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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3화 (63/124)
  • 63화

    “사부…?”

    해월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연진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허억…!”

    해월이 별안간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바닥을 짚었다. 이윽고 땅을 짚은 손이 고통을 참는 듯 말려 들어갔다.

    “사부! 어디 아프십니까?”

    연진이 다급히 물었으나 해월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새된 숨만 몰아쉬었다.

    “윽!”

    손등에 핏줄이 튀어나올 듯 불거졌다. 비단 손뿐만 아니라 전신의 혈맥이 터질 듯이 피부 밖으로 돌출되었다. 흰 눈동자에 붉은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벌어진 일에 연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부!”

    이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해월의 영력이 지나치게 방출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연진은 잘못 알고 있었다. 이것은 영력이 방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나치게 많은 힘이 해월의 몸으로 급작스레 흡수되고 있었다. 전신의 영력이 들끓었다. 해월은 이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씹….”

    송 행수가 자신이 내어준 영석을 깨부순 것이 분명했다. 급한 일 아니면 부수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말이다.

    그 영석은 제 영력을 일정부분 담아놓은 물건이다. 영력은 없지만, 기가 강한 편인 송 행수가 주구를 다룰 수 있도록 특별히 만들어준 것이다.

    그것이 깨지면 그 안에 담겨있던 영력은 본 주인의 몸으로 돌아가도록 해두었다. 오랜 시간 동안 주인의 몸에서 떨어져 조금 변질되었던 힘이 갑작스레 돌아오니, 몸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위기 상황일 때 일종의 신호기처럼 쓰되, 웬만하면 부수지 말라고 얘기했다. 더욱이 시답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저를 불러내기 위한 용도로는 절대 쓰지 말라고도 했었다.

    이건 단순히 그녀의 필요 때문에 하련방으로 와달라는 ‘강요’쯤 되는 일이다. 어차피 갈 생각이었는데 이리 친절한 방법으로 불러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덕분에 하련방에 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정해졌다.

    “송수련… 죽여버릴… 윽…!”

    영력이 불안정하여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해월은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후.

    가까스로 몸이 진정된 해월은 힘이 쭉 빠진 덕에 연진에게 부축받으며 객잔으로 향했다. 객잔으로 가는 내내 해월은 이를 갈았다.

    “남 괴로울 것은 생각 안 하는 인간 같으니….”

    솔직히 송 행수의 요구대로 영석을 만들어주며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다만, 각오는 각오이고 실제는 실제였다.

    연진은 몸 성할 날 없는 해월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몸에 안 좋은 것은 아닙니까?”

    “그런 건 아니야.”

    떼어놨던 힘이 돌아왔으니 장기적으로 본다면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짜증 나는 일임은 분명했다. 어쨌든 걷다 보니 어느새 목표했던 객잔 앞에 다다랐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늑한 내부와 푸근한 인상의 주인장이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 묵을 방 있습니까.”

    작지 않은 규모의 객잔인지라 당연히 여유 방이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주인장은 조금 곤란한 듯 머리를 매만지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방이 있긴 합니다만… 객인 한 분이 머무실 만한 방밖에 없는지라.”

    “방이 하나뿐이라는 겁니까.”

    “예, 남은 방은 저 아랫방뿐입니다.”

    해월은 노숙까지도 숱하게 했었던지라 상관없었지만, 연진은 다를 수 있기에 그의 의사를 물어보려던 차였다.

    그런데 연진이 어느새 주인장에게 방값을 내밀고 있었다. 아니, 쟤가 언제 저렇게 민첩하게 굴었지?

    “그럼 그 방으로 주시오, 주인장.”

    게다가 돈을 내미는 연진의 입가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그의 호쾌한 지불에 주인장 역시 기분 좋게 반응했다.

    “예, 예. 금방 준비해놓겠습니다.”

    주인장은 방이 있는 쪽으로 후다닥 사라졌다.

    “……?”

    해월은 어색한 기분을 간직한 채로 연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

    “아….”

    송 행수 덕택에 힘이 빠져서 저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나 보다. 마침 씻고 오기도 해서 몸이 나른하니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방 벽에 기대어 꾸벅 졸고 있었다.

    연진이 저도 씻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설 때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의 기억은 떠올리기 힘들었다.

    해월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듯 몸을 기울였다. 새삼스레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깨부수듯 짜증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자려고?”

    이런 씹….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내뱉지는 않았다. 저놈의 환영은 지치지도 않나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군.

    누군가 제 어깨를 잡고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그 환영일 게 뻔해 거칠게 그 손을 쳐냈다.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사부?”

    “어…?”

    자신이 쳐낸 손의 주인을 알아챈 해월은 눈을 크게 떴다. 시야가 환해지고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아….”

    그 망할 환영이 아니라, 연진이었다. 막 씻고 나와서 깨끗하고 시원한 향이 났다. 순간 가슴속 깊이 스며드는 안도감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해월은 눈가를 손으로 짚었다. 그의 흑청색 눈동자는 잘게 떨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미치기라도 한 건가. 설마 방금 전의 일은 꿈이었나. 사실은 잠결이었던 것 아닐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울려댔다.

    연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해월의 얼굴을 살폈다. 야장의를 걸치고 방에 들어왔을 때 그는 눈을 꼭 감고 귀를 막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연진도 덩달아 멍한 얼굴이 되었다. 졸다가 가위라도 눌린 건가 싶어서 깨우려 했는데 해월은 그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맞은 손의 피부가 조금 따끔거렸다. 잠결이었을 테지만 그가 보이는 명백한 적의, 어쩌면 살의에 더 가까운 기운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해월은 그를 깨운 것이 자신임을 알자마자 한없이 미안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미안, 깜빡 졸았나 봐.”

    그가 사과를 건네자 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가위에 눌리시는 것 같던데….”

    “어? 어어….”

    가위에 눌린 것보다 심각한 수준인 것 같지만, 대충 비슷한 것 아닌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시 잠들 수 있으시겠습니까. 한 번 잠이 달아나고 나면 쉬이 자기 어렵잖아요. 주인장에게 부탁하여 따뜻한 차라도 내올까요?”

    “아니야 됐어. 시간이 늦어서 저녁도 간단히 때운 마당에 무슨… 눈 좀 붙이고 있으면 잠은 금방 와.”

    말은 이렇게 해도 눈을 감은 채 밤을 지새울 것이 뻔했다. 연진은 마지못해 방을 밝히고 있던 등불을 껐다. 해월은 애매하게 방구석에 있던 몸을 움직여 이부자리에 누웠다.

    어둑하고 깜깜한 방 안은 숨이 드나드는 소리와 멀리서 우는 풀벌레 소리만 들렸다. 이리 있으니 광활한 밤의 공간에 남겨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열린 창틈으로 새어 나온 달빛에 의존하여 옆자리에서 자고 있을 연진의 쪽을 흘긋 쳐다보았다. 언제 보아도 참 신기한 자세였다. 보통 잠을 자면 자세가 흐트러지기 마련이거늘 그는 꼿꼿한 정자세로 잠을 잤다.

    ‘뼛속까지 귀족이로군.’

    잠을 잘 때도 고귀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 타고난 듯 보였다. 해월은 어느새 돌아누운 채 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 방에서 누구랑 같이 자본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때, 어둠 속 인영이 움직이더니 갑작스레 볼이 꼬집혔다.

    “아.”

    “남 자는 걸 왜 그리 빤히 봅니까.”

    “…안 자고 있었네.”

    “누가 쳐다보면 잠이 안 오는 편이라서요.”

    연진은 능글맞게 대꾸했다. 이에 해월은 피식 웃었다. 비로소 온몸의 긴장이 풀리고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아까 전의 일들이 전부 없었던 일이 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래서 평소라면 이야기할 생각조차 안 했을 말들이 저절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있잖아.”

    ‘아마 작금의 나는 약해져 있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연진에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진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재밌는 얘기 해줄까.”

    “무슨 재밌는 얘기 말입니까.”

    연진은 솔깃한 듯 부드럽게 반응했다. 그는 해월이 해주는 이야기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었다. 설령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이야기처럼 들릴 것 같았다.

    그런데 해월이 꺼내는 얘기는 다소 뜻밖이었다.

    “사실 난… 아직도 혼자 자는 게 무서워.”

    자조적이기도 하고 차분하기도 한 음성이었다. 해월은 그렇게 제 비밀을 말했다. 지난날, 홀로 잠드는 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그는 여직 쓸쓸하고, 때때로 무서웠다. 고독은 일상과 같았기에 그저 외면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옆엔 연진이 있었다.

    “…오랫동안 떠돌며 퇴마 일을 하셨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해월은 홀로 잠드는 외로운 밤에 그저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그냥 오래도록 그래왔으니 괜찮다,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그럼 이제 계속 저랑 자면 되겠네요. 그럼 된 것 아닙니까?”

    “…에이 됐어, 암만 그래도 내가 애도 아닌데 뭘 너랑 같이 자. 오늘은 방이 하나뿐이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고.”

    “혼자 자는 거 무섭다면서요.”

    정곡을 찌르자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괜히 혼자 자는 거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를 꺼냈나 싶어 후회하려던 찰나였다.

    “…언제는 키 작다고 놀리더니, 혼자 자는 거 무섭다는 건 안 놀리네.”

    “놀려도 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키 작은 건 사실이니까요.”

    “…….”

    조금 감동하려 했는데 취소다. 그리고 저는 좀 어리게 생긴 거지 키가 그리 작은 편이 아니란 말이다!

    “맞을래 진짜? 너 지금 키 크다고 자만하지 마. 너 그거 다 큰 거일 거야.”

    “저 아직 어립니다.”

    “나도 아직 젊어.”

    “그래도 키가 자랄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너 언제부터 이렇게 잘 기어올랐지?”

    연진을 예의 바르다고 해야 할지 예의가 없다고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래도 혼자 자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네 말이 맞아.”

    해월은 쉬이 수긍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나았다.

    어느샌가 달이 잠에 들고 아침의 해가 깨어났다. 창호지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가를 자극하자 잠시 인상을 구기던 해월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에서 막 깨어난 덕에 눈앞이 흐릿했다. 잠시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가 이내 거둬낸 그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자세를 반쯤 일으켰다. 어제 그 고생을 치른 것 치고는 몸이 개운했다.

    “……”

    기분이 꽤 좋았다. 가볍게 기지개를 편 해월은 문득 옆자리의 공백을 느꼈다.

    연진이 자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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