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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4화 (64/124)
  • 64화

    아침 산책이라도 하는 건가. 아니 잠깐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가 왼쪽에서 자지 않았나?’

    그런데 그가 일어난 곳은 오른쪽 이부자리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가설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처음부터 오른쪽에서 잤었는데 어젯밤 정신이 없어서 착각했거나, 두 번째는 자신의 잠버릇이 고약해서 연진의 이부자리까지 굴러갔거나. 두 가지 예상 모두 가능성이 컸다. 이따가 연진을 보면 물어봐야겠단 생각을 하던 찰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연진이 방에 들어왔다.

    목욕이라도 한 건지 깨끗한 향이 났다. 얼굴선을 따라 미처 닦지 못한 물도 떨어지고 있었다. 해월은 자연스레 일어나 소매로 물기를 닦아주며 물었다.

    “어제저녁에도 목욕해놓고서 왜 또 씻었대.”

    “…그냥요.”

    묘하게 얼버무리는듯한 답변이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연진은 본래 깔끔한 사내였고 내킨다면 자주 씻을 수도 있겠지, 라는 생각에서였다.

    “근데 말야, 나 혹시 잠버릇 심했어?”

    누군가랑 같이 자거나, 마음 편히 누워 자본 적이 많지 않아서 자신이 깊이 잠들었을 때 어떤 잠버릇이 나오는지 알지 못했다. 혹여 연진이 자신 때문에 잠을 설쳤을까 봐 걱정되어 묻는 것이었다.

    “…….”

    연진은 일순간 굳은 얼굴이 됐다. 꼭 무언가 들킨 사람처럼.

    “아니 눈떠보니까 내가 네 자리까지 차지한 것 같아서… 자는데 불편하진 않았나 싶어 묻는 거야.”

    “아무 일도… 없었어요.”

    불편함을 묻는 말에 아무 일 없었다 답하는 것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반색했다.

    “그래? 다행이다. 그럼 나도 세수 좀 하고 올게.”

    “…예, 그리하십시오.”

    해월은 안심하며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나간 방문을 잠시간 바라보던 연진은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별안간 자괴감에 빠졌다. 조금 전 그의 질문에 연진은 거짓말을 했다.

    잠버릇이 심하냐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맞다’였다. 해월은 잠버릇이 심했다. 아니, 그것은 정확히 잠버릇이라기보단….

    “하아….”

    유혹에 가까웠다.

    ***

    지난밤.

    해월은 많이 피곤했는지 곧이어 잠이 들었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작은 콧방울에서 나오는  숨결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살아있는 사람이 숨을 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도 정말이지 신기했다. 베개에 볼이 눌려있는 모습도 귀엽게 느껴졌다.

    해월이 안다면 역정을 낼 일이겠지만, 그는 워낙 동안이라 연진은 그를 은인이자 형제 즈음으로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동생 같은 스승’ 정도로 여기는 중이다. 만일 해월이 이를 알게 된다면, ‘죽을래?’ 혹은 ‘누구더러 동생이래? 맞고 싶냐?’ 등의 반응을 보이겠지.

    연진은 괜히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딱 아프지 않을 정도로.

    손끝에 닿는 피부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말랑했다. 해월은 전체적으로 살집이 없는 편이지만 얼굴만큼은 살이 올라 있었다. 어디까지나 다른 부위에 비해서 살이 있는 것이지 해월은 기본적으로 가늘고 마른 체형이라 걱정스럽기도 했다.

    ‘살이 더 내린 것 같네.’

    한동안 그 고역을 치렀으니 살이 안 내리는 것도 이상하려나. 내일은 어디든 데리고 가서 더 좋고 맛난 것을 쥐여줘야겠단 판단이 섰다.

    ‘귀여워.’

    연진이 해월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뭣 모르는 이들은 그를 약관도 안 된 나이로 볼 것이다. 그 정도로 그는 소년 같은 인상이 강했다. 이 앳된 사람이 그 모진 풍파를 다 겪어냈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어쩌면 믿고 싶지 않은 감정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으응….”

    꼬집힌 볼이 불편했는지 해월이 웅얼거렸다. 그러자 연진은 볼에 댔던 손을 떼고 이번엔 머리칼에 가져갔다. 짧은 머리칼을 살짝 쓰다듬자 피부 결만큼이나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엔 낯설었던 이 짧은 머리칼도 신비로운 해월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손을 내려 해월의 뺨을 매만졌다. 손안에 다 들어올 정도로 작은 얼굴.

    겉보기엔 이리도 여린 사람이 그리도 강인할 줄 알았더라면, 제 삶을 송두리째 흔들 줄 알았더라면, 피했을까. 그가 베푼 선의를 적의로 대응하고 밀어냈을까. 그의 냉소적인 일면을 알았을 때, 실망했더라면 그를 떠나보내 주었을까.

    실없는 질문들이 어두운 방 안을 떠다니는 듯했다.

    “…….”

    곤히 잠들어있는 해월은 유난히도 귀여워 보였다. 전체적으로 선이 곱기도 하고 또 둥근 이마는….

    ‘이마….’

    연진은 불현듯 자신이 과거 해월에게 했던 짓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저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고, 부드러운 입술에도….

    ‘미쳤군.’

    엄한 상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더 이상 떠올리지 않는 것이 좋겠단 판단이 섰지만, 자꾸 몸서리치게 되는 것은 별수 없었다. 그 부산스러운 소리에 해월이 뒤척이자 연진은 흠칫하며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간만에 깊이 자는 것 같으니 깨우지 말자. 그의 숙면을 방해하기는 싫었다.

    반쯤 몸을 일으켜 앉은 채로 손을 뻗어 해월의 손을 살며시 그러쥐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 부드러운 온기를 붙잡고 있자니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넌 네가 불행할 때 도와준 사람이 떠난다니까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붙잡고 싶은 거야.’

    ‘사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해월이 아쉽고, 서럽다. 아직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때, 해월이 작게 꼼지락거리기더니 갑작스레 저의 허리를 둘러 안았다.

    “……!”

    당황스러워서 자세를 굳힌 찰나, 해월은 더욱 깊게 허리를 끌어안고 파고들었다. 옷자락에 코를 박고 살짝 숨을 들이마시더니 기분이 좋은지 입매를 늘렸다. 이 모든 일이 유백색의 달빛 아래 어둡고 흐릿하게만 보였다.

    한껏 굳어있던 연진은 해월을 살며시 떼어내려다 실패했다.

    ‘왜 이리 힘이 세.’

    평소 해월이 힘이 세다는 것은 알았지만 잠결에도 그럴 줄은 몰랐다. 연진은 낮게 한숨을 쉬다가 해월을 떼어내기를 포기하고 공존을 택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천천히 다시 몸을 눕히고, 저를 껴안느라 깔린 그의 왼쪽 팔만 슬며시 빼주었다.

    이건 붙어있다 못해 거의 매달려있는 수준이었다. 심장 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온몸이 맞붙어있으니, 해월의 전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연진은 뜬금없이 경건한 마음을 가져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날 자주 읽었던 서책의 초입 부문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옛 현인이 말씀하시길, 색(色)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은 오욕(汚辱)이오, 음(淫)을 좇는 것은 저욕(詆辱)하기 마땅하리라….’

    아닌 밤중의 학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연진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몸을 씻을 수밖에 없었다.

    ***

    기방이란 무엇인가. 기생들이 술을 따르며 춤과 노래, 그리고 웃음을 파는 곳이던가?

    그리 알고 있다면 식견이 좁은 자일 것이다. 기방은 사내들이 몰려오고 그 사내들은 재물과 권력을 물고 온다. 기생은 그들을 기예(技藝)로 사로잡는다.

    사람. 그것도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매혹시켰다는 건 곧 그걸 가졌다는 의미가 된다. 해서, 기생은 단순히 가무와 시서화를 뽐내는 어여쁜 인형이라 할 수 없다.

    또한 그 모든 것을 손 안에 두어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은 기방의 주인, 행수뿐이다.

    “행수 어르신, 아이를 데려왔나이다.”

    “어서 들이거라.”

    송 행수는 얼마 전 쫓아냈던 사내의 여식을 불러들였다. 아비에게 쓸모없는 자식 취급을 받았던 그 여식을.

    문이 열리자 어린 소녀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두려운 모양이었다. 하기야 여자아이가 이토록 거대하고 화려한 기방의 행수와 독대할 일은 없으니, 두렵지 않을 리가.

    “아가, 너는 몇 살이니?”

    친절한 송 행수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진 소녀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올해 여덟 살이 되었나이다….”

    “그래 여덟 살이구나. 이리 가까이 와보렴.”

    “예….”

    송 행수는 소녀를 제 앞에 바로 앉힌 채, 그녀의 머리를 묶어놓은 끈을 풀었다. 얇고 긴 소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행수는 태연한 태도로 소녀의 머리칼을 참빗으로 빗겨주었다. 가난하긴 하나 귀족가의 여식인데 소녀는 여느 평민의 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아비가 어떤 취급을 하며 키웠을지 눈에 선했다.

    “너도 마을에서 이 하련방 송 행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

    들었다 뿐이겠나만, 소녀는 의외의 발언을 했다.

    “예… 목소리가 무척 고우신 분이라고 들었나이다…. 실, 실제로 뵈니 얼굴까지 너무 고우셔서 놀랐습니다.”

    소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송 행수의 미색을 본 후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에 몸이 굳었기 때문이다.

    이에 송 행수는 너그러이 웃어 보였다. 아름다운 것을 선망하는 것은 여인의 본능이오, 흔한 일 중 하나다.

    “네가 보는 눈이 좋구나. 아무렴 설부화용은 이 송수련을 위한 말 아니겠니.”

    자화자찬임에도 그 말을 반박할 수 없는 미모였다. 소녀는 아름다운 여인을 동경하는 듯 수줍게 미소 지었다. 송 행수는 소녀의 머리칼을 깔끔하게 빗으며 말을 건넸다.

    “내가 너만 했을 때, 난 가난한 농부에게 시집을 갔었어.”

    송수련은 이 소녀보다 겨우 두어 해 더 살았던 나이에, 아비의 손에 이끌려 시집을 갔다. 이 집이나 저 집이나 가난하긴 매한가지였다. 궁핍했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다.

    “내 첫 번째 지아비는 나를 부려 먹지 못해 안달이었지. 견디다 못해 고향으로 도망쳐왔는데 아비란 작자는 날 또 시집 보냈어. 두 번째 지아비는 변태 같은 늙은이였는데 그래도 돈은 많아 다행이었단다.”

    소녀가 듣기엔 생소한, 그래서 불행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송 행수는 아이의 머리에 장식을 꽂아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사이에 날 도와주려는 사람들도 있었지.”

    “그, 그래도 도움을 주시려는 분이 계셔서 다행이었네요.”

    “글쎄, 그걸 다행이라 불러야 할까.”

    매혹적인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소녀의 귓가를 괴롭혔다.

    “언제나 죄책감에 짓눌려 사는 천치 같은 놈을 하나 알고 있어, 너도 궁금하지 않니?”

    “천치요…?”

    “아주 바보 같은 놈이지. 하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가련하다 해야 하나?”

    송 행수의 영문 모를 소리에 소녀는 잔뜩 긴장했다. 소녀도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대충 알았다. 아비가 며칠째 사라져 집안이 혼란하던 차에 하련방의 송 행수가 찾는다며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행, 행수님은 저를 기생으로 만드시려는 겁니까.”

    “뭐? 하하 재밌구나.”

    송 행수는 호탕하게 웃었다.

    “아까 내가 말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해 곡해가 있던 모양인데….”

    그녀는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내 두 번째 지아비는 일찍이 죽었고 내 아비는 날 기방에 팔아넘겼단다. 그래도 난 시, 서화, 가무에 모두 능했어. 참으로 다행이지 않니?”

    “예… 다행입니다.”

    소녀의 수긍에 송 행수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너를 이리 부른 것은 그저 옛 생각이 나 그런 것이니 심려치 말거라. 말동무를 해주어서 고맙구나.”

    “…예, 예!”

    “그래,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 봐. 그 머리 장식은 내가 주는 선물이야.”

    “감, 감사합니다, 행수님.”

    소녀는 감복하며 서둘러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송 행수는 입가에 띠었던 미소를 지워냈다. 그리고 짧은 감상이 들었다.

    제가 기방에 팔려 왔을 때도, 누군가가 저를 밖으로 등 떠밀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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