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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5화 (55/124)
  • 55화

    “…정말 …정말입니까?”

    확신을 원하는 물음이었다. 이에 해월은 곧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정말이야.”

    해월은 연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속내와 달리 꽤 믿음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동안은 못 볼 테니까 원복이한테 인사해두고, 불편하겠지만 장로님께도 인사는 드려. 네 숙부와 사촌 형은 내버려 두면 알아서 자멸할 테니 걱정 말고. 아 그리고 갈 길이 머니까 돈은 무조건 많이 챙겨… 야, 내 말 듣고 있어?”

    연진이 멍해 보여서 해월은 그의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이리 얼이 빠졌어. 내 말 듣긴 한 거냐.”

    “예, 듣고는 있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가겠다고 하는 해월의 말이 너무 반가워서 넋이 조금 나갔던 것 같다. 이렇게 심장이 거세게 울리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사고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정신이 어딘가에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듣기만 하면 다야? 다 들었으면 얼른 가.”

    “…알겠습니다.”

    연진은 천천히 발을 돌려 연회장 쪽으로 가다가 몇 걸음 가지 않고 돌아서고, 또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던 해월은 피식 웃었다. 무슨 부모랑 떨어진 애도 아니고 왜 저리 돌아보나 싶었다.

    “야, 나한테 무슨 꿀 발라 놨어? 그만 뒤돌아보고 가.”

    “…예.”

    시무룩한 연진의 뒷모습이 해월 역시 눈에 밟혔지만, 이내 돌아섰다. 그에게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따위의 말이 한 시진 전부터 노온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살 만큼 살았고, 볼 만큼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생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참전했을 때와 준하는 정도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 강석요가 쓰러지는 바람에 오갈 데 없어진 분노를 아무렇게나 쏟아붓는 각 가문의 사람들. 그걸 수습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강씨 가문의 사람들까지.

    엉망도 그런 엉망이 없었다.

    그나마도 현원 소 씨가 아니었다면 갈무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니만큼, 함부로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추후에 논의하는 것으로 합시다.’

    소천보의 선언 같은 말에 모두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이 타당하기도 했거니와, 그 자리에 있던 자 중 가장 큰 권력자이니 거스를 도리가 있으랴.

    이 모든 일이 벌어진 지 아직 반나절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노온은 다른 폭풍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습니까.”

    “혹 황제 폐하께 알려져 멸문이라도 당하는 것은 아닌지.”

    “재,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오!”

    이번엔 장로들끼리 어리석은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그나마 지혜가 깨어있던 장로들은 강석요 때문에 죄다 자리에서 물러나거나, 나이 들어 죽었고 이 우매한 장로들만 남았으니 통탄할 노릇이었다.

    물론 그녀는 저 역시 우매한 장로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여보게들.”

    노온의 말에 나머지 장로들이 일제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대들은 무엇이 그리 두렵소?”

    “…….”

    “뒷방 늙은이들 주제에 그리도 목숨이 귀중하오?”

    “뭐, 뭣이라? 뒷방 늙은이?”

    정확한 지적에 그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뒷방 늙은이를 뒷방 늙은이라 하지 그럼 무어라 부르겠소? 그럼 그대가 젊은이오? 하긴…그 나이에 기생이랑 노름을 할 정도니 그 행동만큼은 젊은이와 진배없구려.”

    “자네 지금 미쳤나? 여기가 어디라고 입을 함부로 놀려!”

    노온은 분개하는 장로를 가볍게 무시했다. 어리석은 사람을 상대하자니 같이 어리석어지는 기분이 되어 불쾌했다.

    “내 나이에 안 미치는 것도 이상하지. 하물며 연회는 엉망이 됐고, 가주는 쓰러졌고, 다른 가문들은 이제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몰락뿐인데 무얼 더 바라시오?”

    지금까지의 상황을 완벽히 정리한 말이었다. 노온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그들 중 누구도 말을 보태지 않았다.

    “아니 그렇소, 공자?”

    노온이 뒤를 돌아 의자에 앉아있던 연진을 쳐다보았다.

    연진은 연회장에 홀로 돌아온 뒤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 퇴마사는 어찌 됐냐 물어보아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번에도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일까.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노온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멍청한 부자(父子)들은 갑자기 앓더니 제구실을 할 기미가 안 보이고, 이 자리엔 더 멍청한 놈들이 장로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 가문은 여기서 끝나겠구려.”

    자조적인 말임과 동시에 사실적인 말이었다. 이제 이 가문은 아무런 힘도 못 쓰고 하급 귀족이 되어 몰락할 것이 자명했으므로. 때문에 다른 장로들 역시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거운 침묵이 방안을 가득히 메웠다.

    그때, 무표정한 얼굴로 관망하던 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무감한 눈으로 보던 연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이 가문을 떠나겠습니다.”

    “가, 가문을 떠나겠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오!”

    “아무리 상황이 이리되었어도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연진의 선언에 장로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노온은 일순 눈이 커졌다가 이내 평상시의 차분한 모습이 되었다.

    엄청난 말을 한 것과 달리 연진은 한없이 따분한 얼굴을 했다. 당신들과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제 뜻은 전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상황을 갈무리하는 것 때문에 시간을 지체한 것이 아까울 뿐이었다. 더는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얼른 나머지 일들을 마무리 짓고 아침 해가 뜨기 전에 해월에게 가야 했다.

    “아니 가주도 첫째 공자도 모두 미령해진 마당에 공자마저 없으면 우리더러 어쩌라는 게요!”

    “맞소. 우리 가문이 다시 일어서려면 구심점이 있어야 하오.”

    “이대로라면 강씨 가문은 무너질 것이오. 공자도 그걸 바라는 것은 아니지 않소.”

    장로들은 하나같이 우려의 뜻을 내비쳤다. 실은 우려를 가장한 자신들의 안위 걱정이었다. 이대로 몰락한 귀족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니 말이다.

    다 늙은 주제에 뭐가 그리 아쉬워서 붙잡으려 할까.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무, 무슨….”

    “제가 가문의 존속을 바란다고… 정녕 그리 믿고 계신 겁니까.”

    연진은 가문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 가문이 저를 버렸으니, 이젠 저도 가문을 버릴 차례였다.

    애초에 아버지를 제외하고 이 가문 사람이 좋았던 적은 없었다. 하나같이 저를 이용하거나 방관할 뿐이었으니까.

    이런 허울뿐인 귀족 가문 따위 차라리 망해버리는 게 낫다.

    “하지만 우리 가문이 이대로 망한다면 공자의 위신도 땅에 떨어지는 거요. 공자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면, 돌아가신 선친의 명예도 장담할 수 없소.”

    연진이 제 아버지를 끔찍이 생각한다는 걸 아는 장로 하나가 회유를 시도했다. 무슨 이유로 그가 가문을 떠나겠다는 말을 한 건지는 몰라도, 일단 말리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말을 꺼내자마자 자세를 굳히는 연진의 모습을, 마음이 흔들리는 것으로 간주한 장로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도를 부수는 것처럼 냉랭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저를 겁박하시는 듯한데… 안타깝게도 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도 저와 제 아버지의 위신이 걱정되셨다면, 숙부가 저를 광인으로 몰아갈 때 뭐라도 하셨어야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그, 그것은….”

    “위선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십시오.”

    어설픈 위선은 화만 돋울 뿐이다.

    “그, 그게 무슨 망발….”

    “장로님.”

    낮게 부르는 목소리가 눈처럼 시렸다.

    “그냥 망하십시오.”

    “공자…!”

    적나라한 말에 장로가 얼굴을 붉혔다.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었으나 알 수 없는 위압감에 더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것이 싫으시면 떠나시던가요. 이제 쇠락할 길밖에 안 남았는데, 돈이라도 챙겨야 좋아하시는 기생과 노름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명백한 조롱이었다.

    가만히 이 사태를 바라보던 노온이 큭큭 대며 웃었다. 늘 침전하기만 하던 연진이 장로들을 적대하는 것도 모자라 조롱까지 하다니.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이렇게 예측불허한 일이 터지고야 마니까.

    노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진의 어깨를 짚었다.

    “공자, 멍청한 늙은이들 상대하느라 수고 많으셨소.”

    “…….”

    “하나, 갈 땐 가더라도 나와 말 좀 나누고 가시오. 일각이면 되오.”

    노온의 제안에 잠시 침묵하던 연진은 곧이어 답했다.

    “그러지요.”

    방을 나선 그들 뒤로 얼빠진 표정의 장로들은 탄식할 뿐이었다.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긴 둘은 서로의 앞에 마주 섰다. 그녀는 이제 늙고 왜소해졌지만, 과거 전장에서 활약하던 기개는 죽지 않았다.

    노온의 강인한 기세에 눌릴 만도 했으나 연진은 굴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노온이 저를 말리려는 것이라면 뿌리칠 생각이었다.

    지금 연진의 머릿속에 가득한 건 해월뿐이었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럴 의향도 없었다. 그는 제 가문에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다. 노온의 요청을 받아들인 건 꼭 인사를 하고 오라는 해월의 말 때문이었다.

    “그 퇴마사는 어찌 되었소? 공자의 안색이 나쁘지만은 않은 것을 보니, 죽진 않은 것 같은데.”

    노온의 추측은 정확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이고 싶지 않아서 연진은 말을 하지 않았다. 여유로운 얼굴을 한 노온은 찻잔에 차를 따라 연진에게 건넸다.

    “드시오. 어쩌면 이 가문에서 마시는 마지막 차가 되지 않겠소?”

    연진은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러나 마시지는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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