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연진은 역시나 사람 할 말 없게 하는데 재주가 탁월했다. 누군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 듯한데 이 정도면 재능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 재능도 칭찬해주는 것이 스승의 도리인가 잠시 고민이 들었다.
“뭐 어쨌든… 문생들과 하인들에게 들었는데, 연회에 온 사람들은 이런 구도로 앉게 될 거래.”
해월은 손가락으로 전체적인 구도를 묘사하며 설명했다. 연회를 코앞에서 즐길 수 있는 자리엔 가주들, 그 양옆엔 각 가문의 자제들과 문생들이 순서에 맞게 앉는다.
‘지금까지 봐온 강석요의 성격상 멀쩡한 조카를 대외적인 자리에 앉히는 것에 속이 꼬여, 필히 술을 미리 마시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규율과 허례허식을 중시하는 다른 귀족들은 거절할 것이고.’
그후 검무를 보인 뒤에 가장 뛰어난 자라는 평가를 받게 되면, 하사주를 받겠지. 그런 술에 독이 들어있었다고 한다면 그 술을 준비한 강석요가 다른 가주들을 독살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쓸 것이다.
“난 문생들 사이에 숨어들어서 검무를 출 거야. 그리고 하사주를 받을 거고.”
“검무를요? 하오나 백난국식 검술엔 익숙하지 않으시잖아요.”
연진은 해월이 제게 가르쳐주었던 검술이나 체술들이 백난국의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쯤은 눈으로만 봐도 금방 익혀. 이미 어느 정도 익히기도 했고.”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해월은 문생들의 경계를 허물고 그들을 지켜보며 일정 수준 이상을 습득했다.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터라 조금 놀랍긴 했지만 그런 것을 익히는 것쯤은 간단한 일이었다.
“믿지 않는 것은 아니나, 저희 가문 문생들의 검술은 뛰어난 수준입니다. 고작 며칠 새에 전부 터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 하나, 두고 봐 내가 하사주를 받을 테니.”
해월이 워낙 확신에 차 있는 터라 연진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못했다.
“그래서 하사주를 받으면, 난 독을 먹고 쓰러질 거야.”
“…예?”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었나 싶어 연진은 저절로 반문했다.
해월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상황을 무마할 때는 역시 그 상황 심각성에 맞지 않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는 거짓을 내뱉는 것이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설마 진짜 독을 먹겠냐. 나도 내 몸 귀한 줄 안다고. 가진 것은 이 몸뚱이뿐인데 상하면 쓰나.”
듣는 입장에선 농담 같기도, 진담 같기도 한 말이었다. 그것을 판가름하는 것은 듣는 자의 몫이었다.
“다 눈속임을 하는 방법이 있어. 장로님께서 그 뒤의 대처를 해주실 테니, 너도 그것에 맞게 행동하면 돼. 절대 동요하지 말고, 알았지?”
해월은 거듭 동요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묘한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로.
“…한데 그리해서 숙부께 누명을 씌울 수 있겠습니까.”
스승을 신임하지 않는 것은 추호도 아니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던가. 예상대로 흘러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해월은 이에 동의하지만, 그에겐 승산이 있었다.
“그럼. 본래 반박하지 못하는 자는 더욱 의심받거든. 의심을 사는 것은 간단해. 그걸 풀기는 어렵지만.”
“숙부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반박하려 하실 겁니다.”
연진은 핏대를 세워가며 반박할 숙부를 떠올리며 표정을 구겼다.
“괜찮아. 내가 가만히 있게 만들 거니까. 이미 그자한테 술법을 걸어뒀어. 아마 백난국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니 그 술법이 어떤 것인지는 그 누구도 모를 거야.”
“설마… 사술입니까.”
지난날 사술에 관해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연진이었다. 그 장본인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우스운 점이기도 했다.
“맞아. 굳이 부정은 안 할게.”
담백한 답변이었다. 해월은 사술을 쓰는 데에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영력을 다루는 자는 사사로운 술법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지만, 퇴마사로서 그리 높은 자부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솔직히 어릴 적 배운 것이 그뿐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주술의 사용을 자유롭게 허용했던 옛 나라에서도 사특한 것으로 취급하는 금술. 그것만 안 쓰면 되는 것 아니겠나. 아직 거기까지 밑바닥은 아니었다.
“가주들이 모인 자립니다. 분명 그것이 사술이라는 것을 눈치챌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들은 괜히 가문의 수장이 된 자들이 아니다. 성정은 어떨지 몰라도 각각의 능력만큼은 뛰어나기에 그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다.
결코 방심하거나 안심할 수 없었다.
“백난국은 멸망시킨 나라의 각종 사료들을 전부 태워 없애. 그 나라의 흔적을 조금도 남김없이 지워내지. 내게 사술을 가르쳐준 아버지의 나라는 망한 지 사십 년이 족히 넘었어. 그러니 더욱 그 사술을 아는 자는 없을 거야.”
해월은 이방인인 덕을 이리 볼 수도 있구나 싶었다. 이국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후에 만난 양부도 이국인, 살게 된 마을도 이방인들의 마을. 어딘가에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마치 떠도는 것이 천성인 듯했다.
그런 천성이 오늘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연진이 상황에 맞지 않게 웃는 것을 보고 핀잔을 주었는데, 그러지 말 걸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의 저 역시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 이상하게 우스운 기분이 들어서, 잇새를 악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고, 이 계획이 실패하면 연진은 물론이고 하인인 원복까지 전부 위험에 처할 텐데 어쩐지 우습다는 기분이 먼저 들었다.
표정을 감추는 데 익숙해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을 것 같았다. 해월은 간신히 웃음을 내리누르며 연진의 물음에 답했다.
“…설령 그들이 이 계획이나 사술에 대해 안다고 해도, 무얼 할 수 있겠어. 눈치챘을 땐 이미 일은 벌어지고 난 뒤일 터인데.”
뒤늦게 막아내려 한들 막지 못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니까.
그렇게 쉽게 당할 만큼 쉽게 세운 계획도 아니었다.
허점을 최대한 감추고 성공할 가능성을 최대로 키운다. 그것이 그의 계획 신조였다.
***
강 씨 세가에서 준비하는 연회가 점차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인들은 전보다 더 바빠졌고 문생들은 준비한 검무를 완벽히 해내기 위해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해월도 본격적으로 준비를 시작했다.
내일,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을 밤을 기다리며.
‘진검(眞劍)은 역시 좀 어색하군.’
영물이나 단도는 자주 쓰는 터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닌다. 그 덕에 손에 많이 익었다.
진검은 평소 쓸 일도 없고, 가지고 다니기 용이한 편이 아닌지라 그 옛날 검술을 수련할 때 빼고는 거의 들어본 적 없었다.
그래도 몇 번 휘둘러보니 금세 옛 기억이 되살아나 손안에 검이 잘 달라붙었다. 목검과는 확실히 다른 감각이었다.
곁눈으로 문생들의 검무를 보고 외운 뒤, 별채에 돌아와서 연습하는 식의 나날이었다. 마당 한가운데 덩그러니 선 해월은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에 천천히 손을 감아쥐었다.
이윽고 발도(拔刀)하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정면을 보며 팔을 뻗고, 그다음에 왼쪽을 찌르고.’
천천히, 아까 전 문생들에게서 본 것들을 복기하며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여기서 허리를 꺾었다가… 다시 한 번 찌른 뒤에….’
기억 속에 그려지는 대로 해월의 몸이 움직였다. 잔 동작이 많은 편임에도 몸짓 하나하나가 절도 있는 데다 선이 유려하여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제 몸의 반이 넘는 장도를 들고 공기를 베는 해월의 모습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자아냈다.
그 모습은 아름답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문득 자신이 영력을 내보내고 있었음을 깨달은 해월은 이내 동작을 멈추고 영력을 닫았다. 요즘 들어 제어가 잘되지 않아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제야 하오가 넘는 시각이 도래했음을 알게 된 해월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로써 준비는 끝났다. 그런 판단이 선 것과 동시에 인기척을 느끼곤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어서 나와.”
쪽문 옆에 서 있던 향단이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보아도 두려운 기색이 역력한 터라 해월은 살짝 후회가 들었다. 아무리 향단이 첩자 노릇을 한다지만 아직 어린아이다.
“부탁한 건?”
“…여기 있습니다.”
향단은 해월의 부탁으로 바깥에서 어느 물건을 구해왔다. 들키면 꽤나 곤란한 물건인지라 향단을 시킨 것이다. 강석요가 했던 방법과 마찬가지였다. 향단은 자르기 좋은 꼬리와 같았다.
해월은 향단이 내민 물건을 살폈다. 작은 주머니를 풀어헤치니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끝에 살짝 가루를 묻혀 향을 맡아보았다. 향을 통해 찾던 물건임을 확신한 해월의 입가에 미소가 띄워졌다.
“수고했어.”
이 일에 대해 함구하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향단은 영민하기에 모르지 않을 것이다.
“내일 연회가 끝나고 나면 난 떠날 거야.”
“예….”
향단은 환호해야 할지 절망해야 할지 몰랐다. 예상치 못하게 해월이 가주를 설득해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입장이 애매해진 것이다.
“그동안 네가 나를 감시하며 가주에게 보고한 일을 묵과해준 것은 그저 네가 불쌍했기 때문이야.”
“…….”
“불쌍하면 착하게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뭐… 내가 하기엔 우스운 말이긴 하다만.”
정말이지 자신이 하기엔 우스운 충고였다. 그러나 향단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지난날의 자신을 보았기에 해주는 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향단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죄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데 네 잇속을 챙기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건 그리 부덕한 행동이 아니야. 물론 넌 내 제자를 건드리려 했으니 봐줄 수 없었던 거고.”
“…….”
“세상이 좀 더 나았더라면, 너나 나 같은 아이가 더는 생기지 않을 텐데….”
그 말에 향단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제게 왜 이런 말씀을 해주시는 겁니까. 귀빈께서는 절 미워하시잖아요.”
절 언제라도 죽여 없앨 것처럼 냉랭하게 겁박했던 사내가, 지금은 자신을 측은하다는 듯 바라보며 조언해주고 있었다. 그와 가주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었는지 모르니 향단 입장에서는 더욱 헷갈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해월은 향단의 이마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아…!”
향단의 작은 이마에 금세 붉은 자국이 생겨났다. 해월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한주 땅이 최근에 정화를 못 받아서 그런가… 이 저택엔 왜 이리 멍청하고 불쌍한 녀석들이 많은 거야.”
연진도, 원복도, 향단도. 전부 가여웠다. 제가 누군가를 가여워할 처지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도 이들은 음기가 적은 땅에서 마물들에게 시달리지 않는 삶을 살았으니 저보다는 한결 낫다고 할 수 있으려나.
“그래도 고마워.”
그렇게 말하자 향단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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