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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50화 (50/124)
  • 50화

    연진이 주위를 신경 쓰지 않고 있는 사이, 강석요 다음으로 무능한 가주로 평가받는 태흥 경 씨가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운을 뗐다.

    마침 정적이 찾아왔었던 터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고 보니 강 씨 둘째 공자는 선대 강 씨 가주가 타계한 이후로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려. 좀 더 어렸을 때는 종종 보았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대놓고 저를 쳐다보면서 하는 이야기에 연진은 더는 그들을 무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윗단에 앉은 경 씨에게 예를 갖추었다.

    “제가 어릴 적 아버지를 잃고 상심이 커, 거처 밖으로 불출하여 이런저런 오해를 많이 샀습니다.”

    “호오, 오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겐가?”

    “달리 말할 것이 있겠나이까. 보시는 것처럼 저는 건강합니다. 숙부님과 형님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 쾌차할 수 있었지요.”

    웃으면서 말하는 동시에 연진은 강석요의 눈을 직시했다.

    저를 똑바로 마주해오는 연진의 눈에 강석요는 미간을 찌푸렸다. 연진의 말이 강석요를 조롱하는 것이라는 것 역시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숙부와 조카 사이에 감도는 싸늘한 분위기에 다른 가주들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그때 현원 소 씨의 가주 소천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 바람에 가주들은 물론 각 가문의 문하생들과 하인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이윽고 소천보는 연진을 바라보며 호쾌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새끼 호랑이 같았는데, 인제 보니 대호가 되었소.”

    “…감읍합니다.”

    소천보는 연진에게 호의적이었던 유일한 가주이다. 그를 적대할 이유가 없기에 연진은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조금 애매해진 분위기 속에서, 연진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강석요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흥을 돋울 겸, 우리끼리 먼저 잔을 드는 것이 어떻습니까.”

    “……!”

    연진은 작게 움찔했다. 아직 검무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연회의 절차상 가장 우수한 문하생을 뽑고, 그 문하생이 선창하며 잔을 비우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는 것이 순리이다.

    그리고 해월은 그 순서가 틀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을 중시한 적 있었다. 하지만 소가주도 아닌 연진이 다른 가주에게 이래저래 명령할 입장은 못 되었다.

    그렇게 곤란해하던 찰나, 소천보의 아들인 소영현이 목소리를 냈다.

    “송구합니다만 이 연회에서 술은 반드시 가장 뛰어난 문생이 먼저 마셔야 하는 것으로 압니다. 문생들이 검무를 보일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심이 어떠하신지요.”

    “소 공자의 말이 맞습니다. 굳이 급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맞습니다.”

    현원 소 씨는 이 자리에 모인 가주 중 가장 명문에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공자가 하는 말이니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자리에 있는 귀족 대부분이 규율을 중시하는 편인지라, 상황은 적당히 넘어갔다.

    ‘하아….’

    연진은 절차에 어긋남이 생기지 않아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아까의 발언을 한 소영현을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줄에 조금 떨어져 앉아있었다.

    이내 소영현과 눈이 마주쳤고 연진은 가볍게 묵례했다. 감사의 의미였다. 소영현 역시 작게 고개 숙여 답했다.

    검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시선은 다시 정면을 향했다.

    악사들의 연주는 처음엔 느릿하게 시작했다. 대열을 정렬한 채로 문생들은 각자의 칼을 박자에 맞게 발도하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허공을 가르고 베는 칼날이 예리하게 반짝였다.

    그 묵직하고도 엄숙한 자세에 보는 이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백난국의 전통 검무는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 너울을 쓴다. 은밀하게 적을 처리하는 전통적인 검술 관습이 반영된 모습이다.

    그 덕에 해월은 강석요에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문생들 사이에 잠입할 수 있었다.

    문생들이 움직일 때마다 검은 너울이 흔들리며 아름다운 선을 보였다.

    곡조가 거의 끝나갔다.

    이때 문생들은 차례대로 가운데에 서서 각자의 기술을 선보인다. 다 함께 같은 검무를 출 때는 그 우열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지만, 이 순간 하나로 하사주의 주인이 선정될 것이었다.

    “후….”

    마지막으로 해월의 차례를 알리는 악곡의 소리가 들렸다. 그는 악기 소리에 맞추어 절도 있는 움직임으로 연회장의 한 가운데 섰다. 짧게 심호흡한 해월은 가볍게 발을 굴려 도약했다. 대단히 큰 움직임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드높이 날아올라 검을 휘둘렀다.

    휘익.

    얇고 긴 장도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해월은 그 바람에 섞인 듯 검무를 이어나갔다. 다른 문생들에 비해 확연히 선이 깔끔하고 유려했다.

    ‘사부.’

    그 모습을 본 연진은 그가 바로 해월임을 확신했다. 저렇게 가볍고 힘 있는 움직임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제 사부뿐이기 때문이다.

    연진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띄워졌다. 그러자 곡조가 끝을 알리며 소리가 멎었다. 적절한 순간 해월의 동작 역시 끝이 났다.

    이윽고 흐른 짧은 정적.

    누군가는 숨을 죽였고, 누군가는 찬사를 보냈다.

    해월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흔들리는 너울 사이로 연진을 쳐다보았다.

    꼭 바라보는 서로만이 전부인 것처럼.

    ***

    하사주의 주인을 결정하려 가주들끼리 입을 모았다.

    “굳이 의견을 묻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맞습니다. 마지막 문하생이 가장 뛰어나더군요.”

    “역시 한주 강 씨의 무예는 여전합니다. 일개 문하생의 수준이 저 정도라뇨.”

    가주들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마지막 문생을 칭찬했다. 그것을 들은 연진은 속으로 안도했다.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으니 말이다.

    강석요는 문생들의 검무를 보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적절히 가주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시늉을 했기에 결정은 수월했다. 머지않아 해월은 하사주 앞에 서게 되었다.

    하사주 쟁반을 들고 있는 하인은 다름 아닌 향단이었다. 향단 또한 너울을 쓰고 있는 해월을 바로 알아보았다.

    해월이 고개를 작게 끄덕여 확인의 신호를 보냈다. 향단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윽고 향단이 물러갔다.

    해월은 합장하듯이 하사주를 양손으로 쥐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제게 이리 하사주를 내려주셔서 감읍합니다. 연회에 참석한 모든 분의 평안을 기원하겠나이다.”

    ‘이 목소리는…?’

    심드렁한 자세로 문생이 얼른 하사주를 마시길 기다리던 강석요는 자세를 고쳤다. 분명히 들어본, 그리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강석요가 무어라 입을 열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해월은 미리 엄지손에 묻혀둔 독초 가루를 술잔에 묻혔고 망설임 없이 거기다 입을 댔다.

    고민 따위는 없었다.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은 해월이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목을 넘기기 무섭게 속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식도가 쇠꼬챙이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온몸의 피가 들끓는, 기분 나쁜 감각이었다.

    “……!”

    벌써 부터 토기가 몰려왔다.

    ‘아직은 안 돼.’

    조금만 더 버티자. 해월은 그 생각만을 하며 울컥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하사주를 단숨에 털어 마신 문생을 보며 소천보가 한마디 했다.

    “그러고 보니 저 뛰어난 문하생의 이름도 묻지 아니하고 하사주부터 내렸군요.”

    소천보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제… 이름은… 컥!”

    이름을 말하려던 문생의 입가에서 후두둑 검붉은 액체가 떨어졌다. 들고 있던 술잔이 형편없이 바닥을 굴렀다.

    “무, 무슨…!”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는 선연한 홍색에 이곳에 있는 모두가 사색이 되었다. 가주들, 자제들과 문생들, 하인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에 없는 혼란이었다. 그 소란 속에서 더는 서 있기 힘들어진 해월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앞으로 쓰러졌다. 이곳에서 홀로 이성을 붙잡은 소영현이 다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서 해월에게 다가섰다.

    자세를 낮추고 술잔과 해월이 흘린 피 냄새를 살피던 소영현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는 변고를 보고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가주들에게 소리쳤다.

    “독입니다! 이 자가 독을 먹었습니다!”

    “무어라!”

    소천보가 제 아들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술잔을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모두가 같은 모양의 술잔으로 같은 술을 마시기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술잔에서 나는 미약한 향에 소천보가 기가 막힌 듯 소리쳤다.

    “술잔에 독이 묻어있소이다!”

    그 말에 가뜩이나 어수선했던 연회장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해월은 귓전을 때리는 그 시끄러운 소리에 파묻힌 듯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언뜻 들어보니 계획대로 흘러간 듯했다. 다행이었다.

    실은 연회가 열리기 전날 향단에게 부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연회에 쓰일 술잔은 꼭 네가 준비해줘.”

    “예? 술잔을요?”

    마침 향단이 연회에 올릴 식기 준비를 맡은 터라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응. 이 가루를 물에 섞어 잔에 발라두면 돼. 몸에 좋은 것은 아니니 조심해서 다뤄.”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발라 둬야 하는 술잔은 딱 넉 잔이야. 그리고 그 잔은 꼭 팔대 세가 가주 중 네 명한테만 올리도록 해.”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난다. 모든 술잔에 독을 발라두면 누가 보아도 이상하니, 적당히 강석요가 평소에 싫어할 만한 가주들 위주로 올려야 했다. 그리고 그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향단은 일을 잘해주었다.

    지금쯤이면 제가 준 금화를 가지고 도망가고 있겠지.

    독으로 고통스러운 와중에 졸음이 밀려 들어왔다. 눈앞에 소영현이 제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이보게! 정신을 잃으면 아니 되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소영현씩이나 되는 귀공자가 제 상태를 살필 줄은 몰랐던 터라 해월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그는 제가 준비한 독의 향까지 눈치챈 사람이다.

    소영현이 제게 어떤 의문을 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와중에 강석요는 해월과는 다른 곤혹을 느끼고 있었다. 연회를 준비한 장본인이니만큼 작금의 사태를 추궁당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독이라니!”

    “내, 내가 한 일이 아니오. 필시 무슨 오해가….”

    강석요는 손까지 떨며 당황했다. 말을 더듬어가면서도 변명해보려 하였으나 분노한 가주들은 제 목소리를 무시했다.

    돌아보았을 때는 혼란으로 난장판이 된 연회의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아들인 강석철은 요즘 몸이 안 좋다며 연회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이 위기를 정 씨나 문생들이 해결해줄 수도 없었다.

    심지어 모든 문하생과 하인들이 다른 가주들과 마찬가지로 절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창살처럼 몸을 꿰뚫는 것 같았다.

    “망나니 같은 놈이 여는 연회에 참석해주었더니…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절 한심하게 여겨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일은 황제 폐하께 고하겠소.”

    팔대 세가의 대표 격인 소천보가 그리 엄포를 놓자 강석요는 머릿속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그건 아니 되오!”

    황제에게 이 일이 고해졌다간 제가 가주의 자리에서 축출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배당하거나, 심지어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쿨럭.”

    이와 같은 대화들이 해월의 먹먹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제 옆에 소영현이 있다는 것이 거슬렸지만, 지금이 가장 적절한 순간이라는 판단이 섰다. 최악의 순간에 최고의 고통을 선사할 때가 왔다.

    소영현이 듣고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나 이렇게 귀한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결국 작심한 해월이 핏물에 젖어 엉망이 된 입술을 달싹였다.

    “…사령들이여 저 부덕한 자를 명도로 이끌어라.”

    한숨보다도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회장의 공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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