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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4화 (54/124)

54화

자신의 목숨은 안중에도 없는 그의 무심함이 너무도 잔인했다. 잘 벼린 칼날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차라리 당신이, 당신의 이득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마음껏 원망이라도 할 텐데.

그러나 그 생각은 이내 접었다. 제 진심 어린 호소에 흔들리는 해월의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나는… 그런 게….”

해월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내가 너에게 가장 잔인하게 굴었다니, 나는 그러려던 게 아니었다. 전부 너를 위해 한 일이었다.

연진의 눈물에 해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은 연진을 위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연진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음에도 연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비수처럼 느껴졌다.

독을 먹었을 때보다 속이 더 쓰렸다.

“그런 게 아니라면, 당신이 한 약조를 지키고 싶다면. 나를 데리고 떠나줘요.”

“…떠난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야. 넌 한주 밖의 세상이 어떤지 모르잖아. 그런 곳으로 굳이 발을 내딛겠다는 이유가 뭐야.”

세상은 추악하다. 그나마 이곳이 연진에겐 가장 안전한 공간이 될 것이다. 굳이 이곳을 떠나 저를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는 저의가 무엇일까.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해월의 얼굴엔 의문이 가득했다.

“어차피 내겐 당신이 곁에 없으면 소용없어요. 가주의 자리도, 다른 무엇도.”

모든 것을 가진다 한들 소중한 이가 곁에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아니, 날 따라가면 넌 분명 후회할 거야.”

고저 없이 단조로운 해월의 목소리는 되레 단호하게 느껴졌다.

순간의 선택일 뿐이다. 어린 마음에, 처음으로 제게 손 내밀어 준 사람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떼를 쓰는 것과도 닮아있었다.

그리 길게 산 건 아니었지만, 해월은 그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쉽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남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고 여길 것이다.

“날 따라 떠난다면, 넌 날 미워하게 될 거야.”

가주의 자리가 코앞에 있었는데 놓쳤다는 것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죽었을 때 홀로 남게 될 네가 나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럴 리는, 아마 없겠지….

그때, 그 생각을 부정하듯 연진의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지금보다 미워할 리는 없었다.

“…이 순간에는 확신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진심도 결국엔 다 변해. 그게 사람이야. 지금껏 예외는 없었어.”

해월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진실이라고 영원불멸한 것은 아니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결국에는 다 변하고 말 것이다. 뜨거운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눈이 내리길 바라는 짓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제가 불변하는 진심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연진은 확언하고 있었다. 자신이 당신의 예외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러니 제발 날 떠나지 마세요.”

연진은 이미 스스로에게 몇 번인가 질문했었다. 왜 해월을 따라가고 싶은 거냐고.

그의 말마따나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어째서 그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걸까.

처음엔 마음이 이리 깊지 않았었다. 해월은 제게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긴 했지만, 그가 곤란해하는 것을 알고도 몰아붙일 정도로 맹목적이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리된 것일까.

지독한 현기증이 밀려왔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았다. 서둘러 빛을 찾아 손을 뻗고 싶었다.

“제 마음이 당신과 함께 가라고, 그렇게 명을 내리는 것만 같아요.”

해월과 함께할 세상이 어떨지는 저도 모르겠다. 그의 말처럼 행복한 일보다는 불행한 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손해를 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득을 원하고 그것을 가지려 애를 쓴다. 제 숙부 역시 그랬다. 어부지리로 갖게 된 권력을 손에 쥔 채 놓치지 않으려 발버둥을 쳐 작금과 같은 사태를 만들었다.

권력을 탐한 결과는 제삼자나 다름없는 해월의 계략에 의한 몰락이었다.

평소에도 권력이니 재물이니 하는 것들을 부질없다고 생각했는데, 한순간에 무너지는 강석요를 보고 여러 가지를 깨달았다.

아무리 많은 것을 쥐고 있어도, 그것을 잃는 것은 순간에 불과 할 수 있다고.

저라고 강석요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는 오랫동안 고립되어있던 탓에 서투른 것이 많았고, 그런 자신이 권력자가 된다 한들 이 가문을 일으킬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노력을 한다 해도 이룰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작 권력 같은 것을 붙잡고 발버둥 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해월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무심하고 이상한데 그래서 신경 쓰이는, 그런 저의 사부와 떨어지기 싫었다. 지금 놓치면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머리를 점령했다.

살아만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걸 아는데, 해월이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려 도무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재회할 수 없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으니까.

그건 단순히 다시 만나기 어렵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다시는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이 추측이 기우이면 좋으련만, 자꾸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나를 떠날 것 같아. 그 불안감을 증명해주듯 작금의 상황이 벌어진 것 아닌가. 자신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없고, 스스로를 함부로 대하는 사부는… 참으로 서럽다.

해월은 연진을 똑바로 마주하기 어려워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흙투성이에다 혈흔이 가득한 버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고 연진의 발 상태를 살폈다.

“신은 어디에다 두고 버선발로 다녀. 제법 까진 것 같은데….”

지청구를 주었음에도 연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니 고개를 올려 그의 표정을 보았다. 연진은 무감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 발이 상하든 말든 무슨 상관입니까.”

내뱉는 말이 제법 싸늘했다.

“어차피 떠날 거면서.”

아주 냉소적인 말이었다. 해월은 씁쓸한 얼굴로 자세를 일으켜 연진을 마주했다.

“나는… 네가 이렇게 아파할 줄은 몰랐어. 난 너에게 상처 주려 했던 건 아니었어.”

잔인하게 굴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어차피 무의미한 삶이니까, 그저 끝내도 된다고 생각한 것뿐이다.

“나는… 너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네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어.”

위선. 그 하나를 행하기 위해서 너에게 상처 준 꼴이 참으로 우습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이 네게 또 다른 상처가 될까 염려스럽기만 하다.

“이 일은 너를 아끼는 나를 위해서 한 거야.”

순전히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다. 저열하게도 말이다.

왜일까. 온갖 박대에도 굳건했던 네가 내 앞에서 이리 눈물짓고, 괴로워하는데 나는 슬프지 않아.

아니, 슬픔보다는 다른 감정이 앞서.

진심으로 저와 함께 가길, 곁에 있길 원하는 눈으로부터 알 수 없는 전율이 느껴졌다.

저와 함께 가보아야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그럼에도 넌 나를 원하고 있다. 단순히 필요해서가 아니라 간절히 원해서.

억제되지 않은 미소가 겉으로 드러날까 해월은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이유 모를 어지럼증이 온몸을 잠식했다.

이윽고 고개를 다시든 해월은 연진의 뺨에 있는 눈물 자국을 손가락으로 갈무리해주었다. 그 손길에 연진의 눈동자가 세차게 조여졌다.

“이리 와.”

해월이 살짝 끌어당기자, 연진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에게 안겼다.

“미안해.”

사과를 건네는 그 한마디엔 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기쁨, 슬픔, 아픔…. 그런 무형의 것들이.

그 모든 감정을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연진은 해월을 바짝 끌어안으며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조금 숨을 들이마시자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해월에게선 항상 달큼한 향이 났다.

해월은 제게 기댄 연진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진아.”

“…….”

“그러니까 나 미워하지 마.”

세상 모든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 보다, 연진 하나의 미움을 받는 것이 배로는 고통스럽다.

“미워하는 게 아니라… 서운한 겁니다.”

이에 연진은 굳이 제 입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아껴두었던 말을 꺼냈다.

서로의 품에서 살짝 떨어진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얘기도 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런 고민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너 내가 고향으로 간다고 하면, 따라올 수 있어?”

“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떨어졌다. 약간 허무감이 밀려올 정도였다.

“내 고향은… 이 일대처럼 평화롭지 않아. 가는 길도 험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을 수도 있어. 그래도 나와 함께 갈 거냐고 묻는 거야.”

“어떤 위험한 일을 겪더라도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위험하면 사부가 지켜줄 거잖아요.”

강한 신뢰가 깃들어 있는 말이었다.

“…속 편한 소리 한다.”

당황한 해월은 괜히 툴툴거렸다. 정말이지 연진은 당해내기 어려웠다.

일순 강한 충동을 느낀 해월은 입술을 달싹였다.

“내일 아침….”

“…….”

“그때까지 다 정리하고… 네 짐 챙겨서 와. 나루터에서 기다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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