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잠이라는 건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안식이다. 가장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태. 그 안정에 취해 깊은 의식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감각이 제법 괜찮았다. 다디단 잠이었다.
물론 술 마신 다음 날은 언제나 괴로운 법. 짹짹거리는 새 소리에 눈살을 찌푸린 해월은 그대로 인상을 구겼다.
“아으으….”
눈을 뜨자마자 잇새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되지 않을 만큼 정신이 몽롱했다. 중간에 한 번 깼던 탓인지, 많이 잔 것 같은데 푹 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잠이 꽤나 달았는데도 말이다.
척 보니 해도 중천이었다. 울려대는 머릿속을 잠재우려 관자놀이를 짚고 한참을 앓는 소리를 내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리고 어제의 기억도 함께.
‘너 처음 만났을 때 되게 까칠했거든? 그때 엄청 밥맛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안 자랄지도 모른다고.’
‘넌… 눈동자가 먹색이야….’
‘꼭 어두운 밤 같아.’
‘내 눈을 그렇게 말한 건… 너밖에 없어.’
‘으아악!’
해월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미친. 미친. 미친.
아무리 술이 많이 들어갔다고 해도 그런 청승을 떨다니.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마터면 죽는다는 얘기까지 곧이곧대로 할 뻔했다. 그러다 해월은 잠깐 멈칫했다.
‘설마 거기까지 얘기했는데 내가 기억 못 하는 거 아니야?’
그 생각까지 도달하고 나니 등줄기가 시원해졌다. 아닐 거다. 그렇게까지 기억이 끊길 정도로 과음한 것도 아니었고, 그래도 제가 한 말 정도는 기억한다. 그러니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만 하고.
해월은 머리칼을 헤집으며 자괴감에 빠졌다.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던 짧은 머리카락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그러다 해월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자신이 홀로 있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얘는 또 어디 갔대.’
밤중에 살짝 깼을 때, 저처럼 불편한 자세로 엎드려 있는 연진을 제대로 눕혀주었다. 그러고 나서 저도 다시 잠들었는데 눈을 뜨니 혼자다.
연진은 부지런하니까 어딘가를 둘러보거나, 일찍이 아침잠을 깨려 산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해월은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가 이내 자세를 웅크렸다.
왜인지 불안하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늘 있었지만, 지금처럼 연진 없이 혼자 있을 땐 유독 심해지는 것 같았다.
원래는 안 그랬는데….
사람은 함께 있을수록 더 약해지는 걸까.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려 더욱 추해지고야 마는 건가.
졸음이 밀려오는 것도 아닌지라 해월은 간단히 몸을 풀었다. 몸을 좀 풀고 나니 찌뿌둥했던 것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때마침 연진이 부드러운 음식이 차려진 상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왔다.
“어딜 갔나 했더니, 상 차려온 거였어?”
“예, 주인장이 속이 풀리는 차도 같이 내주셨습니다.”
“고맙게 됐네.”
술에 취해 해가 중천이 되도록 퍼질러 잔 것과 어제 연진에게 해놓은 헛소리들이 창피했다. 힐끔 연진의 안색을 살펴보니 별로 신경을 쓰는 기색이 아니어서 안심되었다.
일단은 허기를 채우는 게 먼저였다. 다행히 음식은 전부 소화하기 좋은 것들이었다.
충분히 속을 채운 해월은 같이 나온 차를 마시며 포근한 감각을 만끽했다.
호록, 하는 소리와 함께 향긋한 차가 목을 적셨다. 갈증이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가만히 앞에서 같이 차를 마시던 연진이 문득 해월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응…?”
느닷없는 손길에 멈칫하던 차에 연진은 묵묵히 해월의 머리에 붙어있던 흰 먼지를 떼주었다. 연진은 후하고 입바람을 불어 먼지를 다른 곳으로 날렸다. 그 작은 동작마저도 귀족다운 기품이 있었다. 타고난 자만이 낼 수 있는 우아함이었다.
해월은 저도 모르게 멍해져서 연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순간이었지만, 뭔가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는데….
‘역시 심동계인가.’
심병이 난 건 연진이 아니라 저일지도 모르겠다.
“사부.”
“어…?”
연진의 나직한 목소리에 몸이 움찔 떨렸다. 연진은 자신의 오른쪽 머리칼을 살짝 건드려 보였다.
“여기가 조금….”
그 언질의 의미를 잠깐 생각하던 해월은 손으로 머리를 만졌다. 역시나 머리칼이 부산스럽게 뻗쳐있었다.
“머리칼이 짧아서 원래 정돈이 잘 안 돼.”
어차피 외양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고, 어지간해서는 금방 가라앉기 때문에 별로 문제 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연진이 언질을 준 것이니 무시하기도 그래서 해월은 대충 머리칼을 매만지는 시늉을 했다. 그 손을 잠시 보던 연진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사부는 언제부터 짧은 머리칼을 한 겁니까?”
“칠 년 전부터.”
해월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즉답했다. 이에 연진은 조금 놀랐다. 해월에게 과거에 대한 무언가를 물으면 항상 뜸을 들이다가 두루뭉술하게 답하곤 했기 때문이다.
“특별한 계기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뭐… 그냥 조금….”
해월은 말끝을 흐리다 무언가 감추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대충 얼버무렸다.
“머리칼이 짧으면 편하잖아. 그래서 자른 거지 뭐.”
“그렇군요.”
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눈엔 의심하는 기색이 짙었다.
연진의 직감이 말해주었다. 해월이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그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해월은 비교적 태평했다.
“오, 이거 맛있다.”
해월은 차와 같이 나온 작은 과자를 입에 넣더니 짧게 감탄했다.
연진은 해월을 따라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은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어딘가로 고정되었다. 그곳은 다름 아닌 해월의 쇄골이었다.
어젯밤 자신이 불순한 의도로 깨물었던 자리에 울혈이 생겨나 있었다. 하필 해월이 옷을 살짝 내리고 그 부위를 긁고 있어서 눈에 잘 들어왔다. 게다가 백옥처럼 흰 피부에 저런 자국이 있으니 더욱 눈에 띄었다.
연진은 헛기침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벌레라도 물렸나… 좀 가려운데.”
해월이 작게 중얼거리며 붉은 꽃잎처럼 색이 변한 피부 언저리를 매만졌다. 면경 없이 보기 힘든 위치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 붉은 자국이 벌레에 물려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챘을 테니까.
연진은 별안간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해월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스승에게 불순한 목적을 가진 제자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때, 해월이 훅하고 연진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
숨결이 가까워졌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에 얼굴 위로 부드러운 숨이 부서져 내렸다. 해월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이리저리 보더니 대뜸 연진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붉어? 열은 없는데….”
그러고는 자신의 이마 온도와 비교해보았다. 연진은 슬며시 해월의 손을 치우고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딱 자르기는… 혹시 고뿔 걸린 건가 싶어서 그러지.”
“전 고뿔 잘 안 걸려요.”
“퍽이나 그러시겠다. 나중에 겨울 돼서 돌아다녀 봐라. 고뿔 안 걸리나.”
해월이 잔소리를 했다. 동장군이 노한 것만 같았던 백난국의 지난겨울을 떠올린 해월은몸서리를 쳤다.
지금은 딱 활동하기 좋은 가을이지만, 백난국의 겨울 공기는 콧속은 물론이고 머리끝까지 시리도록 차가워서 견디기 어렵다.
연진은 조금 넋이 나간 얼굴로 질문했다.
“겨울까지… 저랑 함께하시려는 겁니까…?”
“당연하지. 겨울 올 때쯤엔 다른 길 가려던 심산이었어?”
뭘 그런 걸 묻냐는 듯한 어투였다. 연진의 멍한 얼굴에 해월은 피식 웃었다.
“잘못 걸렸다고 생각해도 소용없어. 절대 안 놔줄 거거든.”
“…….”
연진은 목소리를 잃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숙취는 분명히 아니었다. 입가에 손을 댄 연진은 잠시 숨을 죽였다. 입 밖으로 정제되지 않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가령, 이 사람이 사랑스럽다… 라고.
손으로 가슴뼈를 눌렀다. 해월의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던 묵직한 짐이 사라진 듯했다. 따뜻한 온기가 전신을 압도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행여나 이상한 언동을 하게 될까 되레 몸이 굳었다.
‘미치겠군.’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감추려고 손으로 입을 덮었다. 지금 이 순간이 정녕 현실인지 뺨을 때려서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꿈이라면 죽을 때까지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있으나 마나 한 신세. 불필요한 존재. 가치 없는 인간…. 이 모든 말들은 제게 늘 붙어있는 것들이었다.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되뇐 적이 많았다. 숙부와 사촌 형은 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집안사람 대부분이 저를 진심으로 신경 쓰지 않으니, 그런 생각으로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여 솔직한 생각으로, 해월 또한 제 곁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아무리 좋게 쳐줘도 저는 그에게 혹과 다름없으니까.
저는 언제든지 그의 곁에서 사라져도 되는 사람이다. 하나 그것을 굳이 직면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서 버림받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품은 마음도 내비치지 않으려 지금도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러면 조금….
‘곤란한데.’
그 사이, 침묵이 길어졌다.
연진이 별말을 하지 않자 해월은 부러 거만한 자세를 취했다.
“왜, 감동했냐?”
그리고 장난스레 웃었다. 연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해월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금방 했던 얘기는 별 대단한 의미를 담지 않은 말이었다는 듯이, 아주 간단히 화제를 돌렸다.
“진아 너 혹시 겨울 좋아해?”
연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겨울을 싫어했다. 겨울에 떠난 부모가 생각나서였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해월은 조금 즐거운 듯이 말했다.
“추운 건 질색이지만… 사실 난 겨울이 좋아. 특히 눈 내리는 거.”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목소리가 꼭 아이 같았다.
해월이 눈을 좋아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눈은 귀천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내리니까. 그래서 눈이 좋고 누구에게나 차가운 겨울이 좋았다. 한기를 느끼는 건 저뿐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서, 겨울을 아낀다.
“막상 겨울이 되면 너무 추워서 제발 다신 안 왔으면 좋겠다고 빌지만 말이야.”
해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조가 섞인 웃음이었다. 그리 빌어봤자 겨울은 매해 찾아온다. 그리고 겨울의 끝엔 언제나 봄이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겨울을 보내는 제 삶도, 언젠가 봄에 다다르지 않을까. 해월은 그리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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