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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2화 (72/124)
  • 72화

    해월은 줄곧 멍한 상태였다. 왜냐하면 솔직히 송 행수에게 말려들었다는 생각을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해월이 송 행수의 막무가내식 부름에 나름대로 순순히 응한 것은 몇 없는 연들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테니까. 어디까지나 예의상의 일이었다. 겸사겸사 혹시 음기가 쌓였다거나 귀물이 날뛴다거나 하면 그것도 정리해 주고, 그것으로 송 행수와의 연을 갈음할 작정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다.

    저를 부려 먹는 데 익숙한 송 행수니까 당연히 용건만 해결하려 할 줄 알았는데 그녀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풍등제 할 때까지만 머무르도록 해.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 터이니 오늘은 여독이나 풀어.’

    풍등제라니. 한시가 아까운 상황에 풍등제가 열릴 때까지 하련방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솔직히 하련방에 온 것조차 불만스럽다. 여기서 수일을 더 머무는 것은 탐탁지 않아 곧장 거절했는데,

    ‘천치야.’

    그 짤막한 말과 함께 제 눈을 응시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눈엔 ‘내 말을 따라야지.’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 있었다. 송 행수는 사람을 다루는 데 능해서 문제였다. 거기에 놀아나는 자신도 어지간히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한 약조는 지킨다는 그 빌어먹을 신념 때문에.

    “…당했어.”

    중얼거리는 말에 자조가 섞여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해월은 송 행수한테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득실보다는 송 행수의 명령과 같은 부탁을 먼저 생각해야 했다.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그리해야만 한다. 송 행수에겐 빚이 있으니까.

    해월과 달리 연진은 느긋했다.

    “그래도 듣던 것보다는 좋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송 행수가…? 너 사람 보는 눈 너무 없는 거 아니야?”

    송 행수가 좋은 사람이라니. 이건 착각을 넘어 어딘가 모자란 판단이었다.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으면 당신을 사부로 모셨겠습니까.”

    “바보야, 그러니까 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

    해월은 진심으로 연진이 걱정스러웠다. 저러다 나중에 협잡꾼한테 속아 넘어가면 어떡하지? 사기를 당하는 것은 지혜와는 별개의 영역이었다. 아무리 연진이 똑똑해도 충분히 당할 수도 있는 것이란 말이다.

    정말 걱정스러워서 편히 눈을 못 감을 지경이었다. 그런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엉뚱한 의문에 도달해 버렸다.

    “혹시 너도 송 행수한테 반한 거야?”

    “예…?”

    연진은 사람이 너무 황당하면 말도 안 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저더러 송 행수한테 반한 거냐고 물은 건가? 송 행수가 해월을 천치라고 불렀던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월과 연진은 서로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이 사람… 진짜 어디 모자란 건가?’

    연진은 안타까워했고,

    ‘얘는 나중에 어쩌려나 몰라.’

    해월은 혀를 찼다.

    “혈기 왕성한 건 알겠다만, 그래도 좀 고운 미색이라고 다 마음 주면 안 돼. 특히 송 행수는 진짜 위험한 여인이라고.”

    해월은 연진이 송 행수를 마음에 품었다는 걸 거의 사실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연진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내가 누굴 좋아하는 줄 알고.’

    “미색이 출중하다 하여 다 마음을 주겠습니까. 그리고 고운 것으로 따지면 더 고운 사람도 봤는데요.”

    “더 고운 사람? 누구?”

    팔짱을 낀 채 훈계를 하려던 해월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더 고운 사람을 봤다고?’

    송 행수는 제가 본 여인 중 가장 봐줄 만한 미색을 갖춘 터라, 그 이상으로 고운 사람은 상상이 잘 안 되었다. 골몰하는 해월을 잠시 보던 연진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밀입니다.”

    “아, 뭐야 나도 알려줘.”

    “알려드리면, 그게 비밀입니까.”

    “치사해 너.”

    해월이 입술을 삐쭉였다.

    연진은 그런 해월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는 사부야말로 송 행수께 달리 마음 품은 적 없습니까?”

    “뭐? 미쳤냐? 내가 송 행수한테?”

    즉각적인 거부 반응이었다. 그 감정은 황당을 넘어 흡사 분노에 가까웠다. 한 번만 해도 될 반문을 세 번씩이나 함으로써 해월이 얼마나 송 행수를 마뜩잖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야, 너 송 행수가 몇 살인 지는 알아?”

    “모릅니다.”

    “송 행수는!”

    뭐라 쏘아붙이려던 해월은 할 말을 잃었다. 저 역시 송 행수가 몇 살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흠, 암튼 적어도 나보다 열 살은 많아.”

    “…연심에 나이가 뭐 중요하겠습니까.”

    연진은 괜히 울컥하여 되물었다.

    “나는 송 행수 싫어하거든? 나이랑은 별개라고.”

    질색하는 해월을 유심히 보던 연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싫은 티를 내시면서도 결국 송 행수가 하자는 대로 하시고 있잖아요.”

    해월이 송 행수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건 연진도 진작 알았다. 그러나 의문인 것이 있다. 제가 보기에 해월은 분명히 송 행수를 무르게 대하고 있었다. 날 선 말을 하고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는 것과 다르게.

    선을 긋는 행동에 능숙한 해월의 무른 행동. 저만이 알고 있다 생각한 모습을 남에게도 보이다니, 어쩐지 속이 아픈 기분이었지만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내가… 송 행수한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래.”

    “잘못이요?”

    “그런 게 있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여실히 드러내는 어투였다. 연진은 그런 해월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제 호기심보다는 그의 감정이 더 중요하니까.

    “한데, 기방에 들어올 적에 만났던 그 기녀 말입니다.”

    “그 낭자? 왜, 혹시 송 행수가 아니라 그쪽이었냐?”

    가벼운 농에 연진은 험상궂은 시선으로 답했다. 안 그래도 서늘한 눈매인데다 차가운 눈빛을 하고 있으니 한기가 배로 감도는 느낌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눈으로 욕하지 마.”

    귀신이나 요괴의 괴기스러운 눈을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무서울 지경이었다.

    “…여하튼 그 기녀와는 어찌 알게 된 사이입니까.”

    “음, 자세히는 기억 안 나는데…. 예전에 그 낭자가 기적에 이름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송 행수한테 엄청나게 혼나서 울고 있길래 말 몇 마디 해 줬어. 그게 다야.”

    연진은 생각보다 싱거운 이야기에 맥이 풀리면서도, 안도감을 느꼈다. 새삼스럽지만, 해월이 타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아무런 감정 없는 친절이 그 타인에게 어떤 기억을 심어 줄지도 딱히 자각이 없어 보였다.

    타고난 다정함도 아니다. 강박적인 선의, 그에 지나지 않았다.

    해월은 무의식적으로 연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진은 선뜻 제 손을 얹었다. 그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래도 기방에 왔는데 구경이나 시켜 줄게. 나도 몇 년 만에 와서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하고 싶어.”

    해월은 연진의 손을 잡고 무작정 이끌기 시작했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하련방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규모가 더욱 커져 있었다.

    밤이 깊어지니 여기저기서 가락 소리가 들려오고,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 사이엔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섞여 있었다. 해월은 하련방의 이곳저곳을  연진에게 소개해 주었다.

    연진은 해월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이끄는 대로 이끌리며 이야기를 들었다. 크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옛일을 추억하는 듯 즐거운 얼굴이 된 해월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시큰해졌다.

    “사람들 진짜 많지? 어째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아.”

    “축일이 오면 더욱 많아지겠군요.”

    “그렇겠지.”

    사치스러운 생활과 거리가 먼 해월은 ‘가짜’를 사기 위해 하련방에 몰려드는 사내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저 아름다운 가무와 여인들의 미모를 보기 위함이라면 뭐라 할 말은 없다만, 굳이 사내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고 추근대는 짓은 특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방 여인들의 웃음과 노래는 허공에 쉬이 흩어질 것이요, 춤사위는 빠르게 사라질 것이요, 시와 서화는 한낱 유흥거리가 되어 노리개와 같이 취급당할 것이다.

    많은 기녀가 기적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어떤 고생을 치르는지 안다. 그렇기에 해월은 기녀를 꽃으로 생각하되, 진흙을 뚫고 피어난 꽃으로 여겼다.

    아무나 흔히 꺾을 수 있는 길가의 꽃이 아니라,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고.

    그렇기에 거짓이 난무하는 이곳에서, 화려함 뒤의 공허를 느끼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저, 사부… 아픕니다.”

    “아, 미안.”

    해월은 즉시 힘을 풀어 연진의 손에 감겨 있던 제 손을 빼냈다. 그러자 연진이 다시 해월의 손을 붙들었다.

    “빼라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연진은 잡은 손을 들어 올려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그래.”

    별수 없었다.

    언젠가 연진이 텅 빈 손을 하고 걸을 때 공허를 느낀다 했고, 저는 그 공허를 채워 주고 싶었다. 텅 비어 버린 감정을 고작 이런 것으로 채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연진이 이것으로 되었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때 둘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 끼어들어 왔다.

    “퇴마사님? 오랜만에 보네요.”

    “낭자?”

    또 다른 기녀였다. 그녀의 이름 역시 잘 기억나지 않아 대충 낭자로 칭했다. 해월은 순식간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아, 이쪽은 내 제자입니다.”

    연진은 기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연진이 이렇다 할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탓에 그녀는 자연스레 연진 또한 해월과 비슷한, 그리고 자신과도 비슷한 신분을 가진 자라고 생각했다.

    “그럼 이분도 퇴마사님이라 부르면 되나요?”

    “퇴마사라기엔 아직 수행이 부족합니다. 그냥 편할 대로 부르십시오.”

    “흠… 하면, 오라버니?”

    기녀의 눈이 어여쁘게 휘었다. 교태를 부리는 것이었다. 정말 유혹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장난으로.

    연진은 당혹감에 그건 안 된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끼어드는 음성이 들렸다.

    “그건 안 된다. 그 오라버니는 나와 할 말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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