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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8화 (68/124)

68화

양명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둘은 발걸음을 옮기기 위해 채비를 했다. 사실 채비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짐이 너무 간소했다. 최소한의 옷, 약간의 물건, 그리고 두둑한 돈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것이 없었다.

짐을 챙기던 해월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건….”

언젠가 연진이 그림을 그려주었던 부채였다. 그 별채에 두고 온 줄로만 알았는데, 연진이 챙겨온 모양이었다.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었기에 두고 온 것이 아쉬웠는데 괜히 그랬나 보다.

“이건 언제 챙긴 거야?”

“아… 제일 먼저 챙겼었는데 전해드린다는 것을 깜빡했습니다.”

평소의 연진이라면 절대 잊지 않았겠지만 요 며칠 사이에 너무 마음이 편해서, 그래서 잠시 잊었었다.

“기특하네. 이것까지 다 챙겨오고.”

해월은 연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부채를 펼쳤다. 언제 보아도 근사한 그림이었다. 제자가 그린 것이라 콩깍지가 씐 것은 아니었다. 나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으니.

문득 이토록 출중한 연진의 실력을 썩히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진아. 너 나중에 그림을 그려보는 게 어때?”

“그림이요?”

연진에겐 다소 뜬금없는 소리였다.

“너는 기도 강하지만 붓놀림도 좋은 것 같아. 확실히 재능이 있어. 저잣거리에서 파는 그림보다 네 그림이 훨씬 나아.”

해월의 칭찬에 괜히 멋쩍어진 연진은 목덜미를 매만졌다.

“화가를 해도 충분히 잘할 것 같은….”

문득 해월은 말끝을 흐렸다. 귀족들이 심심풀이로 그림을 그리는 것과 그림을 업으로 삼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행위는 고귀하고, 후자의 행위는 천대받으니까. 물론 실력만 좋다면 명성이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천대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 아무리 가진 재능이 뛰어나도 그림을 그려 판다면 그저 환쟁이 취급을 받는 것이다.

연진은 귀족이니 그런 취급 받기는 싫겠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데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그리할까요.”

“응…?”

“제가 보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언젠가는 화가가 되어도, 혹은 다른 무엇이 되어도 좋습니다.”

연진은 웃고 있었다. 해월이 제시한 자신의 미래가 마음에 드는 것처럼. 정말로 화가가 된 것도 아닌데 해월은 자연스레 그림을 그리는 연진의 모습을 상상했다.

저 사내다운 손으로 붓을 잡고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연진은, 해월의 머릿속에서 즐겁게 웃고 있다. 냉랭한 인상이 가려질 정도로 환하게. 그렇지만 결코 그 미소는 가식이 아니었다. 진정 행복한 자의 미소였다.

해월은 저를 따르는 연진의 맹목적인 행동이 조금은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좋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너라면 용서해주고 받아주지 않을까…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돼.’

스스로를 못났다 여기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너는 내가 사라지는 게 두렵겠지.’

죽어서 사라지면, 떠나려 했던 그때처럼 눈물 지을까. 그도 아니면 원망하려나. 해월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 상처와 아픔까지도 제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면 기꺼이 가져가겠다.

‘너는 내 업보가 되어라, 나는 그 죗값을 모두 치를 테니.’

하련방으로 가야 한다. 탐탁지 않은 마음이 들어도, 송 행수가 불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막무가내긴 하다만 그녀가 심심풀이로 부른 것이 아니란 걸 아는 까닭이다. 분명 제가 필요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충 짐작 가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것은 가서 확인하면 될 일이다. 하련방이 있는 지역에 가려면 필연적으로 산을 넘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통행증이 요구되는 지역의 관문을 통과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저도, 연진도 그리 떳떳하게 돌아다닐 입장은 아니다 보니 가능하다면 관문을 넘는 일은 피해는 게 좋았다.

그렇게 그들은 길을 나섰다.

정돈되지 않은 산길은 특히나 걷기가 어렵다. 게다가 길 자체가 구불구불하기까지 해서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산에서 보내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눈앞엔 작은 암석이 가득했고, 이끼로 뒤덮인 나무가 즐비했다. 산에서 나는 특유의 풀 내음이 콧속을 찔렀다. 저 멀리 아래에는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이 보였다.

그 물줄기를 보며 상쾌한 기분을 느끼기엔 산행이 너무 고되었다. 오래 걸어 꽤 높은 곳에 다다르자 구름이 걸린 산봉우리가 아련하게 보였다. 이 역시 경치랍시고 구경하기엔 몸이 힘들었다.

발밑에 밟히는 흙과 잎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헉헉대며 조금 가파른 구간을 넘었다.

저야 워낙 험한 산새에 익숙했지만, 연진은 평생 이런 산을 넘어본 적이 없을 테니 걱정스러웠다. 그가 짐이 될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까 봐 걱정하는 것이었다.

앞장서서 길을 찾아 걷다가 뒤를 돌아 연진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연진은 별로 지친 기색이 없었다. 조금 숨을 몰아쉬긴 했지만, 저 정도면 확실히 양호했다.

역시 체력은 타고난 모양이다. 오히려 호흡이 얕은 편인 해월이 훨씬 지친 상태였다. 아직 그렇게까지 높이 올라온 것도 아닌데 벌써 숨이 모자라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할 후유증 같으니.’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어봤자, 몸은 한 번 앓았던 폐병을 잊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가슴팍을 움켜쥐고 간헐적으로 숨을 쉬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자, 따끔거리던 속이 한결 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진은 해월의 사정을 알기에 그저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호흡을 고르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조금만 쉬었다 갈까요.”

“면목 없지만 그래야 할 것 같아.”

한주에서 놀고먹던 생활에 너무 적응해버린 나머지 산을 넘는 일이 전보다 배는 고되게 느껴졌다.

연진은 해월을 부축한 채 걷다가 문득 어느 한 곳을 발견하곤 그를 그리로 이끌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동굴이었다. 작은 동굴이었지만 연진과 해월 두 사람이 쉬기엔 충분했다.

동굴 벽에 머리를 기댄 해월은 눈을 내리감고 숨을 고르게 하는 데에 집중했다. 차갑고 축축한 동굴 벽이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일단은 쉬는 게 우선이었다.

연진은 그런 해월의 머리를 조심스레 제게로 당겨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해월이 가늘게 눈을 떠 연진을 쳐다보았다. 연진은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벽이 차고 딱딱합니다. 그대로 있으면 분명 고개가 아플 거예요.”

“…그래.”

그의 설명에 동조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퀴퀴한 공기의 냄새나 동굴 밖에서 흔들거리는 나무의 소리가 귀를 찌르는 듯했지만, 마음은 편했다. 기댄 어깨의 견고함이 안정적이었다. 어느 정도 몸이 괜찮아지자 해월은 입을 열었다.

“인적이 드문 산이라서, 어쩌면 너 오늘 산 귀신 볼 수도 있겠다.”

“산 귀신이요?”

“사람들이 산에서 많이 죽거든. 발을 헛디뎌 죽기도 하고, 갑자기 눈이나 비가 내려서 갇혀 죽기도 하고, 또 저런 높은 나무에 목매달아 죽기도 하지.”

해월은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고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산은 그런 원혼들이 모여있어. 지금은 낮이라서 눈에 잘 안 띄지만, 밤이 되면 활개를 치지. 특히나 신궁의 정화를 받지 않은 곳은 더욱.”

“아직은 한 번도 귀신을 본 적 없습니다.”

영안이 트였다고는 하지만 연진은 여전히 귀신을 본 적 없었다.

“한주나 양명 땅에는 귀신이 별로 없기도 하고, 네가 밤에 밖을 딱히 안 돌아다녀서 그래.”

그렇게 설명하며 해월은 손끝에 걸리는 돌멩이 몇 개를 주워서 만지작거렸다. 작은 돌멩이들은 제법 날카로운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해월의 눈매가 일순 가늘어졌다.

여기는 아직 산의 정점이라 부를 수 없는 지대였다. 그 말인즉슨 다른 사람도 충분히 오를 수 있는 높이라는 것이다.

“진아.”

해월이 나직이 연진을 불렀다.

“잠깐 저기로 가 있어.”

느닷없는 말에 연진이 잠시 머뭇거리자 짐짓 엄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얼른.”

“…예.”

연진은 그의 말을 따라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해월은 그대로 자세를 일으켜 동굴의 입구 쪽을 응시했다.

바스락.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예민한 해월의 귀는 그것이 단순히 자연의 소리가 아님을 알아챘다. 이건 사람이 풀을 밟는 소리였다.

이런 험한 산길은 산을 자주 타야 하는 상인들이 지름길로 곧잘 이용하곤 한다. 게다가 이 동굴 구석엔 무언가를 태우고 남은 흔적까지 있다. 누군가 이곳에서 쉬어가며 불을 피웠다는 증거였다.

다시 말해 이곳은 산도적의 표적이 되기 좋은 장소라는 것이다.

해월은 손아귀의 돌멩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흔들림 없는 시선이 정면을 향한 바로 그 순간.

휘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며 풀숲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해월은 오른손으로 그 화살을 붙잡았다. 손가락 사이를 스친 탓에 살이 찢겨 피가 흘렀으나, 개의치 않고 화살대를 부러뜨려 짧게 남은 화살촉을 그대로 표창처럼 날렸다.

“아악!”

짧은 비명이 저 멀리 풀숲에서 울렸다. 목표물을 명중했다는 것에 확신을 얻은 해월은 왼손에 쥐고 있던 돌멩이를 그대로 내던졌다. 상대 쪽도 죽이려고 쏜 모양이라 이쪽도 봐줄 요량은 없었다.

가공할 만큼 빠르게 날아간 돌멩이는 각각 어딘가에 부딪힌 듯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연진은 충격으로 두 눈을 크게 뜨고 해월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사부, 피가….”

“일단 저것부터 해결하자.”

해월은 연진의 손을 물리고 성큼성큼 앞으로 나갔다. 연진은 잠시 얼어붙었다가 이내 해월의 뒤를 따랐다. 동굴과 조금 떨어져 있는 풀숲 속에 도적이 있었다. 하나도 아닌 셋이나.

한 놈의 이마에는 해월이 던졌던 화살촉이 박혀 있었다. 아마 이게 박힐 때 냈던 비명이 이 사내의 생에 마지막 외침일 것이다. 나머지 놈들도 머리에 돌을 맞아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찌나 강하게 던진 건지 머리 한군데가 패어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끊길 것이다. 잠시 죽은 사내의 얼굴을 보던 연진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이 사내… 저번의 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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