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송 행수는 하련방에서 가장 높이 있는 건물에 거처하고 있다. 기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였고, 그녀가 사람 구경을 즐기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행히 가는 길에 아는 얼굴들이 속속 보여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나름대로 반가운 얼굴들도 있어서 기분이 한결 나아지려 했지만, 막상 송 행수를 볼 생각을 하니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이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더욱 탐탁지 않은 기분이었다.
흘끔, 해월은 연진을 쳐다보았다.
‘왜 저런 표정이래…?’
송 행수를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연진은 몹시 냉랭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 일단 나 먼저 들어가 볼게.”
“아뇨, 같이 들어가요.”
단호한 거부였다. 해월의 얼굴에 낭패감이 일었다.
“내가 일전에 얘기했었지? 송 행수가 좀 자유로운 기질이 있어서….”
그는 송 행수가 문란하단 이야기를 돌려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좀 전의 일로 불쾌감을 느끼고 있는 연진은 그 말의 본의를 눈치채지 못했다. 해월에게 친밀하게 아는 체를 하던 기녀. 그런 기녀를 반갑게 맞이하던 해월. 그 둘의 모습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같이 가요.”
두 번째 단호한 답이었다.
“…그래, 그럼.”
이쯤 되니 더는 말릴 수 없었다. 긴 회랑을 걸으며 해월은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보기엔 좀 거북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소리 지르진 말고.”
“예…?”
조금 이성이 돌아온 연진은 뒤늦게 의아함을 느꼈다. 대체 뭐길래 해월이 저리 걱정하는 걸까. 그리고 그러한 의문은 송 행수의 방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풀려 나갔다.
방 안에서 차마 말할 수 없이 민망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땀 냄새와 술 냄새가 섞인 진득한 향까지 느껴졌다. 이 냄새의 근원이 무엇인지 생각하던 연진은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괜히 귀 끝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런 적나라한 순간을 마주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연진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해월은 눈가를 손으로 짚고 깊게 한숨 쉬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송 행수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내 중 적당한 이를 골라, 대낮에도 굴하지 않고 이런 짓거리를 하곤 했다. 그렇게 적당히 재미 본 사내들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기행도 벌였다. 덕분에 송 행수의 미색에 대한 소문은 더 널리 퍼졌다.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서 제대로 목격한 이들은 몇 되지 않는 데다, 재미 봤던 사내들 대부분은 두 번 다시 하련방에 얼씬도 못 하게 했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를 추억하며 송 행수의 실물을 보았노라고 떠들어대는 것뿐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혹자는 송 행수가 사람을 홀리는 여우귀신이라 말하기도 했다. 해월도 어느 정도 그 주장에 동의했다. 여우귀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을 홀리는 것을 즐기니까.
이런 건 연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는데…. 본인이 같이 가자고 해서 오긴 왔다만 꽤나 민망했다.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었다. 송 행수라면 분명 제가 올 것을 알고도 저러는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재미 좀 보고 있는 모양인데 그리 두기엔 억울하지.
쾅!
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부서져 내렸다.
문이 무너지자마자 보이는 것은 생각보다 더 난잡하게 얽혀 있는 남녀의 모습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내의는 벗기 전이라는 것이다.
난잡한 현장을 슬쩍 본 해월은 싸늘한 얼굴로 손을 뻗어 연진의 눈을 가렸다. 소리를 들은 것도 싫은데 눈까지 더럽히고 싶진 않았다.
“오랜만에 보네, 송 행수. 난잡한 짓거리도 여전하고.”
“너야말로 은근히 과격한 성격이 여전하구나.”
서로를 조롱하는 말이 따뜻한 어투로 오갔다. 해월이 친절을 베푸는 대상에 송 행수와 같은 여인은 해당되지 않기에, 해월은 그 어느 때보다 냉랭한 모습을 보였다.
해월이 연진의 눈을 가린 손을 떼지 않은 채 왼손으로 허리춤에 있던 부채를 빼 들었다.
여차하면, 다 날려 버리려고.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송 행수와 한바탕하던 사내가 옷고름을 추스르며 질겁했다.
“이 무례한 불청객을 보았나!”
술이 들어간 모양인지 발음이 좋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귀족인 듯했다. 어쨌거나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것에 화가 난 모양이었다. 사내에겐 딱히 죄가 없지만 지금 꽤 열받은 상태인지라 배려해 줄 수가 없었다.
“불청객 아니고 엄연히 ‘초대’ 받은 손님입니다. 그리고 선약은 제가 먼저 잡았습니다. 보아하니 송 행수 하룻낮 장난거리인 듯한데, 송구하지만 오수에 드시는 게 좋겠군요.”
해월이 부채를 펼쳐 작은 기공파를 날렸다. 성인 남성의 주먹질과 맞먹는 힘의 기공파가 그대로 사내의 머리를 가격했다.
“대관절 무슨… 억!”
짧은 비명과 함께 사내의 몸이 턱하고 엎어졌다. 내부가 소란스러운 탓에, 무사들이 들어왔다. 송 행수가 피식 웃고는 치우라는 듯 손짓하자 그들은 쓰러진 사내를 들쳐메고 밖으로 나갔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충 옷을 다시 갖추어 입은 송 행수는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간만에 재미 좀 보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미남자를 건졌나 했더니만,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해월 때문에 전희가 끊겨 맥이 빠졌다.
“엄한 사내들 울리고 다니면서 재미는 무슨 재미.”
해월이 혀를 차며 말했다. 송 행수의 행실에 대해 굳이 지적하고픈 마음은 없었지만, 불미스러운 기분을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어찌 대낮부터 이런 짓을 하나. 짐승도 아니고. 해월은 속으로 탄식했다.
“먼저 다가오기에 막지 않은 것이고, 이제 간다기에 막지 않은 것이지.”
송 행수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일단 그녀는 다가오는 이들을 전부 받아 주지 않았다. 나름대로 선별하여 취향에 맞는 미남자를 들였지. 그리고 간다는 이를 막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고 싶지 않다는 이를 억지로 가게 만들고 다시는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또 그 소리.”
해월은 이제 질린다는 듯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송 행수의 말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그래도 완벽히 이해해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몸뿐이든 마음이 섞여 있든, 사랑놀음은 의미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이제 괜찮은 것 아닙니까…?”
연진이 제 눈을 가린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저 여인이랑 눈 마주치지 마. 부정 타.”
해월이 천천히 손을 내리며 말했다. 그 명에 연진은 눈동자를 아래로 깔았다.
송 행수는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얘, 내가 무슨 악귀라도 되니?”
그녀는 조금 전까지 사내와 뒹굴려고 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고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옷, 화려한 머리, 화려한 장신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한 여인이었다. 그게 부담스럽게 느껴질 만한데도 꼭 처음부터 꽃에 둘러싸인 채 태어난 여인 마냥 잘 어울렸다.
“오랜만이야. 한 삼 년 만이던가? 건강해 보여 좋네. 그 곱상한 얼굴도 그대로고.”
물론 해월은 송 행수의 미색에 하등 관심이 없었다.
“네 얼굴에선 세월 흔적이 보이네. 설부화용이란 명성에 금이 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야.”
“…너 죽고 싶어?”
입꼬리만 올려 웃는 송 행수에게 해월은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화답해 주었다.
“죽여 봐. 할 수 있다면.”
살벌하게 날이 선 대화를 잠시 듣던 연진이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친우이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단칼에 부정이 돌아왔다. 두 사람 모두 아주 혐오스럽다는 얼굴이었다. 와중에 송 행수는 연진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한데, 이 잘생긴 공자님은 누구셔?”
“내 제자야. 우리랑 다른 귀족이니까 말 가려 해.”
“제자? 네가 제자를 뒀다고?”
송 행수는 연진이 귀족이라는 말보다 해월의 제자라는 말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를 보았다.
눈을 깜빡이고 비벼 가며 봐도 환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 본 게 아니고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가 없다. 해월은 누군가와 연을 잇는 것 자체를 기피하니 진짜 제자를 뒀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주는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해월이 짜증 섞인 어투로 말했다.
“환영 아니거든. 내가 너 하나 놀리려고 환술까지 쓸 사람으로 보여?”
“그럼 저분이 진짜란 말이야?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겠네.”
송 행수는 신기한 걸 다 본다는 듯 웃다가 잠시 멈칫했다.
“어머, 제가 귀공자께 결례를 범했군요.”
“…출가하였으니 더 이상은 귀족이 아닙니다. 말씀 편히 하….”
해월이 무감한 눈을 한 채 연진의 입을 막았다. 그 바람에 연진의 말이 뚝 끊겼다.
“그런 손해 보는 말 하지 마. 특히 송 행수 앞에서.”
엄하게 느껴지는 말과 함께 연진의 입을 막았던 해월의 손이 떨어졌다.
송 행수는 그 광경을 보며 우아하게 입매를 늘렸다. 오자마자 이렇게 재밌는 광경을 보여 줄 줄 몰랐던 탓이다.
“재밌네. 우리 꼬맹이가 귀공자 제자를 다 데려오고.”
귀족 자제를 제자로 삼다니. 해월은 역시 특이한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냐며 비웃었겠지만, 해월이 그랬다고 하니 납득이 가능했다.
게다가 그녀의 감으로 연진은 대충 봐도 고귀한 신분이었다. 그녀가 보아 온 귀족들만 수백 명에 달할 것이다. 연진이 진짜 귀족이라는 것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한편 꼬맹이란 말에 해월의 머릿속 무언가가 빠직하고 빠개졌다.
“내가 한 번만 더 꼬맹이라고 부르면 죽여….”
송 행수에게 한발 다가가며 또다시 날 선 말을 하려던 해월의 발걸음과 입이 연진에 의해 막혔다. 해월은 도끼눈을 한 채 저를 막고 있는 연진을 째려보았다.
“진정하세요, 사부.”
“…….”
“일단 참으십시오.”
가까스로 해월을 진정시킨 연진은 그를 이끌고 송 행수 앞에 나란히 앉았다. 해월은 당장이라도 송 행수를 칠 것처럼 노려보았다. 송 행수는 여유롭게 웃으며 빈정거리는 소리를 해댔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그대로네. 어쩜 넌 늙지를 않는다, 꼬맹아.”
“내가 꼬맹이라고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해월이 낮게 으르렁거려도 송 행수는 우훗 하고 웃을 뿐이었다. 평소엔 얌전히 굴다가도 꼬맹이란 소리만 들으면 호전적으로 행동하니 우습지 않을 리가.
“그런데 우리 천치의 제자분 성함은 어찌 되십니까?”
연진은 해월을 대놓고 천치라고 부르는 송 행수의 언행이 살짝 거슬렸지만, 그런대로 답을 했다.
“… 강가 연진입니다.”
“하면 강 공자님이라 부르면 되겠군요. 공자님의 신수가 아주 훤하셔서 이 송수련 꽤나 놀랐답니다.”
“감사합니다.”
의례적이지만 나름의 진심이 오간 대화였다. 해월은 묘하게 훈훈해진 공기가 못마땅했다. 대체 언제부터 송 행수를 봤다고 저리 부드럽게 대화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용건이나 말해, 송 행수.”
“왜 이리 급해? 느긋하게 가면 어디가 덧나니?”
“누가 과격하게 부르길래 그런 줄 알았지. 영석은 왜 부쉈어?”
“안 부수면 영영 안 올 것 같아서 부쉈는데 생각보다 많이 아팠나 보네.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오고.”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말에 해월은 이마를 짚었다. 송 행수와 얘기하다 보면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그거 함부로 부수지 말라고 했잖아. 돌려받는 쪽은 생각도 안 하지?”
“안 부쉈음, 반쪽짜리 영력으로 계속 살 생각이었어? 우리 천치 생각보다 막무가내네.”
해월은 다시는 저를 찾지 말라는 뜻에서 많은 영력이 필요한 영석을 만들어 준 것이겠지만, 송 행수는 처음부터 이리할 생각이었다.
저 바보 천치 같은 꼬맹이에게 의탁하고 싶지 않아서, 그 꼬맹이의 어깨 위에 있는 짐을 조금은 덜어 주고 싶어서. 타인의 호의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해월에겐 어차피 신임받을 수 없는 행동이었겠지만 말이다.
“반쪽이어도 충분했어. 우습게 보지 마, 송 행수.”
돌려받을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단 말이다. 송 행수는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는 그저 흥미로운 눈길로 연진을 쳐다보았다.
농염한 시선에 연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해월이 했던 말을 떠올린 것이다.
‘송 행수는 미남자를 좋아하거든. 매일 그녀의 침실에서 젊은 사내들이….’
연진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 연진과 눈이 마주친 송 행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안 잡아먹어요, 공자님.”
뜨끔한 연진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쳐다보지 말라고 했지. 부정 탄다고.”
해월이 대놓고 날을 세웠다.
“내가 설마 우리 천치 제자분까지 건드릴까. 하물며 귀한 공자님이신데.”
“아니. 그냥 쳐다보지를 마.”
“괜찮… 아닙니다.”
연진은 저를 째려보는 해월 탓에 금방 꼬리를 내렸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미소 짓고 있던 송 행수는 천으로 감겨 있는 해월의 손을 보고 잠시 눈 크기를 키웠다.
“…너 또 다쳤니?”
해월은 원래 제 몸을 아끼는 인간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주변의 걱정을 산다. 정작 본인은 그런 것을 싫어했기에 그녀는 굳이 걱정을 내색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그렇지 늘 상처를 달고 사는 해월이 어이가 없었다.
역시나 해월이 손을 뒤로 빼며 여상한 투로 말했다.
“그냥 조금.”
“허, 안 바뀐 건 외양만이 아니구나.”
송 행수는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세월을 비껴간 것만 같은 앳된 외모만큼이나 성격도 그대로였다. 다정하거나, 냉정하거나. 중간이 없는 그 바보 천치 같은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기왕 오랜만에 본 거 한 번 놀려 줄까.
송 행수의 입매가 교활하게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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