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62화 (62/124)
  • 62화

    사내는 잠시 머뭇거렸다.

    천한 기생 주제에 고고한 규수처럼 노출을 꺼리는 것이 우스웠지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마침 소문만 무성한 송 행수의 미색이 궁금하기도 했고. 사내는 조금 망설인 끝에 발을 살짝 걷어 송 행수를 마주했다.

    “헉…!”

    백난국의 최고 기생들이 모인다는 하련방의 행수. 그녀에 대한 소문은 아주 많았다.

    몰락한 귀족 가문의 서녀라는 소문도 있고, 돈 많은 상인 집안의 자제이나 가무를 사랑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끔가다 늙은 퇴기라는 말도 돌았는데 직접 송 행수의 음성을 들은 이들은 믿지 않는 말이었다.

    목소리로 짐작건대 젊은 나이일 것이란 예상은 했으나, 생각보다 훨씬 젊은 여인인지라 사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까이서 본 송 행수의 미색은 가히 백난국 최고 수준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백옥같은 피부와 대조를 이루는 붉은 입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먹색 머리칼과 부드러운 산을 가진 눈썹은 미인의 얼굴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었다. 숱한 기생들을 보아왔지만 그중 최고라 생각되는 미색이었다.

    사내가 넋이 나간 채 저를 쳐다보자 송 행수가 손짓했다.

    “앉으십시오.”

    사내가 여전히 홀린 얼굴로 저를 보고 있자 송 행수는 ‘그럼 그렇지’ 하는 미소를 지었다.

    일패 기생으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엔 ‘설부화용(雪膚花容)이란 말은 송수련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까지 돌았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았다.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증서를 적어 내려갔다. 내용인즉슨 사내의 딸을 하련방의 동기로 만드는 대신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송 행수의 미모를 감상하다 조금 늦게 증서에 이름을 적었다. 송 행수의 입가에 조금 전과 비슷한 의미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역시 딸 가진 아비들이란 죄다 똑같군요.”

    “뭐…?”

    “천치(天痴)가 아껴 쓰라고 당부하였는데…. 아깝지만 어쩔 수 없게 됐습니다. 내가 좀 화가 나서.”

    영문 모를 소리에 사내는 당황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무슨 소리냐면 말이지요.”

    그녀가 서랍 속에 한 장 남아있던 부적을 꺼내 들어 사내의 이마에 툭 하고 붙였다. 가볍고도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갑작스레 이마에 부적이 붙은 사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본래 부적이란 악을 쫓습니다만, 우리 천치가 만든 부적은 악을 부른답니다. 영력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도록 특별히 부탁해 만든 것이라 효능이 뛰어나고요.”

    께름칙한 말이었다. 사내는 짜증이 밀려와 이마에 붙은 부적을 떼려 손을 뻗었다.

    파지직.

    그러자 손끝이 따끔했다. 흡사 부적이 사내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무언가 잘못된 것을 눈치챈 사내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곧 있으면 정신을 놓으실 테니 설명 드리기 귀찮군요.”

    송 행수의 말은 사실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밖에 있던 무사들을 불렀다.

    “밖에 있느냐.”

    “예, 행수 어르신.”

    “이놈을 하련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내다 버리거라.”

    “예.”

    무사들은 거품을 물고 눈을 뒤집은 사내를 짐짝처럼 짊어지고 밖으로 나갔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종종 벌어졌던 일이기에 익숙하게 행동했다. 다시 연죽을 물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진 송 행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고 따분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하… 간만에 천치나 불러볼까.”

    마침 부적도 다 떨어졌거니와 이 일대에 마물이 출몰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손님들의 발이 끊기지 않으려면 수를 써두어야 했다.

    ‘하련방은 천치가 써둔 부적 덕에 괜찮지만….’

    이 인근 마을이 해를 입는 것은 그녀도 원치 않기에 능력 있는 무당이나 퇴마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건 어김없이 천치였다. 그녀와 동향 사람이면서 아직까지 발목 잡혀서 사는 어리석은 자.

    송 행수는 항상 지니고 다니던 흰빛의 머리 장신구를 빼내어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종이를 고정하던 서진(書鎭)을 들어 그것을 내리쳤다. 영롱한 흰빛의 보석은 여러 조각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은 그녀는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과연 언제쯤 오려나.”

    즐거운 무언가를 기다리는 송 행수의 음성이 방안을 울렸다.

    ***

    땅거미가 지는 시각, 길은 한산해지고 이윽고 조용해졌다. 평화롭고 조금은 의미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걷던 그들은 그제야 갈 길을 정했다.

    “오늘은 여기서 하룻밤 자고 내일은 산을 넘자. 아마 하루 이틀 정도면 거기 당도할 수 있을 거야.”

    “예, 알겠습니다.”

    이젠 여름이 끝났기에 밤이 되니 제법 쌀쌀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히 메우자 속이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옛날에 해월이 아직 친부모와 살던 시절, 전례 없이 추운 겨울이 찾아와 세상이 얼어붙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많은 이들이 동상에 걸리고, 차가운 공기 탓에 폐병에 걸렸다. 그건 해월도 피해 갈 수 없었다. 있으나 마나 한 자식이 폐병을 앓는다고 해서 특별히 챙겨준다거나, 약을 지어 먹일 일은 없었기에 해월은 스스로 병을 이겨냈다.

    이겨냈다기보단, 버텼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 덕에 후유증이 남아 호흡이 얕아져서 짧은 뜀박질에도 쉽게 지치고, 찬 공기에 쉬이 고뿔에 걸렸다.

    고뿔은 한 번 걸리면 꽤 길게 앓는지라 늘 주의해야 했다. 그래서 빨리 묵을 객잔을 찾아야 했다.

    문득 생각해보니, 이번에 하련방에 가면 몇 해 만에 가는 것이었더라?

    예전에 그 주변에 부적을 붙여주고 영석(靈石)까지 넘겨준 이후로 본 적이 없었다.

    필요하지 않은 이상 서로를 찾지 않는 관계이기도 하고, 같이 있어봤자 별다른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달리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굳이 얼굴을 자주 볼 이유가 없었다.

    해월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지자 연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사부. 그 연을 맺었다던 기생은 어떤 분입니까?”

    “…혹시 너 하련방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귀족들이 자주 찾는 곳이라는 것 정도는 압니다.”

    “그래 맞아. 내가 알고 있다는 기생은 그 하련방의 행수야. 이름은 송수련.”

    “행수요? 그럼….”

    “네가 생각하는 기방 행수와는 좀 달라. 다른 기방의 행수들보다 훨씬 젊은 여인이거든.”

    관심이 없어서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아마 서른을 넘긴 나이였던 것 같다. 나쁘지 않은 미색과 달리 속내는 늙은 여우 같아, 이른 나이에 일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행수가 되었을 정도로 독한 여인이다.

    젊은 기생이 행수가 되는 일은 이례적이라는 걸 알기에 연진은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런 분과는 어떻게 연을 맺게 되었습니까.”

    “송 행수는 나와 고향이 같아. 길진 않았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한 사이고.”

    해월의 동향 사람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연진은 사뭇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와 달리 해월은 차분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고향에서 생활하던 시절엔 송 행수와 접점이 자주 없었기에 딱히 별 감상이 안 들기도 했다.

    “송 행수는 그곳에서 벗어난 자 중에 제일 잘 사는 축에 속하지.”

    보통은 단곡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다지 나은 삶을 살지 못하지만, 송 행수만큼은 달랐다.

    기생으로서의 재기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야심도 있고 배포도 있는 여인이라 수채 속에서도 딛고 일어날 방도를 알았다. 그 부분만큼은 해월도 높게 사고 있다 그렇기에 협력한 적도 있었고.

    “엮여서 좋은 것도 없지만 딱히 나쁠 것도 없는 여인이야. 그저 얼굴을 못 본 지 꽤 돼서 고향으로 가기 전에 인사치레 정도만 하려고.”

    어린 시절을 함께한 사이인 것치고는 꽤 냉소적으로 말하는지라 연진은 의아했다. 그 눈빛을 알아챈 해월이 피식 웃었다.

    “왜, 너무 정 없게 말해서?”

    “그것이….”

    연진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딱히 무어라 할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라 불러도 될법한데 선을 긋고 있다.

    저와 사부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묘하게 선을 그었던 그때처럼. 그는 계속 타인과 선을 그어두고 그 선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그게 그를 보호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까.

    아마 알 것이다. 알면서도 그게 편하다며 고수하는 걸 테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해월은 연진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향한 그의 눈빛에 동정이 깃들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뿐이었다.

    “근데 말야, 송 행수가 너 보면 꽤 좋아하겠다.”

    “예?”

    “송 행수는 미남자를 좋아하거든. 매일 그녀의 침실에서 젊은 사내들이….”

    다소 원색적인 이야기에 연진의 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이야기는 그의 생에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반면 해월은 아주 태평하게 송 행수의 문란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화려한 이야기를 다 들은 연진은 기가 쪽 빠진 몰골이 되었다.

    “농이시지요?”

    “사실인데? 이미 일대에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태연자약한 답변에 연진은 어쩐지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진이 말을 잃자 해월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놀랄 만도 하지. 그 점잖은 성격에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들었을 테니.

    연진만큼은 아니지만, 해월도 그러한 송 행수의 행각이 썩 유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해월은 과거 궁금한 마음에 송 행수에게 왜 그리 사내들을 갈아치우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자 송 행수는 붉은 입매를 늘리며 이렇게 답했다.

    “오는 사내 안 막고, 가는 사내 안 막는 것뿐이라고… 그리 답했어.”

    송 행수는 자신을 둘러싼 말들을 하등 신경 쓰지 않거니와 오히려 그 소문을 즐기기도 했다. 자극적인 소문은 손님을 더 불러온다나 뭐라나. 해서 자신에 대한 말들이 불거지는 것을 좋아했다.

    “…확실히 그리 틀린 말은 아니군요.”

    연진이 떨떠름하게 수긍하자 해월은 피식 웃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윽!”

    머리끝부터 전신이 울리는 감각. 심장이 요란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