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고맙다니… 대체 무엇이요. 저는… 사주를 받아 도련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다고요….”
향단은 처음부터 알았다. 용서받지 못할 과오라는 것을.
“네가 망설여줬으니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말이었다. 해월은 향단이 수없이 망설여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애초에 저만한 아이가 일말의 죄책감 없이 타인을 해칠 가능성은 희박했다.
“매일 네가 식사를 가져오는데, 너에게서 옅은 독초 향이 나더구나.”
“헉…!”
해월의 말에 향단은 흠칫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향단은 그간 식사에 독을 탈지 말지 망설이다 결국엔 타지 못한 채 돌아서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 독초 가루는 단 한 번도 제 쓰임을 다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잠깐 망설이며 손끝에 만졌다가 이내 씻어낸 그 독초의 향을 알아차리다니, 경이로운 수준의 예리함이었다.
“어차피 네가 진짜 독을 탔다 해도 별 소용은 없었겠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죄악감을 느낀 덕에 골치 아픈 일이 줄었잖아. 난 거기에 고마운 거야.”
“…송구합니다.”
향단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해월은 그 눈물을 닦아준다거나 위로해주지는 않았다.
“내 앞에서 빌지 말고, 빌 거면 네 가족이나 도련님한테 가서 빌어.”
그녀의 행동으로 가장 상처받았을 사람들일 테니.
“가족을 위한답시고 선을 넘으면 안 되지.”
이 말 역시 제가 하기엔 우스웠다. 기왕 우스워진 김에 더 우스운 짓을 해볼까 하여 해월은 소매에서 금화를 조금 꺼냈다.
지난날 강석요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이거 받아.”
“이, 이것은….”
향단은 망설이다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았다.
“이 돈이면 네가 가족을 데리고 어딘가에 정착하기엔 충분할 거야. 연회가 끝나면 도망가던 지 해라. 안 도망가면 네 생을 장담할 수 없어.”
“어째서….”
“말했잖아. 불쌍하고 고마우니까.”
진심으로 꺼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일 테니 변덕을 부리는 것이었다. 본래의 해월이었다면 향단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지 않던가. 저도 아마 그런 사람이리라 생각할 뿐이었다.
“아, 이걸 깜빡할 뻔했네.”
“…예?”
“긴히 부탁할 게 하나 더 있거든.”
***
연회의 전야는 점차 깊어졌다.
해월은 원복에게 부탁하여 꿀을 사와 하얀 떡에 발라 먹으며 단맛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야참으로는 단 것이 제격이었다. 귀한 꿀을 함부로 사 먹을 만큼 돈이 많아졌으니 부리는 사치이기도 했다.
그동안 연진이 부족하지 않게 재화를 주었으나, 그것들은 사욕을 위해 쓰이지 않았다. 연진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구비 하는 데 전부 사용했다.
주술과 술법에 관한 책을 어렵게 구해놓았고, 영물을 만드는 법과 사용하는 법을 써놓았다. 그 밖에도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이기적인 방법들에 대해서도.
일이 잘 풀려서 연진이 가주가 된다면 요긴하게 쓰이리라.
그 모든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숨겨놓았으니 분명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해월은 상념에 잠겨 나무 기둥에 머리를 기대었다.
‘이렇게 끝내도 되나.’
해월은 자신에게 무언가 결여 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어릴 적부터 선학경이 그리 다그쳤으니까.
제가 생각하기에도 우스울 정도로 아무런 감상이 안 들었다.
내일 연회에서 독을 삼키고 강석요에게 누명을 씌울 생각까지 하고 있는데도.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데도.
‘너무 정들어버렸네.’
연진을 위해서라면 한낱 ‘명분’이 되어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러다 못내 아쉬운 마음이 생겨났다.
‘그때 그 힘을 쓰지 않았더라면….’
죽어가는 몸이 되지도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연진과 함께 오래도록 웃고 지내는 날을 보내지 않았을까. 해월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자신은 그 힘을 쓴 일을 후회하며 조금이라도 제 삶을 살고 싶어서 떠돌이 생활을 택한 것이었다. 만일 그 일이 없었더라면 연진을 만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느덧, 가을이 가까워진 여름의 공기는 서늘했다.
몸속에 한기가 깊이 스며든 듯했다. 폐가 좋지 않아서 공기 온도에 민감한 편인데도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시원한 공기로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때, 방에서 책을 읽다 나온 연진이 회랑 끝에 있는 해월을 발견하곤 천천히 다가갔다.
“여기서 무얼 하십니까.”
“그냥… 단것 먹으면서 쉬고 있지. 너도 먹을래?”
해월이 먹던 젓가락을 들어 떡을 내밀었다. 연진은 조금 멈칫하곤 자신의 얼굴 앞에 있는 떡과 해월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뭐해, 안 먹고.”
재촉이 이어지자 연진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떡을 입에 넣었다.
연진의 입엔 너무 단 모양인지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것을 본 해월이 쿡 하고 웃음을 흘렸다. 정말이지 생긴 것과 달리 순하다니까.
“꿀떡 먹고 그런 표정 짓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자 이거라도 마시고 입 헹궈.”
해월은 곁들여 마시던 차를 연진에게 건넸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차를 바로 입에 가져다 댔다. 하지만 찻잔은 금방 내려왔고, 연진의 미간은 더욱 좁혀져 있었다.
“이건 꿀차 아닙니까.”
혀끝에서 나는 단맛이 너무 진했다. 대놓고 표정을 구긴 연진에 해월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풉… 넌 나한테 당한 게 얼만데 아직도 속아 넘어가면 어떡해.”
자신이 건네주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연진이 너무 가엾고 웃겼다. 도대체 무엇이 연진을 저리도 경계심 없게 만들었을까. 나중에 세상살이할 때 험한 꼴이나 안 보면 다행이겠다.
“…아무리 그래도 꿀차에 꿀떡을 드시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 사부가 단것을 좋아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꿀이 뭐 어때서 그러냐. 달고 맛있잖아. 그리고 꿀은 안 썩어서 몇십 년이고 두고 먹을 수 있어. 이 얼마나 이로운 음식이야.”
“이롭다고 하여도 너무 단걸요.”
연진은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는 진득한 단내에 몸서리를 쳤다. 해월은 개의치 않고 꿀떡을 먹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나중에 돈이 많아져서, 어딘가에 정착해서 살면 방 안에 함 가득히 꿀단지를 보관하고 사는 게 소원이었어.”
아마, 이제 더는 이루지 못할 소망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아주 단 꿀떡과 꿀차를 먹으면서도 쓴맛이 느껴질 정도였다.
해월은 저런 작은 일 외에 큰 소망이 없었다.
아니, 있었으나 이루어질 기미가 안 보여서 진작 포기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게 마음 편하기도 했다.
“사부.”
연진이 해월을 나직이 불렀다. 중요한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왜?”
“…제가 함께 떠나자고 붙잡으면, 그건 당신에게 곤란한 일일까요.”
반면 연진은 제 욕심을 죽이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연진은 줄곧 생각했다. 이렇게 가문이니, 가주니 하지 않고 그저 떠나고 싶다고. 그런 복잡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은 성미에 맞지도 않았고, 해월과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이 이성을 잃게 하고 본성에 깃들었다.
“…알면서 뭘 물어.”
느리게 떨어진 대답은 진심이 어려있지 않았다. 실은 해월도 연진의 말에 따르고 싶었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산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세상을 떠돌고, 그 곁엔 연진이 함께이길 바랐다. 그런데 그건 허락되지 않은 욕심이었다.
“일이 잘 풀리면 넌 가주가 되고, 난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해월은 부러 단호히 말했다. 자신은 이 일에 사활을 걸었다.
이제 와서 되돌리기엔 늦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늦게 돌아가면 아니 되는 겁니까.”
“…….”
“꼭 일이 잘되지 않더라도… 그리해주시면 안 됩니까.”
연진의 음성은 사뭇 간절했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손은 미약하게 떨고 있었다. 해월은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조금 힘을 주어 붙잡자 그의 떨림이 멎었다.
“넌… 나랑 함께해서 얻는 게 뭐 있다고 떠나자는 거야.”
“그런 것 없습니다. 그저 제가 사부와 함께 있고 싶어요.”
“너 후회할걸?”
그 말의 저의를 몰라서 연진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후회라니 당치도 않았다.
“넌 네가 불행할 때 도와준 사람이 떠난다니까 아쉽고 섭섭한 마음이 들어서, 그래서 붙잡고 싶은 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불행에서 꺼내준 이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해월은 연진이 고마운 감정을 지나치게 깊이 받아들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투성이인 세상이라지만, 연진의 말들은 지나치게 이치에 어긋났다. 가주가 될 기회보다 떠돌이 생활을 하는 스승을 따르길 원하다니. 너무 말이 안 되지 않나.
“제 마음인데 왜 사부께서 단정하십니까.”
연진은 제 결정을 송두리째 부정하려 드는 사부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간곡히 청을 하는 것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인데,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꼭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아봤으니까.”
“그래봤자 칠 년이잖아요.”
그들은 일곱 살 터울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역시 스승과 제자 관계보다는 형과 아우 관계가 더 어울리는 나이였다.
“바보야. 단순히 나이가 아니라 좀 더 많은 걸 보고 들었으니 해주는 얘기거든?”
해월은 연진의 아쉬움에 미혹되고 싶지 않았다. 연진의 말들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나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에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난 이런 사람이야.’
계속 의심하고, 의아해하고, 의문을 던질 것이다. 상대가 아무리 진심을 내보여도 말이다.
“됐고, 얼른 가서 자. 내일 연회 때 긴장하지 말고. 다른 가주들한테 잘 보여야 하지 않겠냐.”
해월은 그 한마디로 화제를 돌렸다. 연진은 그게 불만스러우면서도 적당히 응수했다.
“긴장 안 합니다. 사부야말로 긴장되지 않습니까?”
“내가 왜 긴장을 하냐. 어차피 검무를 출 때는 너울을 쓰니까 날 알아볼 리도 없는데.”
게다가 준비는 철저히 했다.
“…내일이면 많은 것이 바뀌겠군요.”
“그렇겠지.”
‘난 죽을지도 모르고.’
망설임은 없었다. 제자를 위해서 죽는다는 건 꽤나 의미 있지 않겠나. 항상 의미를 남기고 싶었던 해월에겐 어쩌면 기회였다.
처음엔 좀 슬퍼도 유수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 묻혀 감정은 흐려질 것이다. 해월은 손을 뻗어 연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연진은 전처럼 불만스러워하지 않고 가만히 머리를 내어주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해월이 정답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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