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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1화 (51/124)
  • 51화

    연진은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무엇일까. 이 느낌은 대체….

    온몸의 감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해월은 뛰어난 검무를 선보여 예상대로 하사주를 받았다. 그리고 이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계획대로의 일이었지만, 그래도 충격적이었다. 기분 탓인지 너울 너머로 그의 고통 어린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분명 눈속임이라 했지.’

    연진은 그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해월에게로 가장 먼저 뛰쳐나간 소영현의 표정이 이상했다. 가까이서 상태를 살피던 소영현의 얼굴은 꼭 진실한 무언가를 확인한 것처럼 보였다.

    피를 토하는 건 단순한 눈속임이라더니, 소영현 같은 자가 가까이서 살펴보았음에도 속을 정도로 철저한 방법을 쓴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아까부터 계속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잠식했다.

    “사부….”

    이성보다 본능이 더 앞섰다. 연진은 쓰러진 해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딱딱한 자세로 발을 딛었다. 모든 감각이 그에게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설마….’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생각 외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려던 때에 노온이 연진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가면 아니 되오.”

    “…….”

    연진은 노온을 한 번 쳐다본 뒤 이지를 잃은 눈을 한 채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가야 했다. 가야만 한다. 그 완고함에 노온은 더욱 힘을 주어 그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아니 된다고 했소.”

    “가야… 가야 합니다. 무언가 이상해서… 확인을….”

    연진은 노온의 손을 뿌리쳤다. 이에 노온은 그를 강하게 붙잡고 저를 똑바로 마주 보게 했다. 단호함을 품은 노온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전해졌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동자는 노인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흉흉했다.

    “그 퇴마사의 뜻이다…! 여기서 경거망동을 했다간 그자의 희생이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느냐. 지금은 잠자코 있거라. 그자의 생사는 후에 알아보면 될 일이야.”

    노온은 지금껏 한 번도 연진을 하대한 적 없었다. 그래서 지금 노온의 말이 어떤 결의를 담고 있는지, 연진도 모르지 않았다.

    아, 이랬던 건가.

    해월은 처음부터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저는 그런 것 하나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헛웃음조차 안 나왔다. 연진은 다시금 해월의 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소영현에게 업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뒤쫓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쾅!

    “아아아악!”

    귀족들에게 추궁받던 강석요가 갑자기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닥치는 대로 머리를 박아대기까지 했다. 해월이 일전에 막아두었던 환몽이 한 번에 펼쳐져 미쳐버린 것이다.

    “아악!”

    머리에서 피가 흘러 얼굴 전체에 핏물이 만연했다.

    “헉…!”

    강석요는 괴로움 속에서도 눈앞에 선연한 것들을 지워내지 못했다. 젊은 날 심심풀이로 시비를 걸어 죽인 사내, 희롱하여 우물가에서 자결한 부인, 재산을 뺏었던 소작농….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사령의 원념이 그의 목을 졸랐다.

    강석요는 머릿속이 뒤집히는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눈을 감아도 망령들이 보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리 가! 저리 꺼져!”

    강석요의 난데없는 기이한 행각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멈춰 섰다. 연진을 말리던 노온 역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이런 기이한 광경은 전쟁 때 이후로 보지 못한 것이었다.

    사술을 걸어두었다던 해월의 말을 이런 광경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그 빈틈을 놓치지 않은 연진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공자!”

    노온이 뒤늦게 연진을 붙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문간을 넘어서 해월이 옮겨진 쪽으로 사라진 뒤였다.

    노온은 완벽하게 망해버린 연회장에 서서,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

    소영현은 등에 업혀있는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보통의 사내보다 조금 가벼운 듯했으며, 벗겨지지 않은 너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은 꽤 앳되어 보였다.

    짐작건대 스물을 넘지 않은 나이인 것 같았다. 정확히 무슨 독을 먹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조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소영현은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를 내버려 둘만 한 냉혈한이 아니었다. 사안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다.

    소영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 마차를 세워둔 곳엔 사람이 없었다. 모든 하인을 연회장으로 모이게 한 점이 이리 작용한 것이다.

    크고 화려한 마차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 소영현은 마차 한쪽에 사내를 기대게 했다. 사내는 간헐적으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그 미약한 숨이 끊길 것처럼.

    소영현은 제 물건들을 넣어둔 작은 자루를 꺼내 거칠게 ‘그것’을 찾아보았다.

    그때, 작은 환 하나가 나무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영현의 시선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영현은 피를 토하고 쓰러진 사내의 너울을 벗겨 내던졌다. 검은 너울이 사라진 자리엔 작고 새하얀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짧은 머리카락, 흔한 외양은 아니었다.

    소영현은 그러한 생각들을 나중으로 미루어두었다.

    “이봐!”

    “…으.”

    거칠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해월은 신음을 삼키며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여긴 어디지. 해월은 눈동자를 굴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작고 좁은 방, 이라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이내 이곳이 마차 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천장에 현원 소 씨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니 소영현이 이리로 이끈 것이 분명했다.

    이 공간의 정체를 알고 나니 참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이라고 하기엔 분명 작았지만, 마차라고 하기엔 무척 큰 공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몽롱했던 감각이 점점 선명해졌다. 속이 뜯겨나간 것처럼 아팠다.

    “날… 왜 여기… 데려온 겁니까.”

    와중에도 의문을 품는 일은 빼놓지 않았다. 소영현의 입장에서는 저를 비롯한 모든 일이 탐탁지 않을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백난국 제일로 꼽히는 가문의 공자께서 기껏 연회에 참석해주었더니 엄한 꼴을 본 셈이니까.

    “일단 이것부터 먹으시오.”

    소영현은 대뜸 해월의 얼굴 앞으로 환을 내밀었다. 해월은 낯선 것을 마주한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소영현을 쳐다보았다.

    “이상한 것 아니니 얼른 먹으시오. 이대로 독이 전신에 퍼지면 죽을 수도 있소.”

    그걸 모르고 독을 먹었을까. 알고도 먹은 것이다. 이 일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니까. 솔직히 그 자리에서 죽을 줄 알았다. 추하게도 미련 때문에 죽지 않고 여태껏 숨을 쉬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 해월은 독을 삼켰다. 본래 생각해두었던 것보다 더 작은 양을.

    그렇게 결심해놓고서도 또 미련한 짓을 하고 만 것이다. 창피하단 생각이 들었다.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으니까.

    해월은 말없이 소영현이 준 환을 받아들이고 조금 망설이다 이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극악한 쓴맛이었지만 속이 아픈 탓에 혀의 고통 따위는 무시할 수 있었다.

    웬만해선 먹지 않겠다만, 이번엔 사안이 달라 어쩔 수 없었다.

    까드득.

    그렇게 작은 환을 씹고 있는데 깨끗하고 맑은 힘이 입안에서부터 서서히 퍼져나갔다. 쓰렸던 속이 반쯤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해월은 소영현이 제게 준 환의 정체를 깨달았다.

    “…영환(靈丸)이로군요. 이리 귀한 것을… 어찌 공자께서 갖고 계십니까.”

    해월이 이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영환은 신궁에서만 만드는 것으로 황실 내부에서도 귀한 것이었다. 영력을 이런 형태로 응축시켜놓으려면 대단한 수준의 수양이 필요했다. 그만큼 만드는 것이 힘들고 그걸 외부로 반출시킬 수도 없었다.

    제아무리 소영현이 현원 소 씨의 공자라 할지언정 이렇게 갖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소.”

    “저런, 쌀쌀 맞으셔라.”

    해월은 괜히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영환을 먹었지만 곧바로 몸이 회복되지는 않았다. 그리 큰 힘을 담아둔 환은 아닌 듯싶었다.

    해월은 허물어진 듯이 기대어있던 몸을 일으켜 간신히 자세를 바로 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아직 회복이 덜 된 몸 구석구석이 아파 왔다.

    고통에 익숙해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체면이고 뭐고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

    해월은 옷소매로 대충 입가를 닦아냈다. 입가에 굳어 있던 핏덩어리들이 떨어져 나가듯 지워졌다.

    소영현은 해월의 맞은편에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한 해월의 얼굴엔 긴장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방금까지 쓰러져있던 사람이라기엔 기세가 아주 강했다.

    살아오면서 위화감이라는 것을 크게 느껴본 적 없는 소영현 조차 주춤하게 만들 정도였다.

    의중을 쉬이 알기 어려운, 검푸른 눈을 하고 있는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무심해 보이기도 했으며, 따분해 보이기도 했다.

    반면 소영현은 조금 상기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왜 그러셨소.”

    상황과 맥락에 어긋나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기도 했다.

    예상대로 소영현은 이 모든 일이 저의 짓임을 간파했다. 이건 제 실수였다. 소영현에게 의심의 빌미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문을 외었다.

    강석요에게 끔찍한 고통을 선사해주고 싶어서. 연진을 괴롭게 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고 싶어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해월은 부러 가벼운 어투로 답했다. 이에 소영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네는 분명 주문을 외었소. 그건 무슨 주문이오?”

    소영현은 주술에 관해 그리 잘 알지는 못했다. 문무에 능했지만, 귀족의 신분으로 주술에 관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게 그 이유였다. 그가 주문을 욀 때도 속삭이듯 말한 탓에 끝마디밖에 듣지 못했다.

    ‘…명도로 이끌어라.’

    하지만 ‘명도로 이끌어라’, 그 한마디가 가진 위용은 대단했다.

    백난국은 평화를 추구하는 온건한 정책의 일환으로 사특한 것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주술을 금했다. 때문에 명도로 이끌라는 그 주문은 소영현에게 낯선 것이었다.

    “어떤 효력을 가진 주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시 좋은 것은 아닐 터.”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요? 공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소인은 정녕 모르겠습니다만.”

    해월의 모르쇠에 소영현의 얼굴이 작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별 상관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슨 목적으로, 어떤 일을 벌였는지는 몰라도 현원 소 씨에게 피해만 없다면 괜찮소.”

    가문의 명예를 최우선으로 하는 소영현의 신념이 두드러지는 말이었다. 해월은 흔한 귀공자다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소영현에게 되레 고마웠다. 한 가지만을 중시하는 사람은 그 밖의 것에 무심해지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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