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안 자랄지도 모른다니. 그건 당연한 것 아닌가.
해월이 동안이라 잘 실감하지 못하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때맞춰 혼인하였다면 이미 자식도 봤을 나이라는 것이다. 물론 연진은 그걸 굳이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하튼 그는 성장할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좀 더 크고 싶었는데….”
해월이 꿍얼거리자 연진은 이내 풀어진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나 크고 싶었나. 지금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닌데 말이다. 얼굴이 좀 앳돼서 그렇지.
“괜찮습니다. 여기서 더 크지 않아도 충분한걸요.”
“…그냥 하는 말인 거 다 알아….”
“그냥 하는 말 아닌데.”
연진은 해월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이마를 덮고 있던 짧은 머리칼은 손길에 따라 쉽게 넘어갔다. 머리칼이 걷히자 올망졸망한 눈매가 드러났다. 취기 때문인지 눈동자는 조금 풀려 있었다. 연진은 해월을 마주 보며 술상에 얼굴을 대고 엎드렸다.
해월은 눈을 끔뻑끔뻑거리고 있었다. 멍하니 연진을 응시하는 두 눈에는 평소의 곧은 심지가 사라진 상태였다. 연진은 해월의 손을 잡은 채로 살포시 웃었다.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늘 어딘가 여유가 없어 보였다. 그걸 숨기기 위해 헤프게 웃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저 멍한 표정이, 취기가 올라 발그레해진 두 볼이, 붉게 물든 하얀 목선이 전부 색다르게 느껴졌다.
해월은 조용히 있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넌… 눈동자가 먹색이야….”
해월이 손을 뻗어 연진의 눈가를 톡톡 건드렸다.
“꼭 어두운 밤 같아.”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연진은 한 번도 제 눈동자 색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다. 백난국인은 원래 어두운 눈동자를 가졌고, 그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흑청색 눈을 가진 해월의 눈엔 그것이 조금 달리 보였나 보다.연진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언젠가부터 이 두 눈을 볼 때면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사부의 눈동자는 푸른 바다 같습니다.”
그것은 바다였다.
“서책에서 말고는 한 번도 바다를 본 적 없지만, 바다는 짙은 청색이더군요. 그래서 사부의 눈동자는 바다의 색과 닮았을 것이라고…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때론 차가워 보이고, 때론 푸르러 보이는 해월의 눈은 바다와 같았다.
“또 바다는 무척이나 어여쁘다고 합니다. 해서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연진의 말을 들은 해월은 푸핫하고 웃었다. 그가 이리 길게 말을 하는 게 드물어서 웃은 것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웃고 싶어서 웃었다.
“내 눈을 그렇게 말한 건… 너밖에 없어. ”
다들 음침한 색이라고 했었다. 불길한 흑청색이라고, 그렇게 힐난하는 것을 더러 들었다. 고작 눈 색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신경 쓰지 않았었다. 눈을 뽑아 갈아 끼울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남들이 어떻게 본들 무슨 상관인가.
올바른 선택은 언제나 제 몫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눈앞에 제가 선택한 제자가 있었다.
연진을 돕고 싶고, 이끌어주고 싶어서 선택했다. 스승다운 스승은 못 되어줘도,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 흐려지고 잊혀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도 좋다.
‘너는 내가 선택한 사람임을, 너만 알고 있으면 돼.’
…그래, 그거면 되었다.
“사부?”
연진이 넌지시 해월을 불렀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작게 숨을 쉬고 있었다. 꼭 잠든 것처럼… 이 아니라 진짜 잠이 들었다.
“하….”
순간 어이가 없어진 연진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마시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했던가.
해월은 조금 더 솔직하고 귀여워진 것 빼고는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평소에도 좀 솔직하게 굴면 좋을 텐데. 색다른 모습을 본 덕에 마음은 편했다. 취기 덕에 들뜬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연진은 자신이 제법 취해있음을 깨달았다. 평소라면 실례라고 생각해서 묻지 않았을 말도 했고, 바다에 가고 싶다느니 뭐니 사족까지 붙였다.
“하….”
많이 변했구나. 술을 마셔서 그런 건지, 서서히 변해왔던 건지. 더 이상 생각하기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연진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연진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사위는 고요하고 어둑했다.머리가 울렸다. 제 주량을 잘 몰라서 그저 마셔대기만 한 결과였다. 속도 좀 울렁거렸지만,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눈을 몇 번 감았다 뜨길 반복하자 몽롱했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그때, 부드러운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
그제야 연진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었는지를 깨달았다. 해월의 오른팔이 제 머리를 받치고 있었고, 반대쪽 팔은 제 어깨 언저리에 올려져 있었다.
바닥에 누워 잔 것 치고 목이 안 불편하더라니. 그의 오른팔이 베개 역할을 하고 있어서였다.
‘팔 저릴 텐데.’
이 미련한 사부는 자신의 팔이 저린 건 상관치도 않았을 게 뻔하다.
연진은 해월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의 팔을 빼내었다. 아무래도 중간에 먼저 깨서 저를 눕히고 그 역시 다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연진은 지긋한 눈길로 해월을 응시했다.
이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즐겁다. 함께 자고 일어나며, 식사를 같이하고, 술도 마셔보고. 이 모든 것들이 달았다.
연진은 끓어오르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해월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연진의 눈은 해월의 입술로 향했으나 결국 도달한 곳은 목덜미였다.
하얀 살갗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마시자 달큼한 향이 폐부를 가득 메웠다. 사람에게서 이리 단 향이 날 수 있다는 것을 해월을 통해 처음으로 알았다. 아무리 값비싼 향료를 쓴다 해도 이만큼 아찔한 감각을 선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향도, 아니… 그 어떤 사람도 저를 이리 들뜨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의 다정함에 취하고, 당신의 냉혹함에 잠겨 죽어도 좋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나는 당신을….’
좋아한다. 이건 분명 좋아하는 것이다. 착각은 아니었다. 이 끓어오르는 열망과 지독한 충동. 그 근원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해월이었다.
한동안은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지금도 혼돈 속에 놓여있다.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상상해보았을 때, 그것이 사내일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었다. 누군가를 어여삐 여기는 마음도 딱히 와닿은 적 없었다.
연진은 어느 순간부터 가슴이 뻐근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해월이 꽃처럼 예쁜 미소를 지을 때였다. 가족 같은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일까. 그런 마음이 이런 충동이 될 수가 있나. 애초에 아끼는 마음과 연모는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었나.
연진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해월은 아니었다. 그가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보고 있으면 닿고 싶고, 지금처럼 닿아있어도 더 깊숙이 파고들고 싶었다.
‘내가 이리도 욕심 많은 인간이었던가.’
자조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욕심을 가져본다.
이 여행을 끝마치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각자의 역할에 따라, 각자의 길로 나아갈까. 만일 계속 함께 있자고 하면 당신은 무슨 대답을 할까.
귀찮다고 밀어내려나, 아니면 싫어하려나…. 그것도 아니면 마지못해 허락하려나.
어느 쪽이든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밀어내면 붙잡을 것이고, 싫다 해도 강요할 것이며, 허락한다면 영영 놓지 않을 거다. 이 온기 속에 평생토록 취해 살고 싶다. 적어도 지금은 그런 저열한 마음을 버릴 수 없었다.
“으응….”
목덜미가 간지러운지 해월이 작게 칭얼거렸다.
연진은 제가 가학심을 가진 자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해월을 볼 때면 이상하게도 놀려주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위험한 줄 알면서도, 이를 세워 해월의 쇄골 언저리를 깨물었다.
입술과 혀끝에 닿는 피부는 손으로 만졌을 때보다 더욱 부드러웠다. 간지러운 감각이 거슬리는지 해월은 계속 옅은 신음을 냈으나 절대 깨지는 않았다.
술기운 탓일지도 모르나, 연진이 판단하기에 그는 한 번 잠에 들면 보쌈을 해가도 모르는 유형인 듯 보였다. 뜻밖의 수확을 얻은 기분이 되었다.
어쩌면 해월 역시 마음을 놓았기 때문은 아닐까. 항상 여유가 없어 보였고 어딘가 예민하게도 보였지만, 그가 제 앞에서는 비교적 허물없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타인은 알지 못하는 그의 본모습을….
‘나만이 알고 있다. 그 유일함의 주인은 나뿐이다.’
잠든 해월을 괴롭히던 연진은 입술을 떼며 입매를 늘렸다. 입가의 끝엔 만족감이 묻어나 있었다.
해월은 조금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적절한 사물을 찾았다는 듯이 연진을 끌어안았다.
“…….”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연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이렇게 무방비해서야…. 이 모습을 저만 알았기에 망정이지 다른 누군가가 알았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별안간 타오르려는 분노를 겨우 다스린 연진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사부.”
숨소리가 반 이상 섞인 목소리로 해월을 불렀다.
“자는 거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자는 거 맞습니까?”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연진이 이런 의심을 하는 것도 그럴만한 것이 잠든 해월의 힘이 아주 장사였다. 절대 놓치지 않을 기세로 끌어안으니 당하는 쪽은 속수무책이었다.
물론 그래서 좋은 거다. 가벼운 포옹이나 손을 잡는 정도는 했었지만,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 기회는 없다는 걸 알기에 연진은 이 밤이 아쉬웠다.
그래서 마주 앉은 이 온기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다신 내려오지 않을 동아줄을 붙잡는 것처럼. 하늘은 자신이 땅으로 동아줄을 내린 줄도 모르겠지. 그러나 그걸 발견한 인간은 줄에 매달려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살고, 하늘은 계속 깨닫지 못하면 된다.
‘이것이 제가 당신을 아끼는 방식입니다.’
그 뒤, 연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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