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노온에게 하직 인사를 마치고 행랑으로 향하던 연진은 문득 멈춰 섰다.
“아….”
그동안 다른 쪽에 신경을 기울이느라 못 느끼고 있었는데 발이 제법 아팠다. 그래도 이 정도 통증은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그때, 연진의 시야에 검은 아지랑이가 들어왔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긴 그는 천천히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긴 복도와 방을 몇 개 지나 검은 기운의 근원지에 다다른 연진은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화려하고 넓은 방, 바로 가주인 강석요의 침실이었다.
그가 굳은 이유는 강석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온몸의 모공을 찌르는 듯한 사특한 기운이 낯설어서였다. 굳은 얼굴로 짧게 심호흡을 한 연진은 이내 문을 열었다.
“가주님! 부디 정신을 차려보십시오!”
“꺼, 꺼져! 저리 가! 네놈들 감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방 안에서는 하인들과 강석요가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 소란스러움에 인상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연진은 한겨울 호수를 품은 눈을 하고 천천히 침상으로 걸어갔다.
연진을 본 하인들은 하나둘 흠칫 놀라더니 자세를 굳혔다.
‘이건 내 눈에만 보이는 건가.’
하인들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기운을 보지 못하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도, 도련님.”
굳은 얼굴을 한 연진은 말없이 나가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하인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저마다 눈치를 살피며 멈칫거렸다.
“전부 나가거라.”
“하오나 가주님의 상태가 좋지 않으신데….”
“나 역시 상태가 그리 좋지 않으니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예….”
연진의 기세에 눌린 하인들이 마지못해 자리를 벗어났다. 연진을 유약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고 있던 이들에겐 낯선 일이었다.
탁.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강석요는 어떤 헛것을 보고 있는지, 사시나무 떨 듯하며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연진이 보았던 검은 기운은 강석요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검은 기운이 그를 옭아매고 있는 모습이었다.
“숙부님.”
나직이 부르자 흔들리던 강석요의 동공이 멈추더니 이윽고 연진 쪽으로 움직였다. 연진은 싸늘한 표정으로 강석요를 쳐다보았다.
강석요는 제가 아닌 저 너머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형, 형님…!”
“…….”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별안간 엎드리더니 손이 발이 되도록 빌기 시작했다. 저는 아버지를 빼닮았으니 강석요가 제 형님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혼란한 상태로 빌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는커녕, 속 시원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한없이 불쾌하기만 했다.
“숙부님.”
연진은 재차 강석요를 부르며 자세를 낮추어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강석요를 둘러싼 검은 기운 탓에 피부가 따끔거렸으나 행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숙부님이 먼저 저를 죽이려 하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 숙부님을 해하고 싶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강석요는 연진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지 그저 떨기만 했다. 다 쉰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숨이 끊기는 순간까지 괴로워하도록 하세요. 그건 당신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이 나락에 떨어지는 꼴을 내 두 눈에 담고 싶지만,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 힘들 것 같군요.”
“아, 아…!”
“그럼… 한시라도 빨리 그 더러운 삶이 끝나길 바라겠습니다.”
연진은 괴로워하는 강석요를 향해 조소를 띄었다.
방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연진의 움직임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
다른 하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던 와중에 원복은 혼란스러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소란스러운 틈에 홀로 행랑에 돌아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불안을 삭히려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다고 불안이 가실리 없었다.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져만 갔다.
강씨 가문이 준비한 연회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고, 가주와 그 아들은 원인 모를 광증 증세를 보였다.
풍비박산이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 와중에 제 도련님은 어디론가 뛰쳐나가더니 흙과 피투성이가 된 버선발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냐 물어도 차가운 목소리로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며 갈무리할 뿐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침을 꼴깍 삼키던 원복은 문득 향단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사람이 많더라도 제가 좋아하는 소녀만큼은 찾을 수 있을 터인데, 어느 순간부터 소녀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 문생에게 하사주를 올리는 것까지는 보았는데 그 뒤로부터 사라졌던 것 같다. 게다가 귀빈도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게 다 뭐람….”
문생 한 명이 독을 먹고 쓰러지고, 추궁을 받던 가주도 혼절하고, 도련님은 갑자기 냉철하게 행동하고…. 원복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대체 무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원복아.”
“도련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원복은 화들짝 놀라 문을 열고 행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평소의 무던한 분위기가 사라진, 조금 지친 듯한 도련님이 눈에 보였다.
원복은 반가운 마음에 연진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았다. 연진은 그런 원복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연진의 손에 들려있는 보자기를 본 원복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연진은 별채에서 해월이 말한 것들을 챙겨 나오던 길이었다. 덧붙여 원복에게 인사를 해두기 위해 행랑에 들른 것이다.
“네게 중히 할 말이 있어서 왔다.”
“중히 할 말이요…?”
연진은 원복의 눈높이에 맞게 허리를 숙이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두 번 설명할 시간은 없으니 잘 들어야 한다.”
짐짓 엄한 목소리에 원복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찰나, 연진은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난… 지금부터 출가하여 사부와 함께 떠날 생각이다.”
“예? 출가요?”
“그래, 넌 내 하인이었으니 곤란한 점이 많을 게야. 이것이 있다면 더는 하인으로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원복은 어느샌가 제 손에 쥐어진 묵직한 주머니를 보곤 화들짝 놀랐다. 얼핏 봐도 꽤 많은 양의 금화가 들어있었다.
“갑자기 이게 다 무슨 일입니까. 귀빈은 어디 계신 거고요.”
“네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 잘 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설명할 시간이 없어.”
아직 새벽이 되기 전의 시간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이롭기에 지체할 수 없었다.
원복은 이 모든 상황을 모르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원복에게 현실을 강요하는 자신의 행동이 썩 마뜩잖았지만 지금 그가 할 도리는 이것뿐이었다.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를 기약하며 지금은 이리 헤어져야 되겠구나.”
“정녕… 정녕 지금 떠나신다는 겁니까…? 어찌 이리 갑자기….”
서운한 마음에 괜히 울컥거리는 것을 원복은 간신히 참았다. 그는 연진과 짧지 않은 시간을 주종관계로 지내왔고,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해월과도 친밀하게 지냈었다.
그런데 갑자기 떠난다니,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게다가 지금은 가문의 존폐가 달린 위험한 상황인데. 이 와중에 연진이 떠난다면 이 가문이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제게 금화를 쥐여주는 이유도 알았다. 제가 이 집안의 하인으로 남으면 곤란할 것을 알기에 배려해주는 것이다.
“솔직히… 도련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들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어요.”
“…미안하구나, 원복아.”
이 모든 게 갑작스럽다는 것을 알기에, 연진은 더 이상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하오나… 이곳을 벗어나 귀빈과 함께 떠나시는 것이 도련님이 바라는 것이라면 따르겠나이다.”
연진이 그의 사부를 믿고 따르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날이 그날 같던 도련님이 눈을 빛내고 생기 돋아 보이던 순간엔 늘 귀빈이 곁에 있었으니까.
“지금은 이리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언젠가 모두 함께할 날이 다시 오리라 믿겠습니다.”
어릴 적부터 고아가 되어 궂은일을 많이 겪어서일까. 원복은 또래답지 않게 성숙하고 능숙한 면이 있었다.
원복은 찰나의 순간 도련님과 귀빈 그리고 저까지 옹기종기 모여 웃고 떠들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돌이켜보니 참 즐거웠던 기억이었다. 그리고 또 그런 날이 오리라 믿고 있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 언젠가 다시 보자꾸나.”
“예, 도련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들의 주종관계는 그렇게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
밤의 색이 더 짙은 새벽녘.
연진은 발이 아프다는 사실도 잊은 채 달리고 또 달렸다. 보통의 사람들이 일어나지 않는 이른 시각이니만큼 길거리는 몹시도 고요했다.
발걸음을 빨리할수록 숨이 가빠오고 주변의 경관들이 빠르게 뒤로 사라졌다. 그럼에도 연진은 멈추지 않고 나루터로 달려 나갔다.
“헉, 헉….”
내달리던 발이 지면에 멈춰 섰을 때 그의 앞에 놓여있는 것은 한산한 나루터였다. 어릴 적 이후로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지만 감복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해월이 성치도 않은 몸으로 나루터에서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숨을 고르는 시간도 아까웠다.
연진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해월을 찾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 사부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매일같이 보던 익숙한 외형이 시야에 없었다.
일순 눈빛이 흔들린 연진은 다시 시선을 옮겨 나루터를 살폈다. 아무리 보아도 뭍 가까이에 있는 조각배, 간간이 보이는 뱃사공들, 끝모르게 펼쳐져 있는 강 이외의 다른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해월이 저를 두고 떠났을까 하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한 번 했던 거짓말을 두 번 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연진은 떨리는 눈으로 다시금 그를 찾기 시작했다.
“사부!”
몇 번을 불러보아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연진의 눈은 언제든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강으로 오가는 물건들이 쌓여 있는 곳을 발견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물건들이 쌓여 있는 곳 옆에 해월이 쪼그려 앉은 채 잠들어있었다. 제가 걱정한 것을 알기는 하는 건지, 제법 편안해 보였다.
연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호흡을 골랐다.
“사부.”
자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떠나려면 슬슬 깨어나야 했다.
그가 떠났을까 하는 절망감으로 얼룩졌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한쪽 무릎을 굽혀 그의 어깨를 작게 흔들었다.
“사부, 저 왔습니다.”
“…으응….”
다행히도 해월은 곧바로 눈을 떴다. 곤함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몇 번 끔뻑인 끝에 연진을 알아보았다.
“이르게 왔네….”
피곤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잠겼다.
“예, 조금 서둘러 왔습니다.”
“원복이랑 장로님한테 인사는 잘했어…?”
“…나름대로 잘했습니다.”
“그래… 잘됐네.”
그 뒤로도 작게 무어라 웅얼거렸다. 그 작은 소리는 연진의 귓가에 희미하게 들렸다.
“나… 하는데… 이래도… 걸까….”
그것은 해월이 가진 불안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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