 알겠지만, 사실 해월은 과거 하련방에 며칠 머물지도 않았다. 그러나 기녀들은 해월에게 받은 도움이 있었기에 다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따로 송 행수에게 해월을 데리고 가 달라 언질까지 받은 상태였다.

해월은 끌려가는 중간중간 연진 쪽으로 고개를 돌려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송 행수가 대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연진은 멀어져 가는 해월을 쫓아가려 했지만, 이 역시 송 행수의 무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연진이 송 행수를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사부를 돌려주세요.”

“돌려달라니, 누가 보면 물건 뺏은 줄 알겠습니다.”

누가 보아도 엉겁결에 끌려가 버린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주 태평했다.

“…억지로 데려간 건 맞잖습니까. 누굴 놀리는 겁니까.”

“호호, 농입니다. 공자님 말씀이 맞아요.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천치는 노인, 여인, 아이 이 셋한테 약하거든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을 텐데도 저렇게 가 버렸잖아요.”

연진은 그 순간 직감적으로 느꼈다. 자신보다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해월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어쩐지 기분이 확 나빠져 주먹을 말아쥐고 휙 돌아섰다.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는 모르겠으나, 사부가 가신 곳을 말씀해 주십시오. 혼자서라도 찾아가겠습니다.”

“송구스럽지만, 공자님께 볼 일이 있다는 건 농이 아닙니다.”

“무슨 볼일이시기에 이리 막무가내로 행동하시는 겁니까.”

“은밀하게 대화를 해야 해서요.”

송 행수는 연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접촉이라 거슬려 할 틈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송 행수에게서 우아한 향내가 났다. 연진에겐 조금 독한 향이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정말 잠깐이면 된답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대화가 끝나면 곧장 천치에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연진을 방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송수련은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몇 해 만에 다시 만난 해월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귀족 제자를 데려온 것을 제외하면.

해서, 송수련은 진작 눈치챘다. 연진과 해월이 어떤 관계인지. 절대 단순한 사제지간은 아닐 것이다. 간만에 호기심이 일었다.

“드세요. 먼 지방에서 들인 차인데 향이 아주 좋답니다.”

송수련은 손끝으로 찻잔을 살짝 밀었다. 연진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가만히 두었다.

“하실 말씀부터 먼저 하십시오. 차는 그 후에 마시겠습니다.”

그 말에 송수련이 미소를 지었다. 경국지색이라 불리는 그녀의 미소에도 연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송수련은 그런 연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흔하지 않은 사내란 건 진즉에 알았다만, 어지간히 무딘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면 각설하고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리하시지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송수련은 날 것 그대로의 문장을 내뱉었다.

“선해월을 마음에 품으셨습니까.”

여느 때처럼 놀림 말로 부르지 않고, 선해월이란 이름 그대로를 입에 담는 송수련의 얼굴에 이전의 가벼움은 없었다.

연진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말아쥐었다. 백난국에선 남색이 흔한지라, 이렇다 할 흠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사제 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스승과 제자라는, 가장 신성시되어야 할 관계에서 연심이란 부덕한 것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한 뜨거운 무언가를 식혀 내질 못해서 지금 이 사달을 낸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송 행수가 눈치챌 정도로, 제가 허술했던가? 해월을 연모하는 티가 그리도 많이 났던가?

머릿속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해 보았지만 하면 할수록 미궁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송 행수의 저의를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제가 걱정하는 짓은 하지 않으리란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어쩌시렵니까.”

“…생각보다 시원스레 인정하시니 제 쪽이 더 당황스럽네요.”

송 행수는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감추려 거짓으로 둘러대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의 반응이어서였다.

“오늘 보니 천치 목 근처에 자국이 있더군요. 암만 봐도 긁거나 벌레에 물린 것은 아닌 듯 보이고… 또 제가 그런 자국엔 일가견이 있는지라 잠깐만 보아도 알 수 있답니다.”

해월이 고개를 돌리거나 움직일 때 옷깃 안쪽 부근이 조금씩 보였다. 흰 살결 위의 붉은 자국은 그녀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분명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남겨 놓은 흔적. 해월의 성격에 방심하지 않고서야 그런 걸 가만히 둘 리 없으므로, 가장 가깝고 신뢰하는 대상이 그리했으리란 추측이었다.

연진이 해월을 보는 눈은 경외하는 스승을 바라보는 눈이 아니라, 봄처럼 따뜻하고 여름처럼 뜨거운 것이었다. 흘러넘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해서 겉으로 드러내고야 마는, 그런 서글픔.

반면 해월은 연진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지만, 연진과 같은 따뜻함도 뜨거움도 아니었다. 그러나 공허를 품은 자의 눈을 그리 바꿔놓은 것만으로도 의미는 컸다.

“저는 그저 공자님의 외사랑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천치는 그런 쪽 눈치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거든요.”

측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송수련은 속으론 즐거움에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살다 살다 해월에게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던 터라 더욱 재밌었다.

처음엔 서로 합의하에 남긴 자국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는데, 그렇다기엔 해월은 너무나 경각심이 없었다. 그래서 연진의 외사랑이리라 확신했다.

“제 말이 틀렸나요?”

“…맞습니다.”

연진은 짧게 답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송 행수의 말이 맞았다. 제가 보기에도 해월은 그런 쪽 눈치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산속에 숨은 도적의 움직임도 눈치챌 만큼 기민한 사람이, 곁에 있는 제자의 마음 하나는 몰라주었다. 그게 야속하지만 별수 있나, 그럼에도 좋은 것을.

송 행수는 제 예상을 뛰어넘는 여인이었다. 괜히 이른 나이에 행수가 된 것이 아닌지 눈치와 셈이 빨랐다.

연진의 희미한 경외감과 적대감을 읽은 송수련은 피식 웃었다. 차갑고 냉정한 사내가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 해월과 관련된 일일 때라서.

“어차피 천치한테 물어봤자 무시당할 것 같아 묻는 것입니다만, 두 사람은 어찌 만나게 되었습니까.”

“사부께서 의뢰를 처리하기 위해 내가 살던 지역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사제지간이 되었습니다.”

“우여곡절이라… 너무 간단히 말하는 것 아닌가요?”

“송구합니다만 전부를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저와 그 사람의 이야기를 타자에게 알려준다면, 그 특별함이 쇠할 것만 같아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누군가 자세히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은연중에 녹아 있는 그의 바람을 알아챈 송 행수는 슬며시 웃어 보였다.

“천치에겐 비밀로 하실 건가요?”

“아직은… 그리할 겁니다.”

“공자님이라면 주변에 다른 근사한 사람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천치입니까?”

연진의 우직함이 안타까워 걱정스레 물었다. 해월은 나쁜 녀석이 아니지만, 연모할만한 이는 못 되었다. 그의 과거를 알기에 더욱이 그렇게 여겨졌다.

“내게 그리 다가온 사람은 그분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렇습니다.”

“공자님의 마음이 그러하시다니, 제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겠군요.”

송 행수는 몸을 일으켜 창가 쪽에 다가갔다.

“이리 와 보세요.”

송 행수의 말에 연진은 탐탁지 않은 기색을 지우지 않고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든지 말든지, 송 행수는 자기 하고픈 말만 했다.

“저는 이곳을 가장 좋아합니다. 하련방의 전경이 다 보이거든요.”

송 행수는 우아하게 웃으며 벽창을 열었다. 송 행수의 말대로 하련방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여기저기 놀음하며 즐거워하는 얼굴들, 사내들의 호탕한 웃음소리, 기녀들의 맑은 노랫소리, 가지각색의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시야가 어지럽기도 했다. 연진은 그 안에서 어렵지 않게 해월을 발견했다. 그 시선을 따라간 송 행수는 그럼 그렇지 하고 웃었다.

해월은 기녀들에게 이끌려 다니며 진땀을 빼고 있었다. 연진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어떨 때는 냉정하게 굴면서, 저럴 때는 무르게 행동하는 모습이 모순적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를 이루는 특별함이라는 걸 알았다.

이제 헷갈리지 않는다. 이 마음은 연심이고, 평생토록 가져가야 할 연모임을. 이렇게 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보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제가 지금 하고 있다는 게 우스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마음에 품었으니까.

연진의 표정에 있는 감정을 대강 읽어낸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싶죠? 봐도 봐도 적응 안 되고.”

연진의 얼굴에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이 적혀 있었다. 송 행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고는 시선을 해월 쪽으로 보냈다.

“쟤는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사람 앞에서는 저런 천치가 돼요. 그렇지 않을 때는 상상 이상으로 냉정하게 굴지만.”

“천치….”

연진은 송 행수의 표현을 곱씹었다. 그도 해월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강석철이 제게 패악을 부렸을 때, 남의 일에 굳이 나서서 책임을 지는 해월이 바보 같다고 여겼었다. 그 어리석은 행동이 자신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는 사람 앞에서 나온다니. 듣고 보니 꽤나 타당한 의견이다.

“저 천치가 본인이 원해서 누군가를 데려온 건 처음입니다. 저 녀석한테도 공자님은 특별할 거예요.”

“그건 압니다.”

모를 리 없다. 저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해월이 남들에게 쉬이 드러내지 않는 모습을 저는 알고 있다. 그것만 해도 설명은 충분하다.

“하면 혹 천치 아버지에 대해서 들어본 적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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