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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5화 (65/124)
  • 65화

    가볍게 세수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해월은 멍하니 앉아있는 연진에게로 자세를 숙여 그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연진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왜 이리 멍하니 있어.”

    “그냥 생각할 것이 조금….”

    연진이 그답지 않게 말을 흐렸으나 해월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주인장 더러 아침상을 내달라고 했어, 아마 금방 방으로 갖다줄 거야.”

    “예.”

    대답하는 목소리에 어쩐지 힘이 없었다. 그제야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해월이 연진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아뇨.”

    연진은 제 양심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정말로 그 말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잠시 후 상이 나온 뒤에도 아랫배가 거북한 느낌에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본래도 식사량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영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기만 했다.

    “밥알 개수 세냐? 넉넉히 좀 먹어.”

    “사부… 의술을 배우신적 있으시다고 했죠.”

    “그랬지. 한데 왜? 어디 아픈 데 있어?

    많이 먹는 것은 아니지만 제 밥그릇 정도는 깔끔히 비워내는 연진이 밥상 앞에서 고사를 지내니 걱정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그리고 해월은 그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도 진작 알고 있었다.

    “혹시 이유 없이 속이 울렁거리거나, 달린 것도 아닌데 심장이 바삐 뛴다면 그건 무슨 병입니까.”

    “속이 울렁거리고 지나치게 심장이 빨리 뛴다면 그건….”

    해월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다 답을 내렸다.

    “심병(心病)이지.”

    명료한 답이었다.

    “심병… 이군요….”

    해월의 의술 실력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연진은 알았다. 적어도 이 증상은, 이 마음은 병이 아니라는 걸. 아니, 어쩌면 지독한 열병일지도 모르겠다.

    “네가 그간 마음고생이 심해서 그런가 본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봐.”

    “…그리하겠습니다.”

    “명상을 자주 하는 게 좋겠다. 별 도움 안 되는 것 같아도 마음이 차분해지거든.”

    지난날. 해월은 늘 마음속으로 고요를 유지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감정이 널을 뛸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속을 다스리곤 했다.

    “그리고 본래 심병은 술로 털어야지.”

    “술이요?”

    연진은 갑자기 술로 바뀌어버린 화제에 짐짓 당황했다.

    “마음속의 근심은 쓰디쓴 술로 털어내야 한다는 말 몰라?”

    “그런 말 모릅니다.”

    “당연히 모르겠지. 내가 방금 지어냈으니까.”

    “그게 무슨….”

    연진은 간만에 어이없고 황당한 기분을 제대로 느꼈다. 그가 내키지 않는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음에도 해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에게 가 술을 구해왔다. 그리하여 대낮부터 술판이 열렸다.

    “하룻밤만 자고 산을 넘자면서, 이리 술을 마시면 어느 세월에 갑니까.”

    “어차피 짜증 나서 하련방에 바로 안 갈 거야. 며칠 농땡이 피우지 뭐.”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안 가겠단 말은 하지 않는 해월이었다.

    이 점에서 연진이 짐작건대, 해월은 나름대로 송 행수란 여자를 각별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어쩐지 배가 아픈 느낌이 들었다.

    “그따위로 불러냈는데 곧장 가면, 송 행수는 또 날 이용할 거야.”

    술상을 대충 차리며, 해월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연진은 ‘또’라는 말에 흠칫했지만, 그와 달리 해월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그보다 연진이 지금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바로 이 술이다. 술에 관해선 안 좋은 경험이 있지 않나. 저보다는 해월이 더 그 기억이 강할 텐데, 그러고도 술을 마실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걱정은 기우였는지 해월은 망설임 없이 술잔에 술을 채워 넣었다. 하나의 잔은 제 앞에 두고 나머지 하나는 연진의 앞에 놓아주었다.

    “주도니, 뭐니 하면서 떠들기엔 나도 딱히 주도를 배운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일단은 내가 연장자니까 나부터 마실게.”

    해월은 밝게 웃으며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시원스레 술잔을 비워내는 해월을 보자 연진은 역시 기우였나 싶어 걱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연진은 보지 못했다. 술잔을 잡은 오른손과 달리, 소매에 숨겨져 있는 해월의 왼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해월이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은 연진의 심병을 덜어주고자 한 의도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이유가 더 컸다. 자발적이긴 했지만, 술에 관해 안 좋은 기억이 생긴 만큼, 얼른 털어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씁쓸한 술이 입안 가득 퍼지자 그런 생각도 흐려졌다. 그래, 이렇게 기억을 덧씌우면 되는 거다. 안 좋은 기억을 좋은 기억으로. 그리하여 기억 저편에 묻어두는 것이다.

    해월은 다시 술을 따르고 허공으로 잔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턱짓하자 연진이 제 술잔을 부딪쳐왔다. 짠 하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연진은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입가에 술잔을 갖다 댔다. 그리고 순식간에 미간에 균열이 생겼다.

    “…이걸 대체 왜 마시는 겁니까.”

    입안이 쓰고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것이 영 좋지 않았다.

    “취하려고 마시는 거지. 술 마시는데 별 의미가 있냐.”

    “사부는 술 잘 드십니까.”

    “잘 마시는 편이지만 술이 센 건 아니야.”

    애초에 취하도록 마셔본 적 없었다. 돈 아껴야 해서.

    “근데 진짜 재밌지 않아?”

    “뭐가 말입니까.”

    “과거의 나한테 가서. 지금의 내가 이렇게 대낮에, 좋은 객잔에서 제자랑 술잔을 나눌 거라고 얘기한다면… 난 분명 믿지 않을 거야.”

    “…그만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니까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말을 하는 중간중간에 술잔을 비워냈다. 쓴맛을 안 좋아하는 것치고 해월은 술을 꽤 달게 마셨다. 연진은 미간을 좁히면서도 그의 장단에 맞춰주기 위해 대충 참고 마셨다.

    “제가 그 별채에서, 한주에서 이리 멀리 떠나올 거란 생각은 못 했습니다. 평생 그곳에 갇혀 새장 속 새처럼 살 거라고… 그리 생각했습니다.”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나는 평생 남을 위한 선택만 하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취기가 오르자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입을 다물고 싶었으나 이미 뚫려버린 입은 주인의 속도 모르고 움직였다.

    해월의 시선은 멍했고 아주 조금 우울한 기색이 있었다. 대낮이었지만 꼭 짙은 새벽인 것처럼 마음이 일렁였다.

    아 괜히 술을 마셨나.

    후회해보았자 이미 빈 병 여럿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중 절반 이상을 제가 비워냈다.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다 지긋지긋했어… 아버지도… 내 고향 사람들도.”

    연진은 묵묵히 해월의 말을 들어주었다. 잔이 비면 술을 채우고, 이따금씩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도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고, 선해월이란 이름을 갖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니까.”

    “그 이름이 아버님께서 지어주신 함자였습니까.”

    성은 몰라도 이름은 당연히 예전부터 쓰던 것일 줄 알았다. 양아버지가 나중에 지어준 이름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그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서. 태어날 때부터 그런 이름이었을 것처럼 정말 잘 어울렸다. 그래서 의외였다.

    “어, 아버지가 날 주웠을 때가 일식이 있던 날이었거든. 원래 내 이름이 뭐였는지 알아?”

    해월은 재미난 이야기를 한다는 듯 피식거리며 웃었다.

    “…뭐였는데요?”

    “무명, 여덟 번째 무명.”

    “…예?”

    상상하지도 못한 답이라서 연진은 저절로 반문했다.

    “내가 내 양친의 여덟 번째 자식이라서 그런 이름인 거야. 워낙 어렸을 때라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나 외의 형제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어딘가 팔려 갔었어. 그때는 잘 몰랐는데 내 양친이 좀… 반편이들이었거든.”

    비유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반편이었던 것 같다. 머리 어딘가가 잘 못 된 게 아닌 이상 가난한 주제에 아이를 줄줄이 낳고, 그 아이를 팔아넘기고 또 낳는 일을 반복하진 않을 테니까. 그럴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수월하게 가난에서 벗어날 방법이었을 것이다.

    또 그래서 다행이었다. 저를 팔아넘기는 게 이득이 안 될 거라는 말에 홀랑 넘어가서 야산에 버려두고 갔으니. 버려져서, 정말 다행이었다.

    취기가 올라서 인지 해월은 제법 기분이 좋아 헤실거리며 웃었다. 다만 눈동자만큼은 적요했다.

    “그래서 누가 뭐래도 난 아버지를 벗어날 수 없어.”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의 이름. 그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공허였다.

    “나한테 이름을 준 사람이니까.”

    문득 어지러워서 해월은 술상에 팔을 뻗고 엎으려 버렸다. 연진은 말없이 그런 그의 손을 잡았다. 손등을 감싸는 커다란 손의 감촉에 해월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연진은 흐릿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기색이 짙었다.

    “해월이란 이름은 당신과 무척 잘 어울려요. 아마 처음 들었을 때부터 그리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거짓말, 너 처음 만났을 때 되게 까칠했거든? 그때 엄청 밥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절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연진이 서운한 듯이 묻자 해월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까칠한 거 맞았잖아. 막 나보고 꼬맹이라 그러고….”

    사실에서 비롯된 말들이라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새삼 꼬맹이란 말을 그리 마음에 두고 있었나 웃기단 생각이 들었다. 그가 너그러워지는 부분과 각박해지는 부분을 알 수가 없었다.

    기생오라비 소리는 웃어넘기고, 꼬맹이 소리는 못 웃어넘긴단 말인가.

    마침 해월은 취기가 꽤 오른 듯 보였다. 하얀 볼은 잇꽃처럼 붉어져 있었고, 혀도 풀려 있는 게 누가 봐도 취한 자의 모습이었다. 치사하긴 하지만 이럴 때 아니면 물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연진은 입을 열었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됩니까.”

    “뭔데에….”

    “사부는 유독 동안이라거나 키가 작다는 말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런 것인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듣고는 해월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사실은 내가… 일지도 모르거든.”

    “예?”

    팔뚝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발음이 불분명하게 들렸다. 연진이 반문하자 귀찮은지 퉁명스레 재차 얘기했다.

    “나 안 자랄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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