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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70화 (70/124)

70화

굳이 그런 경고를 하지 않아도 조용히 살 예정이었는데, 아까운 생명만 꺼지게 된 것이다.

덕분에 연진은 저 천한 신분의 사내와 귀족인 자신의 목숨값이 똑같다고 여기게 되었다.

본래도 그랬지만, 신분 귀천을 더욱 따지지 않게 된 것은 그때서부터였다.

삶과 죽음이 그리도 가까이에 있음을, 거기엔 신분의 귀천 따위 조금도 중요하지 않음을. 연진은 알았다.

“아까 그 사내들을 죽인 일은 제게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부가 아니었다면 제가 그자들을 죽였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그런 말 하지 마.”

해월은 고개를 내저었다. 살인에 무감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걸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누가 즐길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만일 그런 자가 있다면 그자는 아마 나락에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귀신을 제령하고, 요괴를 퇴치하고, 가끔은 사람을 죽이는 이 모든 일에 상응하는 값을 치러왔다. 삿된 일을 하는 대가는 제법 비싼 값을 치른다.

“그래도 너는 몰랐으면 좋겠어. 마물을 상대하는 일이면 모를까, 사람을 해치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으니까.”

“그렇겠죠. 그래도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해야 할 겁니다. 오늘처럼요.”

“…가만 보면 너도 영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해월이 냉정하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자, 연진이 장난스레 동조했다.

해월은 세운 무릎에 턱을 대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이 야산을 밝히는 것은 오직 이 불 뿐이다. 더불어 온기를 주는 것도.

이제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 날이 제법 쌀쌀했다. 순간 한기가 느껴져 몸을 더욱 옹송그렸다.

“콜록.”

작게 기침을 하자 연진이 해월을 쳐다보았다. 그가 기침을 하면 필연적으로 안 좋은 일이 생겼으니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연진과 눈이 마주친 해월은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물러설 연진이 아니었다.

“입어요.”

연진은 해월에게 다가서서 입고 있던 도포를 내어주었다. 얼결에 커다란 도포에 파묻히게 된 해월은 급히 다시 벗어 주려 하다 연진의 표정을 보곤 흠칫했다.

저 서늘한 삼백안을 보고 있으면 왠지 움츠러들게 되었다. 고귀한 태생은 이런 데서 티가 나는 건가.

“내가 이걸 입으면, 너는?”

“저는 괜찮습니다. 추위 잘 안 타서요.”

느긋한 대답이었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은 확실히 설득력이 있었다.

“고뿔 걸리시면 한참은 앓으시지 않습니까. 당장 약을 지어 먹을 수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네.”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고맙다.”

짤막한 말에 연진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해월은 몸을 덮은 도포를 살짝 움켜쥐었다. 이러고 있으니 옷에서 연진의 향이 느껴졌다. 시원하고 담백한 그의 향이.

체향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쿰쿰하고 불쾌한 냄새에 더 익숙한 편인 해월은 코끝을 간질거리는 이 향이 좋았다.

그 척박했던 시절의 기억이 이것으로 덮이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포근했다.

이대로가 좋다. 제 삶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

세상엔 다양한 종류의 마물이 있다. 귀신은 요괴와 달리 육체가 없고 혼백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존재로, 보통 낮에는 힘을 못 쓰지만 밤이 되면 영력을 깨치지 못한 범인의 눈에도 목격된다.

인간의 혼백이 귀신이 된 경우라면 차라리 낫다. 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꼭 인간만이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념이 모여들거나, 동물과 인간의 혼백이 섞여 괴기스러운 귀물이 되기도 한다.

그들을 무찌를 방법은 정화를 통해 혼백을 천도시키거나, 강제로 사멸시키는 방법뿐이다.

해월은 의뢰를 받았을 때 가능하다면 전자의 선택을 했고, 불가능할 경우 후자의 선택을 했다. 안타깝지만 후자의 선택을 할 일이 더 많았다.

어둑한 밤, 웅크려 누운 채로 얕은 잠을 자던 해월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근처에서 귀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해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이 든 연진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연진이 눈을 떴다.

“사부…?”

“쉿.”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연진이 자세를 일으켰다.

적막한 산중의 밤.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너무도 고요한 탓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위기는 늘 그런 순간에 나타나는 법이다. 해월이 연진의 손을 잡고 제 뒤로 감추듯이 당겼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그것은 하나의 머리에 세 개의 입을 가진 귀물, 삼구귀였다.

삼구귀는 인간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파리한 피부색을 띠었다. 보통의 것에 어긋난, 마치 인간의 몸체에 대충 팔다리를 이어 붙인 것만 같은 괴기스러운 생김새였다. 생전 처음 보는 귀물에 연진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반면 해월은 침착하게 행동했다. 삼구귀는 인간에게 별다른 해악을 끼치지 않기에 되레 긴장이 풀렸다.

“…인…간….”

삼구귀의 거무죽죽한 입술이 벌어지고 짤막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흡사 어둠의 강물에 절여진 듯 음습하기만 했다. 한결 긴장이 풀린 해월은 연진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생긴 건 저래도 나쁜 귀물은 아니니까 안심해.”

연진은 해월과 삼구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저런 흉악한 생김새를 가진 놈을 보고 안심하라니.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인간을 보면 날씨 얘길 하거나 재수 없는 소리 몇 마디 하고 갈 뿐이야. 그러니 긴장할 것 없어.”

“재수 없는 소리라면….”

“들어보면 알 거야.”

해월은 이 상황이 재밌는 듯 슬쩍 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삼구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바람이 많이… 분다. 날이, 좋다.”

삼구귀가 삐걱대며 중얼거렸다. 노랗게 탁한 흰자를 드러낸 눈알이 이리저리 굴러가더니 정확히 해월과 연진을 향한 순간, 또다시 입이 움직였다.

“비참히, 죽는, 다. 불행, 할 거다.”

뚝뚝 끊겨 나오는 음성은 썩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월은 계속 미소를 유지했다. 저 정도 악담에 굴할 거였음 진작 세상을 등졌을 것이다.

험악한 생김새를 하곤 악담을 중얼거리던 삼구귀는 이내 목적을 다 이룬 듯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때마침 아침 해가 떠올랐다. 산 중턱에 걸려있는 해를 잠시간 보던 해월은 연진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놀랐어?”

“조금….”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한다는 눈치였다. 하긴 그토록 괴기스러운 생김새는 보기 드무니까. 역겨워서 구역질해도 할 말 없는데 연진 정도면 나름 차분히 반응한 편이다. 해월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하필 처음 보는 귀물이 저렇게 생겨서 좀 그렇긴 한데, 멀쩡하게 생긴 것도 의외로 많아.”

위로라기엔 딱히 위로가 안 되는 말이었지만 연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만 갈까, 하고 발을 떼는데 누군가 옷자락을 붙잡아왔다. 뒤돌아서서 마주한 연진은 살짝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 그 귀신이 했던 말… 그저 하는 말일까요…?”

해월은 대답 대신 싱긋 웃음 지었다.

연진은 삼구귀가 한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연진은 이런 부분에선 기민한 편이니까.

“그럼 넌 그 헛소리를 다 믿어?”

“아뇨, 그건 아니지만….”

“귀물이 한 말에 너무 마음 둘 거 없어. 그냥 재수 없는 소리 들었구나 하고 넘기면 될 일이야.”

“…알겠습니다.”

연진은 석연치 않은 감정을 내리누른 채 산길을 내려갔다.

***

하련방까지 가는 길은 무척이나 북적였다. 아무래도 백난국에서 손꼽히는 기방이 있는 지역이다 보니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부유한 상인이나 귀족들이 더러 살고 있어,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즐비해 확실히 한주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하련방 대문 앞에 선 해월은 누가 보아도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그는 아까부터 괜히 왔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다. 송 행수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대강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연진은 해월이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신경 쓰였다.

“하아… 가자.”

흡사 결의와도 닮은 그 말에 연진은 얼결에 굳은 얼굴로 하련방의 대문을 같이 두드렸다.

끼이익.

대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인상의 문지기가 해월과 연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송 행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 오시기로 한 퇴마사님이로군요.”

문지기는 흔쾌히 몸을 비켜 주었다.

한 걸음 내디디며 하련방의 전경을 살폈다. 언제 보아도 눈이 따가울 정도로 화려한 기루였다. 기방의 중요한 덕목은 화려함이라고 강조하던 송 행수의 말이 떠올라 해월은 인상을 찌푸렸다.

멀찍이 있던 기녀 하나가 반가운 듯 뛰어와 해월의 손을 덥석 잡았다.

“퇴마사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어… 설마….”

해월은 제게 아는 체하는 기녀가 당황스러워 머뭇대다 이내 한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 그 낭자?”

“예, 행수 어르신께 눈물 쏙 빠지도록 혼났던 기녀요. 그게 접니다.”

“오랜만에 보니 반갑습니다.”

해월은 그제야 풀어진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잠깐 이 기방에 머물렀을 때, 가끔 참견 아닌 참견을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 알게 된 기녀였다. 아마 이름이 은… 뭐였던 것 같은데. 솔직히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다른 언니들도 퇴마사님을 보면 반가워할 겁니다. 오신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이리 금방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건 나도 몰랐습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오갔다. 그 사이에서 연진은 말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뒤늦게 생각이 든 해월이 운을 뗐다.

“아, 이쪽은 내 제자….”

“송 행수란 사람을 보러온 거잖아요. 빨리 뵈러 가죠.”

“어? 어어… 송 행수는 방에 있죠?”

재촉하는 연진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본래 목적이 상기되었기에 해월은 은… 에게 송 행수의 위치를 물었다.

“아, 행수 어르신은 늘 계시던 곳에 계십니다. 한데 지금은 조금….”

기녀가 말끝을 흐렸다. 그 의미를 알아챈 해월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이에 기녀는 더 말리지 않고 해월을 보내주었다.

“살다 살다 저리 잘생긴 공자님은 처음 보네….”

기녀는 멀어지는 두 사내의 뒷모습을 보고 중얼거렸다. 자신을 그리 쏘아보는 사내도 처음이었다. 그 눈빛에 관심이 아닌 적대감이 담겨져 있어 더더욱 생소했다. 참 신기한 사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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