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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49화 (49/124)

49화

연회가 시작되기 전의 오후.

대문 사이로 끊임없이 사람과 물건들이 들어왔다. 한평생 이렇게 화려한 마차가 즐비한 모습은 처음 볼 정도였다.

대륙을 호령하는 백난국의 팔대 세가. 그 중 한주 강 씨가 주도하는 연회이니만큼, 그 규모는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장황한 연회 규모에 해월은 질색했다.

말이 팔대 세가 연회지, 중하급 귀족 가문까지 들어오는 것을 보면 연회가 초라해지지 않도록 뒷돈을 좀 쓴 모양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구색 하나는 제대로 갖췄다.

어수선한 틈을 타 노온을 만난 해월은 들어오는 수많은 가문의 인사들을 보며 말했다.

“오늘이면 끝이겠네요.”

“연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떠날 생각이시오?”

“예.”

어느 형태로든 떠나지 않을까. 죽어서 떠날 수도, 죽지 않고 제 발로 떠날 수도 있겠다.

무엇이든 별 상관은 없었다.

그 무심함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낀 노온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사실 그녀는 진작부터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와서 묻기엔 뭣하지만 하사주를 이용하여 누명을 씌우겠다는 그대의 계획…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려줄 수 있겠소?”

“저도 이제 와서 답해드리긴 뭣하지만… 하사주에 독을 섞어 먹을 생각입니다.”

충격적인 말을 하는 것과 다르게 해월은 무덤덤한 목소리였다. 되레 노온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도, 독을 먹는 시늉을 하겠다는 게요?”

늘상 차분한 노온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니요. 진짜 독을 먹을 겁니다.”

“…환시 같은 것으로 눈속임을 하는 방법도 있을 터인데 어찌 이 일에 목숨을 거시오?”

노온은 해월과 같은 유형의 사람은 처음 보았다.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 좋다면서, 고작해야 몇 달 함께 지낸 제자의 안위를 위해 목숨까지 걸다니.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노온이 황당해하든 말든 해월은 태평했다.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수십 명 정도라면 피를 토하는 척 눈속임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이 많은 사람에게 환시를 거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나의 목표물에 하나의 화살을 쏘는 것보다, 여러 목표물에 여러 화살을 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한다면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많은 인원에게 환시를 걸려면 크나큰 영력 소모가 필요한데다 그 효력도 장담할 수 없다.

사술을 쓰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사술은 자칫 잘못했다간 술법을 거는 상대가 미치광이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했다.

이리 많은 사람을 상대로, 심지어 빠른 속도로 정교하게 사술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영력이 고갈되어도, 독을 먹어도 죽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오히려 독을 먹는 쪽이 살 확률이 조금은 더 높겠군요. 그리고 기왕이면 확실한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가짜는 금세 들통나는 법이니까요.”

백난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이는 자리는 드물었다. 그 권력자들 앞에서 새로운 권력자가 등장하였음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팔가 연회뿐이다.

명분을 목숨처럼 생각하는 명문가에겐, 그에 맞는 방법을 사용해주어야 했다. 강석요를 술에 독을 탄 범인으로 몰아도,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 빠져나갈 수도 있다.

그러니 그 퇴로를 막기 위해 사술을 걸어둔 것이다. 반박하지 못하는 자에겐 의혹이 더욱 커지게 된다. 가뜩이나 품위가 없다는 이유로 강석요를 마뜩잖아하는 다른 가주들이라면, 이 기회에 그를 몰아내는데 찬동하게 될 것이다.

가주들은 자신들이 직접 나서서 강석요를 몰아내는 것은 내키지 않아 해도, 판을 깔아준다면 쉽게 올라올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착시에 시달리는 강석철이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 한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가주의 자리는 자연히 연진에게 돌아간다. 그 속에서 장로들의 지지까지 마련되면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이 난다.

이 모든 계획을 이제야 완벽히 알게 된 노온은 사과의 말을 전했다.

“…내 생각이 짧았구려. 미안하오.”

“아닙니다. 사과 마십시오. 아, 그보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 애한테는 비밀입니다.”

해월은 싱긋 웃으며 비밀을 지켜달라 당부했다.

“그리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제가 쓰러진다면, 꼭 진이를 말려주십시오.”

“무슨 말이오?”

“그 가여운 놈은 앞뒤 구분도 안 하고 쓰러진 제게 달려올 게 뻔합니다. 그리된다면 강석요에게 누명을 씌우겠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다 늙은 몸뚱이로 건장한 사내를 어찌 말리겠소.”

“하하, 그런가요.”

어쩌면 말리지 못하길 바라서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연진이 동요한다 한들 생각이란 것을 할 테니 온 가문이 다 보는 앞에서 제게 아는 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이는 정이 많아서 탈이지만 그래도 똑똑하니까.’

동요하지 말라고 그리도 타일렀는데 경거망동할 리가 없다. 설령 그런다고 해도 주위에 말려줄 사람도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때의 해월은 진심으로 알지 못했다.

그 판단이 빗나갈 것이란 걸.

***

둥둥둥.

연회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고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온갖 종류의 악기 소리가 괜히 거슬리는 느낌이 들어 해월은 귓가를 매만졌다.

게다가 그에겐 연주를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연회를 위해 꾸며진 장소의 옆에서 문생들이 검무에 쓰일 검과 복장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곳의 구석으로 들어가서 미리 점찍어 두었던, 자신과 체구가 엇비슷한 문생에게 은밀하게 다가갔다.

다른 사내들은 저마다 준비하기 바빠서, 낯선 이가 이곳에 들어왔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실례.”

“……!”

인기척을 느낀 문생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벌렸지만, 해월이 한 발 더 빨랐다.

퍽!

손날을 세워 목덜미를 내리치자 그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정신을 잃으며 고꾸라졌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싱긋 웃고는 쓰러진 사내를 구석진 뒷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문생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검은 너울까지 쓰자 영락없이 강 씨 세가 문하생으로 보였다.

‘자 그럼 이제 가볼까.’

소매에 가루까지 잘 준비해놓은 해월은 줄을 서서 이동하려 하는 문생들 틈바구니에 섞였다. 다행히 아무도 그가 숨어들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분주하기도 하고 서로 간 깊이 신경 쓸 만큼 정이 많은 군집이 아닌 탓이었다.

그때, 문생들의 우두머리 격인 대사형이 격려의 말을 했다.

“오늘은 우리 가문의 위신을 세울 중요한 날이다. 실수 없이 해내서 가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자!”

그 말을 들은 해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아주 눈물겨운 충성심이군.’

그렇게 연회장소로 가던 찰나, 멀리서 어느 사내가 문생들 쪽으로 걸어왔다.

‘누구지?’

언뜻 보기에 강 씨 세가 사람은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가문의 자제인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앞장서서 걷던 대사형이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현원 소씨 가문의 소영현 공자님 아니십니까.”

“…맞소.”

현원 소씨 가문의 공자라던 사내는 대사형의 아는 체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적당히 대화를 나눈 후 일렬로 걸어가는 문생들을 스쳐 지나갔다.

‘현원 소 씨의 소영현 공자라….’

지금 황제에게 가장 신임받는 가문의 공자이니만큼 그 위세가 어지간한 가주와 비슷한 수준이라 들었다. 연진이 가주가 된다면 저런 자와 친해져야 할 텐데. 자고로 명문가에선 인맥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소영현을 지나쳐 가던 순간, 그가 걷는 속도를 늦추더니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자네.”

“예?”

해월은 명백히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기가 무섭게 소영현이 성큼 제게로 다가왔다.

훅 들어온 소영현의 움직임에 해월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그는 저의 목 언저리에서 작게 숨을 들이쉰 후 눈썹을 까딱였다.

“…자네에게서 약방에서 맡아본 적 있는 미향이 나는군.”

해월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여기까지 와서 이토록 기민한 자를 맞닥뜨릴 줄은 몰랐던 까닭이다.

소매에 있는 독초 가루는 무미 무취에 가까우나 예민한 사람이라면 옅은 향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웬만한 사람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흐린 향이었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윽고 소영현의 시선이 제 소매 쪽으로 떨어졌다.

여기서 들키면 끝이었다.

“…그런 향이 나는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모르쇠로 일관했다.

“아니 이 향은 분명….”

소영현이 무어라 말을 보태려던 그때.

“어이 거기! 얼른 안 오고 뭐 해?”

구세주와도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해월은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묵례하며 예를 갖춘 뒤, 문생들의 뒤를 따라갔다. 스쳐 지나가면서 소영현의 얼굴엔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으나 해월은 애써 그를 무시했다.

그렇게 문턱을 넘어서 연회장에 들어섰다.

***

연회가 시작되었다.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넉넉한 웃음을 지은 채 서로 간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물론 그들 중 진심으로 서로를 걱정하는 이들은 없었다.

연회장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명당. 그곳에 자리한 자들은 당연히 가주들이었다.

대부분의 가주가 참석하지 않을 것이란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많은 가주들이 자리에 참석해주었다.

백난국을 이끌어가는 명문가들의 수장들이니만큼 위엄 있었다. 덧붙여 묘한 신경전이 난무했다. 같은 팔대 세가 중 하나라도 엄연히 서열이 존재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라 신경을 많이 쓰셨나 봅니다.”

단양 옥 씨의 가주가 묘한 어투로 연회를 칭찬했다. 악몽에 시달리던 과거가 무색하게 안색이 밝아진 강석요는 흐뭇하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당연하지요. 제 조카의 광증이 차도가 있어 오랜만에 연회에 참석하는 것인데, 숙부로서 신경 쓰는 것이 응당 도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강석요의 말이 연진을 조롱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가주들보다 조금 아랫자리에 앉은 연진은 그 말을 전부 들으면서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늘상 당하던 게 박대와 조롱이다. 저까짓 말을 못 참아 넘길 정도로 인내심이 없지도 않았거니와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 품은 이 화기를 반드시 되갚아주리라. 그리 생각할 뿐이었다.

연진은 해월이 눈앞에 나타나길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다. 검무를 출 때 너울을 써서 한 번에 알아보기란 쉽지 않겠지만, 왜인지 모르게 쉬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그의 모습을 눈에 담으면, 이 불안의 불씨가 사그라들 것 같았다.

연진은 그저 해월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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