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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6화 (56/124)
  • 56화

    “어째서 떠나려는 게요. 뭐 말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궁금해서 묻는 것이오.”

    “…사부와 함께 가기로 했습니다. 이곳에서 벗어나 그분과 함께 지낼 생각입니다.”

    “호오, 듣기론 그자가 방랑 생활을 오래 했다는데. 같이 방랑 퇴마사 노릇이라도 할 심산이오?”

    가벼운 어조에 진심이 섞여 있었다. 연진은 작은 웃음조차 흘리지 않고 단호히 답했다.

    “필요하다면 할 겁니다.”

    해월과 함께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할 것이다. 제게 저런 말을 하는 노온의 의중은 알 수 없으나 별로 상관은 없었다. 자신은 그녀에게 악감정이 없었으니까.

    “인제 보니 그대들은 인연이로구먼.”

    “…….”

    “그 퇴마사도 공자를 많이 아끼던데… 그러니 공자를 가주로 만들려 목숨까지 건 것 아니겠소.”

    “…그 얘기는 관두시지요. 이미 사부와 따로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불현듯 낮의 일이 떠오른 연진이 미간을 구겼다. 아직도 해월이 쓰러졌던 일을 생각하면 심장이 관통당한 것처럼 아팠다. 더불어 그와 언쟁을 했던 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그런 일이 반복되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노온은 느긋하게 웃었다. 그 미소엔 달관한 자의 여유가 묻어있었다.

    “하여튼 그 퇴마사는 무사한 듯하니 다행이오. 믿기 힘들겠지만 나 역시 걱정하였소. 그만한 젊은이가 이런 일에 죽기엔 아까우니.”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말에 연진은 매섭게 노온을 노려보았다.

    노온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얼굴로 제 앞에 차를 따르고 그것을 한 모금 마셨다.

    “강 공자. 난 그대의 조부 때부터 이 가문에 몸담았던 사람이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것이 변했소.”

    다소 맥락에 맞지 않는 말에 연진이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 노온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멍청한 놈이 가주를 맡는 바람에 이 가문이 휘청거리는데도 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소. 그건 공자에게도 마찬가지였지.”

    노온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연진을 방관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저 내 일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는데…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더군. 마침 저택에 퇴마사가 들어와 흥미로운 일도 생겼고.”

    작은 변덕에 가까웠다. 인생의 끝자락에 다다라 아쉬운 것들을 정리하려던 순간에 연진이 눈에 밟혔을 뿐이다. 어렸던 그가 장성하는 동안 한 번을 들여다보질 않았으니 그 죄책감을 덜려 했었다. 그리하여 해월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 퇴마사를 처음 보았을 때 난 부끄러움을 느꼈소. 이 가문의 장로인 나조차 공자를 위해 가주의 패악을 막아주기는커녕 신경도 안 썼는데… 그 퇴마사만큼은 진심으로 공자를 위하고 아끼고 있었소.”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알게 된 지 오래되지도 않았을 텐데 해월은 마음을 다해 자신의 제자를 아끼고 있었다. 그 방식이 조금 위험하고 정작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었지만.

    “나는 어느 정도 예상했었소. 공자가 그자와 함께 떠나고 싶어 할 것을.”

    “…그러십니까.”

    노온은 눈치가 빨랐다. 그들 사이의 유대가 돈독해졌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기왕 이리된 거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시오. 혹 돌아오려거든 언제든 돌아와도 좋고.”

    “…….”

    “다시 돌아올 땐 그 퇴마사도 함께였으면 좋겠구려. 그자도 늙은이 놀라게 한 값은 치러야지.”

    “…그리하겠습니다.”

    연진이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것은 노온도 알았다. 이건 그저 타이르는 말이었다. 잘 살라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라고. 뒷수습은 어른인 자신이 할 테니.

    소원했던 시간이 길었던 것에 비해 그들의 작별 인사는 그리도 짧았다.

    ***

    넘실대는 물 위로 달이 떠올랐다.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민 바위가 흡사 거북이를 연상케 했다. 가끔 어두운 수면 밖으로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강물에서 밤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와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사이에 아스라이 들리는 풀벌레 우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저 사람들과 풀벌레들은 어떤 즐거운 일이 있기에 저리 쉼 없이 말을 하는 걸까.

    물가 특유의 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축축한 흙냄새도 났다.

    한주의 나루터는 이토록 평화로웠다. 밤이 되면 귀신이 활개를 치는 것이 당연한 해월에겐 낯선 광경이었다.

    올 때는 쌀쌀한 봄이었는데 벌써 여름이 거의 다 끝났다. 시간의 흐름이 야속했다. 자신은 여직 멈추어있는데 혼자만 쏜살같이 달려가는 시간이.

    나루터 끝자락에 걸터앉아 발이 닿을 듯 말 듯 한 수면을 바라보던 해월은 그대로 사색에 잠겼다.

    “하아….”

    어느 순간부터 제가 책임지지 못 할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았다. 고향에 연진을 데리고 간다니, 다시 생각해도 우스운 말이었다.

    단곡은 폐쇄적인 마을이다. 그들은 동질감을 느낄만한 자가 아니라면 쉽게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자발적으로 단곡을 찾을 정도면 이미 열악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뿐이었지만.

    단곡 사람들은 대체로 귀족들을 경멸한다. 그들 대부분은 백난국 황실에 의해 나라를 잃거나, 백난국의 귀족들에 의해 가문이 풍비박산 난 자들이었으니까. 증오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높으신 분’에 의해 핍박당했거나, ‘높으신 분’이었다가 하락한 자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선학경은 전쟁에서 불구가 되고, 나라를 잃은 자이니만큼 백난국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해월이 귀족 가문의 의뢰를 그리 많이 받지 못한 것도 선학경의 탓이 컸다.

    그딴 놈들의 돈은 필요 없다는 것이 선학경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고 해서 전부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일 년에 한 번 이상은 꼭 얼굴을 비추기로 약조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늦지 않게 가야 한다.

    선학경은 제가 늦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였지만 다른 마을 사람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제게 의존적이었으니까.

    뒤늦게 돌아가면 역정을 내려나, 아니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가져온 것은 없냐고 물으려나. 아니면 그저 뒤에서 수군댈까. 단곡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하던 해월은 손끝에 걸리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강물에 던졌다.

    작은 돌은 미약한 파문조차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답 없는 질문이 저 돌멩이처럼 가라앉았다. 고향에 가봤자 연진은 그 자태나 말씨가 누가 보아도 귀족인지라 숨겨보아도 금방 들킬 게 분명했고, 그렇게 되면 쫓겨날 것이 뻔하다.

    고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굳이 고향으로 가야 해? 그냥 네 제자 데리고 풍류나 즐기며 살아.”

    “……!”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해월은 화들짝 놀라 그쪽을 쳐다보았다. 꿈속에서 숱하게 만났던 어린 자신이었다. 제가 언제부터 잠이 들었던가 하는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어린 그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 안 자고 있어. 멀쩡한 상태야.”

    “…헛것이 보이고 들리는데 이게 어떻게 멀쩡한 상태야.”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혼자 말하는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보았을 것이다.

    아니, 헛것이 보인다는 것부터가 이미 미친 게 아닐까.

    해월은 길게 한숨 쉬었다.

    “하아… 가뜩이나 머리도, 속도 아픈데 이게 뭐람.”

    “독을 먹은 것도, 네 제자한테 함께 가자고 한 것도 네가 자초한 건데 왜 나를 탓해.”

    “내 탓 한 거거든?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너도 나잖아.”

    어린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는 것도 어이없고 황당했다.

    그 마음을 알긴 하는 건지 눈앞의 어린 그는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내가 저렇게 잘 웃는 아이였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넌 웃지 않았어.”

    “…….”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화도 안 내고, 걱정도 안 하고, 무서워하지도 않았어.”

    감정에 둔감했던 어린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지금이랑 다르네.”

    느껴지는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나, 변했구나.

    ***

    인적이 드문 산골은 하오의 시각에도 그늘이 져 있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린 시절의 해월은 험준한 산새를 넘나들며 선학경이 가져오라고 한 약초를 캐러 다녔다.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나무들의 꼭대기를 쳐다보면 숲과 하늘의 경계가 뒤섞여 보였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고양감에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꼭 이 숲이 거대한 감옥처럼 느껴졌다. 인적이 드물어 다져지지 않은 거친 산길은 발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나무에서 잎사귀가 하나 떨어져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바스락.

    작은 접촉에도 잎사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 잎사귀를 주워들어 눈앞에 대고는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잎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바람결에 떨어진 이 잎은 바닥으로 내려가는 동안 즐거웠으려나 하는 생각에 골몰한 것뿐이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얇은 나뭇가지들이 춤추듯이 흔들리며 보다 많은 나뭇잎이 떨어져 내렸다. 그 광경을 가만히 보던 해월은 먼발치에 있는 약초를 발견하고 그것을 캤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선학경을 만족시킬 수 있겠지.

    그는 양아들인 제게는 무심하고 냉혹하게 굴면서, 마을 사람들을 돕는 일엔 늘 먼저 소매를 걷어붙이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마을의 병자를 위해 약초를 캐오라 시켰다.

    그것이 이해가 가지 않고 영 내키지 않았지만, 선학경의 뜻이 그러하다면 굳이 참견할 생각은 없었다. 괜히 반항이라도 했다가 얻어맞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가끔 그런 질문을 떠올릴 뿐이었다.

    어차피 이리 냉대할 것이라면 왜 저를 양자로 삼은 걸까. 차라리 선학경에게 아들이 아닌, 타인인 존재로 남았었더라면 그가 베푸는 선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선학경이 야산에 버려져 있던 자신을 주워온 행위는 해월이 목도한 최초이자 마지막 호의였다.

    해월의 눈에 선학경은 저만 미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한 번씩 이러한 의문을 내비치면 선학경은 말없이 무시하거나, 알 것 없다는 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해서 더는 의문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사람인 것 같아서, 자신이 무어라 해도 바뀌지 않고 그 뿌리를 알려주지도 않는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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