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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2화 (52/124)

52화

골치 아픈 일은 없으리라. 그 점이 유일한 다행이었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입니다. 공자와 공자의 가문에는 피해가 없을 테니 염려 마세요.”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아닌 연진의 한을 풀어주고 싶어서 자초한 일이지만.

어쨌거나 개인적인 사정에 따른 일은 맞다. 연진에게 가주의 자리를 주고 싶었던 거니까.

“연회장은 어찌 되었나요.”

“나도 도중에 나와서 지금 상태는 모르오. 다만… 난장판이 되었겠지.”

“그렇군요.”

그 정도는 당연히 예상한 결과였다. 해월은 아직 독의 여파로 쓰린 명치 부근을 부여잡으며 마차 밖으로 발을 딛었다. 사뿐히 내디딘 후 발치에 떨어져 있는 너울을 다시 쓰곤 마차 안에 앉아있는 소영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저는 도망가야겠습니다. 혹 누군가 저를 찾거든 의원에게 보냈다 둘러대 주십시오.”

“그리하겠다만 임시방편에 불과할 것이오.”

“그렇겠죠. 주검이든 초주검이든 남아 있어야 할 터인데 갑작스레 사라지면 누구든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게다가 멀쩡히 돌아다니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들켰다간 큰일이었다. 더불어 소영현과 대화하는 모습도 들키면 피차 곤란했다.

“공자께는 여러모로 송구스럽게 됐습니다.”

소영현에게 뒷일을 맡긴 꼴이 된 셈이었다.

“그럴 필요 없소. 자네가 아니었어도 언젠간 이런 날이 왔을게요.”

“…그런가요. 하긴 그런 망나니짓을 한 자들의 끝은 이르게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강석요와 강석철은 곧 죽거나 아니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노온이 장로들과 합심하여 연진을 가주로 추대하고 오늘의 일을 수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그것으로 된 일이다.

정말 그것으로 되었다.

아마 연진을 다시는 못 보겠지만, 원하는 바를 달성했으니 만족스러웠다. 해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디로 가는 것이오.”

“글쎄요, 어디든 갈 겁니다. 제가 발붙이고 있는 땅이 곧 제 길이거든요.”

발이 닿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라도 갈 것이다.

“자네 앳되어 보이는데 꽤나 강직하구려.”

해월이 알기로 저는 소영현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짚어주지 않았다.

“혹 자네 이름을 알 수 있겠소.”

“아시게 되면 신궁에 고하기라도 하시려고요. 범상치 않은 주술을 다루는 자가 있다고.”

소영현은 사내의 비약처럼 행동할 생각은 없었으나, 그 주문이 범상치 않은 것은 확실했기에 그분에게 고할 용의가 있긴 했다.

얼핏 고민하는 듯한 그의 얼굴에 해월은 무심히 말했다.

“저에 대해선 아시지 않는 게 좋습니다. 천한 놈이랑 엮여봐야 흰옷을 진흙탕에 빠는 일밖에 더 되겠습니까.”

이미 잔뜩 엮여버린 한 사람이 떠올랐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불가항력, 그 말을 여실히 경험한 해월은 더는 무엇도 상관없었다.

“짧았지만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해월은 소영현에게 고개를 한 번 숙였다. 소영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도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 봐야 했다. 뒷일을 수습해야 하니까.

두 사람은 다른 대화 없이 그렇게 등을 진 채 서로의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

해월은 쓰린 속 때문에 명치 부근을 움켜쥐었다. 영환의 효과 덕에 더는 독이 퍼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이 통증이 사그라들려면 시일이 걸릴 듯했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느릿한 걸음을 이어가던 해월은 문득 제 옆에 있는 쪽문을 바라보았다.

그 문 너머엔 푸른 잎이 가득했다. 일전에 연진과 함께 본 유채꽃밭이었다.

꽃이 시들고 녹색의 풀만 남은 그곳은 봄날에 본 꽃밭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연진과 화관을 만들었던 일이 떠올라 괜히 가슴께가 묵직해졌다. 저곳에서 연진과 시답지 않은 대화들을 나누었을 땐 꽤나 즐거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이리되었을까, 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다. 제가 이기적이어서, 일방적인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 그리하여 선한 인간이 되어 이 추악한 본성을 숨기고 싶었다.

연진을 구해주겠다는 건 사실 허언이었다. 애당초 연진은 한 번도 제게 구해달라고 청한 적 없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다.

이런 인간을 사부랍시고 대접해준 연진이 고마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곳을, 이 생을 떠나기 전에 의미를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저 풀밭이 노란빛으로 물들었던 그 광경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지만, 본래 사람은 잊지 못할 기억 하나쯤은 갖고 살아가는 법이니까.

한여름의 눈처럼 쉬이 녹아 없어지는 기억이 있는가 하면, 꽁꽁 얼어붙어 결코 녹지 않는 그런 기억도 존재한다.

해월에겐 그런 기억이 몇 개 없었다. 그러니 더 잘, 더 오래 기억할 수 있으리라.

어쩌면 마지막 순간에 떠올릴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해월은 이내 미련을 접듯 고개를 돌렸다.

‘내 현실은 여기가 아니야. 이런 곳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국경 지방에 위치하여 척박하고 가난한 땅. 그곳이 저의 고향이고 돌아갈 장소였다.

돌아간다.

한주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말이었는데 아주 잠시간 잊고 있었다.

“…즐거웠다.”

그 말을 읊조린 해월은 발을 움직였다.

그때였다.

“사부!”

자신을 찾는, 반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흠칫하며 자세를 멈춘 해월은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제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을 것이라 단정했던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네가 왜….”

연회장에 남아서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을 연진이 지금 제 눈앞에 서 있었다.

검은 너울 사이로, 눈이 마주쳤다.

***

돌이켜보면, 연진은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걸.

다만 그게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쩌면 모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고.

설마 당신이 나를 두고 그런 이기적인 선택을 할 리 없다고, 내 곁에서 환히 웃었던 당신이 나를 영영 떠날 생각을 할 리 없다고.

그 맹목적인 믿음을 부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월은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어리석게도 그때까지 해월의 말을 진실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머지않아 그 믿음은 깨지고, 엄혹한 진실이 도래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진짜 독을 먹겠냐. 나도 내 몸 귀한 줄 안다고. 가진 것은 이 몸뚱이뿐인데 상하면 쓰나.”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눈빛이 견고해서.

“다 눈속임을 하는 방법이 있다고. 장로님께서 그 뒤의 대처를 해주실 거야. 너도 그에 맞게 행동하면 돼. 절대 동요하지 말고 알았지?”

나를 안심시키려 하는 당신의 모습이 좋아서.

그래서, 이렇게 내게서 달아나려 하는 당신을 쫓아가려 한다.

연진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쉴 새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난장판이 된 연회장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연회를 위해 준비된, 발에 맞지 않는 불편한 신이 뜀박질에 방해가 되자 연진은 망설임 없이 신을 벗어 던졌다.

버선발로 뛰기 시작하자 발에 생채기가 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날카로운 돌부리와 딱딱한 흙바닥이 주는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선해월, 선해월, 선해월.

그 이름이 입 안에 고여서 연진은 몇 번이고 넋 나간 사람처럼 그를 불렀다.

어딜 간 것일까. 쓰러진 사람을 업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텐데.

그때, 연회장 쪽으로 돌아오고 있는 소영현과 맞닥뜨렸다.

“강 공자…?”

소영현은 연진의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를 매섭게 노려보는 연진의 눈빛에 의아한 까닭도 있었지만 다른 이유가 더 컸다.

정갈해 보였던 아까 전의 모습과는 달리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에, 대체 어딜 돌아다닌 건지 양발의 신이 모두 벗겨져 발이 까진 듯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이 위압감, 다년간의 경험으로 소영현은 이것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어딨습니까.”

익숙한 누군가를 칭하는듯한 어조에 소영현의 눈이 일변했다. 단발의 사내는 이번 일이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고 했다.

조카인 강연진을 박대하는 숙부 강석요와 그 아들 강석철, 그런 그들이 미령 해지고 난장판이 된 연회. 수상한 단발의 문생….

흩어졌던 조각들이 한 데로 모이며 하나의 긴 토막이 만들어졌다.

“…가까운 문생인가 봅니다.”

소영현은 단발의 문생과 눈앞의 강연진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눈치챘다.

“공자께서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냉정한데다 조급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연진의 강한 기세에 소영현은 일단 그 사내가 부탁했던 대로 둘러대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 문생이라면 의원에게 보였습니다.”

의원이라는 말에 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본능적인 감각이 연진의 귓가에 말해주었다. 저 말은 거짓이라고.

소영현은 연진의 눈에 깃들어있는 적개심을 개의치 않았다. 과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현원 소 씨의 공자였고 연진은 한주 강 씨의 배척받는 공자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하인들이 모두 연회장에 있을 터인데 공자께서 직접 일개 문생을 의원에게 보이러 가셨다는 말씀입니까.”

연진이 던진 의문에 소영현은 가볍게 답했다.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와중인데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소영현의 말은 흔들림이 없었고 신뢰감이 있었다. 제가 해월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정녕 속았을지도 모를 정도로.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것이다.

“그 사람… 의식은 찾았습니까.”

“예, 의식도 찾고 의원에게 보이기까지 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독을 먹었으니 해독을 위한 약재를 먹어야 할 텐데 제대로 된 치료는 받았는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소영현은 뜸 들이지 않고 답했다.

“약재는 넉넉히 먹었으니 아마 괜찮을 겁니다. 너무 염려 마세요, 공자.”

소영현이 안심시키듯 말하자 연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소영현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헛웃음을 짓던 연진은 이내 입가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거두었다.

“그렇군요. 한데 이를 어찌합니까.”

누굴 속이려고,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연진은 주먹을 말아쥐었다.

“…예?”

“제가 방금 공자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걸 알아버렸거든요.”

만일 해월이 의식이 있는 상태였더라면 절대로 의원을 먼저 찾지도, 약재를 넉넉히 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로 소영현은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연진은 소영현에게 바짝 다가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강한 악력에 소영현의 옷이 반쯤 뜯길 듯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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