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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61화 (61/124)

61화

길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내내 연진은 해월의 안색을 살폈다. 아까 시비가 붙은 일로 기분이 안 좋을까 봐서였다. 그런데 그 걱정은 역시나 기우였다. 해월은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연진은 저의 사부가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지는 기준을 알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기분 좋을 상황엔 무던하고, 상대적으로 기분이 나쁠 법한 일에는 되레 흥미롭다는 듯이 구니 헷갈리는 것도 당연했다.

“사부는 기분 나쁘시지 않습니까.”

연진이 넌지시 묻자 해월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뭐가? 아 혹시 아까 그 사내가 한 말?”

“예, 그 무뢰배 말입니다.”

“글쎄, 별로 신경 안 쓰여. 그놈이 나더러 기생오라비 같다고 했잖아. 그거 영 틀린 말은 아니거든.”

“……?”

“기생과 연이 있긴 있어서 말이야.”

듣는 이의 입장에선 꽤 엄청난 말인데 해월은 일상적인 말을 하는 것처럼 평온한 어투였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무던한 것도 있었다.

“기생과 연이 있다고요?”

‘기생’이라는 말에 연진은 흠칫 반응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한 번도 기방에 가본 적이 없었거니와 기생 한 번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연진은 해월이 타인에게 무관심한 편이니 자연히 여인에게도 관심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연진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생소한 것을 접했을 때의 묘한 기분을 넘어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기방이 천하다 생각하여 느끼는 불쾌감은 아니었다. 그는 기생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그들이 노류장화(路柳牆花)인지 예인(藝人)인지 판가름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설명하기 복잡한 무언가가 신경에 거슬리고 기분이 나빴다. 때문에 냉랭했던 인상이 한층 더 차가워졌으나, 해월은 정면을 응시하느라 그의 안색을 살피지 못했다.

“넌 가본 적 없으니 모르겠지만 기방이란 곳은 꽤 많은 것들이 오가는 곳이야. 단순히 예인들이 춤과 노래를 파는 곳이 아니라.”

“…그 말씀은 기방에 자주 가보셨다는 겁니까.”

온기가 없는 서늘한 목소리였으나 해월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자주 갔다면 자주 간 셈이지.”

그 애매한 답변에 연진의 표정이 완전히 싸늘해졌다. 해월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마침 근처에 왔으니 그 여인에게 얼굴이라도 비출까 하는 생각만 할 뿐이었다.

“여기서 산을 넘으면 내가 아는 기생의 기방이 있는 곳이야. 그래서 온 김에 한 번 들러보는 게….”

“안 갑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답이 떨어졌다. 이에 해월은 반문했다.

“뭐?”

“안 갈 거라고요.”

답지 않게 칼 같은 거절이었다. 당연히 연진이 따르리라 생각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 바람에 그들의 걸음이 거의 동시에 멈추었다.

“왜…?”

해월의 목소리는 의문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기생은 예인이 아닌 천한 족속들이니 뭐니 그런 생각을 하리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애초에 신분을 신경 썼으면 저를 스승으로 모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이 거절의 이유가 무엇일까.

연진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목소리를 내었다.

“…내키지 않습니다.”

“뭐가 안 내키는데?”

“그냥….”

연진은 말끝을 흐렸다. 해월은 언행이 유쾌한 편이니 주위에 사람을 잘 끌어모았을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기생들이 모인 기방에서도 예외는 아닐 터.

연진은 머릿속으로 자신을 만나기 전의 해월이 기방에서 기생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상상했다.

원복이에게 해줬던 것처럼 재미난 주술을 부려준다든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정하게 행동한다든가….

기생들과 희희낙락 어울리는 해월의 모습이 자연스레 연상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당히 날조된 형태로 머릿속을 잠식해나갔다.

“…….”

“갑자기 왜 멍하니 있어?”

“아….”

연진이 펼치던 상상의 나래는 해월의 질문으로 인해 깨졌다. 참 바보 같은 상상을 했다는 자책감이 밀려 들어왔다.

“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쩐지 변명하는 투였다. 사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우스운 상상들이었던지라 창피해서였다.

“뭐, 네가 정 싫다면 굳이 안 가도 되는….”

상관없다고 말하려던 해월은 문득 제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말끝을 흐렸다.

바보같이, 그걸 잊고 있던 것이다. 이 안온한 시간에 잠겨서 또 착각을 해버렸다. 얼마 안 남았을 테니 신변을 정리해두는 편이 옳았다. 해서 굳이 가야만 하는 일이 된 셈이다.

해월은 연진의 얼굴을 흘긋 쳐다보며 괜스레 안색을 살폈다.

해월이 아무 말 하지 않자 연진 또한 나름대로 골몰하였다. 사부는 꽤 그곳을 가고 싶어 하는 듯 보이는데 단순한 착각은 아닌 것 같다.

“가야 한다면 가요.”

“어? 진짜?”

“예, 진짜요.”

해월이 눈에 띄게 반색했다. 단 것을 입에 넣어주었을 때처럼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연진의 냉랭했던 기분도 눈처럼 녹았다. 저는 그것으로 되었다.

앞으로 제 사부가 즐거워하고, 저리 천진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많기를, 그리하여 오래도록 그의 곁을 지키고 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노라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는 지난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테니까.

***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는 무렵. 일대에서 손꼽히는 기방 하련방(夏戀房)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뤘다.

흡사 저택 같은 거대한 기와 아래 수없이 세워져 있는 나무 기둥, 화려하게 칠해놓은 단청은 하련방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었다.

하련방의 행수 송수련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방에서 하련방의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 가체를 한 그녀는 긴 연죽(煙竹)을 입에 물었다. 숨을 내뱉자 희뿌연 연기가 밤공기 사이로 흩어졌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곳곳에 켜둔 등이 하련방을 밝혀주고 있었다. 덕분에 누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쉽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렸다.

“술맛이 아주 좋구나.”

“제가 따르는 술이니 더 맛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과연 네 말이 맞다.”

술에 취해 기생들을 껴안고 노래를 부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옛 선현께서 말씀하시길 무릇 나랏일을 하는 자는….”

이렇게 고지식한 말을 내뱉는 경우도 있고, 간혹가다가….

“송 행수 어딨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뭐 이놈아? 내가 누군 줄 알고 앞길을 막느냐! 썩 꺼지지 못해!”

이런 패악을 부리는 자들도 볼 수 있다.

행수 송수련은 피식 웃음 지었다. 붉게 칠한 입술이 매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신분은 높은데 돈은 없어서 저리 추태를 부리는 자들을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니다. 이제는 지겨운 일상과도 같은 일이라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녀는 연죽을 내려놓고 옥으로 만든 지환을 매만졌다.

“안으로 모시거라.”

바깥에 있는 무사가 곤란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오나 행수 어르신….”

“내가 해결할 테니, 어서.”

“…예.”

이윽고 문이 열리며 아집을 얼굴 가득 묻힌 사내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앉은 자세를 일으키지 않은 송 행수는 붉은 발 너머에 있는 사내를 보고 흐릿한 비소를 지었다.

눈앞의 사내는 기방에서 주색에 빠진 것도 모자라, 노름에까지 손을 댄 인물이다. 그마저도 잘 풀리지 않자 괜히 남 탓을 하는 부류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좀생이’였다.

“송 행수!”

“존귀하신 분께서 어찌 그리 저를 찾으십니까.”

“지금 몰라서 묻나? 가진 돈을 다 잃었다고! 이건 누군가 수를 쓴 것이 틀림없단 말이야!”

“가진 돈을 다 잃으신 것은 안타깝지만, 제가 여는 투전판은 언제나 공명정대하답니다. 송구하지만 나으리께서 노름에 재능이 없으신 것은 아닐런지요.”

“뭐, 뭐야? 천한 기생 주제에 어딜 입을 함부로 놀려!”

괜히 찔리니 역정을 내는 것이다.

천한 기생이란 말은 일패 기생이 되어도, 이토록 번듯한 기방의 주인이 되어도 피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재미가 있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미색을 가져도, 아무리 그녀의 재기가 뛰어나도 ‘천한 기생’이란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니까.

“고정하시지요, 나으리. 한데 제가 듣기로 나으리께 어여쁜 여식이 있다던데…. 그 여식을 제게 주시면 대금을 더 내어드리겠습니다.”

“……!”

좀생이 사내는 흠칫 놀라며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제안이었다. 그에겐 딸이 하나 있었다. 어차피 있어 봐야 밥만 축내는 자식 이렇게라도 쓸모가 생긴다면 그야말로 횡재였다.

좀생이 사내가 반색하는 기미를 여실히 드러내자 송 행수는 싱긋 웃었다.

“하면 가까이 와주십시오.”

“……?”

“무릇 거래를 하려거든 증서를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 행수는 서탁을 톡톡 두들기며 재촉했다. 그 작은 행동조차 몹시도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 누구든 홀리지 않기란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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