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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45화 (45/124)

45화

“나는… 이미 여러 번 이 손으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끊은 적이 있어.”

방어를 위해서도, 그렇지 않을 때도 죽여보았다.

연진은 해월의 자백과도 같은 말에 일순 자세가 굳었다.

“놀랐어? 마물이나 퇴치할 줄 알았는데 사람 죽여봤다니까 정떨어지나?”

자조적인 해월의 말에 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이 떨어지다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맹목적인 믿음이었다. 그 믿음에 해월은 헛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나한테는 이제 그런 일이 특별하지 않아.”

그래서 상관없다는 것이다. 살인은 해월에게 특별하지 않은 일 중 하나였다. 무뎌진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무엇이든 처음은 이상하고 낯설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일이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 반복되고 나면 그 일은 일상이 된다. 처음의 어색함과 두려움, 그 외 갖가지 감정들은 전부 사라진다.

“처음엔 고향의 늙은 할아버님이었는데… 노병(老病)으로 괴로워하시다 곁에 있는 내 소매를 붙잡고 부탁하셨어. 제발 자기를 죽여달라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앞에 인간은 차라리 죽음을 바라게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평소엔 근엄하기만 했던 그 노인이 제 앞에서 죽음을 달라 청할 때, 그 기묘한 감각이 아직도 선했다.

“그래서 죽였어.”

더는 고통스럽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리고 단숨에.

“한 번 하고 나니 참 쉽더라. 그 뒤로도 비슷한 일이 더러 있었어. 마을 사람들도 처음엔 자신들의 부모를 죽인 나를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역병에 걸리고 나니 다들 울며 매달렸지.”

지금 생각해도 우스웠다. 먹을 것이 궁핍하여 자신들의 부모를 굶기는 일도 부지기수였던 주제에, 그 부모가 죽자 자신들의 죄책감을 전부 제게 떠넘겼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역병에 걸리자 개처럼 엎드려 손이 닳도록 비는 꼴이 정말 우스웠다.

하여 차례로 죽였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선학경이 저를 광에 가두긴 했지만.

“또 그다음엔 마을에 도적 떼가 쳐들어와서….”

제법 큰 무리의 도적 떼들이었다. 별 볼 일 없는 마을까지 약탈할 정도로 식량난이 심했던 해이기도 했다.

더 이상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 것이 싫기도 하고, 수탈이나 일삼는 자들을 곱게 보내기도 싫어서 그냥 죽였다. 말 그대로 무질서하게, 그냥 죽였다.

아무런 감각도 죄의식도 못 느꼈다. 다만 제 손이 더러워졌다는 것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해월의 말을 듣는 내내 연진은 조금 놀란 얼굴을 할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해월은 조금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역시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두었다니 끔찍하겠지. 이제라도 말해서 차라리 속은 후련했다. 저를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연진이 가여울 뿐이다.

그리고 곧이어 마주하게 될, 익숙한 비난과 경멸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 못되게 말하면 무슨 이득이라도 있습니까.”

해월은 자세를 삐끗할 뻔했다. 놀란 눈이 되어 바라본 연진은 꼭 상처받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사부는 충분히 정 붙일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리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아시겠습니까.”

아느냐고 묻는 말씨가 꼭 그리하라는 강요처럼 느껴졌다.

해월은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진은 해월의 긍정을 받아내자 더 이상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지 말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론으로 되돌아갔다.

“차라리 팔가 연회 때 다른 가주님을 설득하여 저를 돕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 높으신 귀족 나리들이 네가 가주가 되는 것을 반기지 않을 거야. 머리 나쁘고 멍청한 자가 우두머리여야 이용하기가 쉬울 테니, 너 같은 애가 가주가 되면 그들은 곤란할 거거든.”

해월도 되돌아간 화제를 굳이 바꾸지 않았다. 암묵적으로 약조한 것처럼. 이제는 서로에게 제법 익숙해진 터라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렴풋이 의중을 알 수 있었다.

“여하튼 다른 가주들은 네게 큰 도움이 안 될 거야.”

“하면 대체….”

연진은 여러 가지 전술 책을 읽어보았지만, 실전에 대입하는 것은 미숙했다. 그리고 아직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반면 해월은 아니었다. 그는 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죽음과 가깝게 지내왔다. 죽은 자의 혼령을 상대해보기도 했고, 직접 죽음으로 인도한 자들도 많았으니까.

이 손이 더럽혀졌다는 생각을 한 뒤로도 필요하다면 누군가의 숨을 끊어왔다. 이타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살인조차 선의에 의한 것이고 싶었다.

‘난 그 사람들을 편히 보내주고, 마을에 위해를 끼친 자들을 벌한 것뿐이야.’

그러니 제가 저지른 살인은 정당한 것이라고, 그렇게 되뇌었다. 사실은 그리 정의로운 이유가 아니었음에도.

해월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노인의 숨을 끊던 순간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저 ‘끝났구나’라는 짧은 감상만 들었다.

도적 떼들을 몰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까지 숨이 붙어 있던 도적 하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꺼져 이 괴물아!”

“…먼저 우리를 약탈하려 했던 당신들이 괴물 아닙니까. 왜 제게 괴물이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악! 저리 가!”

“가만히 계시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겁니다. 괜히 빗맞으면 아프잖아요.”

“이런 미친…! 사, 살려줘!”

그때 그 사내의 두 다리는 이미 잘려 나간 뒤였다. 해월은 무감한 얼굴을 한 채 소매에서 단도를 꺼내 사내의 목을 베어 완전히 숨을 멎게 했다. 그리고 돌아서자 피의 바다와도 같은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더불어 저를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까지.

썩 좋지 않은 기억인지라 해월은 짧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난 할 수 있어. 네 스승이기 전에 난 퇴마사야. 의뢰를 받으면 무엇이든 해왔다고.”

무엇이든 해냈고, 그건 앞으로도 유효했다. 숨이 다하기 전까지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의뢰의 대가를 돈으로 받지 않은 것은 처음이지만,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옳아.”

강압적으로 굴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지금은 방향을 정해주고 그 길을 따르게 하는 것이 옳았다.

***

해월은 오랜만에 노온과 마주했다.

“얼굴에 혈색이 돌아와 다행이오.”

“심려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장로님.”

노온에게는 정말 면목이 없었다. 그토록 연진을 구하겠다고 큰소리를 쳐놓고 정작 자신이 혼절했으니 말이다. 장로의 믿음을 잃어도 할 말이 없었다.

“심려는 무슨… 걱정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된 그대의 제자나 신경 써주시게.”

다행히 노온은 정말 괜찮다는 듯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가슴 한편이 안심되었다. 그녀야말로 진정한 어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신경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 애가 저더러… 함께 떠나면 아니 되겠느냐 묻더군요.”

솔직히 그 질문을 들었을 땐 망설였지마는 내심 기뻤다. 누군가가 함께 떠나자고 해주길 늘 바랐던 것 같다. 자신은 책임을 지는 처지에만 서보았지, 누군가가 자신을 책임져주는 일은 어릴 적 이후로 거의 없었다.

“해서 무어라고 대답하셨소?”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묻고 있지만, 해월은 그녀의 눈에 담긴 불안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노온은 지금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불안해하고 있었다. 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해서 앞으로의 세월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불안할 수밖에.

“그러지 않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애는 아직 남은 미래가 많으니까요.”

“…꼭 그대에겐 남은 날이 몇 없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구려.”

역시 노온은 보통 늙은이는 아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칼날을 품은 듯 예리했다. 꿰뚫리고 있다는 느낌을 간만에 받는 것 같았다.

“하하, 역시 연륜은 못 속이겠군요.”

“혹… 정녕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이오?”

‘죽을병… 틀린 말은 아니긴 하지.’

그간의 일들을 고려해보았을 때, 충분히 그녀가 그리 생각할만했다. 그 단초를 제공한 것은 해월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애매했다.

“…비슷합니다. 차라리 병에 걸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고요. 아, 이건 그 애한테는 비밀입니다. 얼마나 무거운 비밀인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노온은 그녀가 보낸 세월만큼이나 연륜 있는 인물이었다. 해월에게 없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오랜 시간을 통해 자연히 쌓이는 연륜.

그렇기에 모진 풍파를 견뎌온 그녀의 지혜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쭙잖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그녀는 이해하는 듯한 눈치였다.

“저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법이오. 내 그런 것 하나 모를 정도로 헛산 늙은이는 아닐세.”

노온은 해월이 보다 복잡한 사연을 가졌으리라 생각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 풍기는 기색 등 무엇하나 범인으로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어쨌든 제가 이리 장로님을 찾아뵌 것은 일전의 그 계획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래, 자네가 던진 미끼는 잘 물었던가.”

“단단히 물은 것 같습니다.”

아주 간결하고 은유적인 설명이었다. 덧붙이는 말들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지만.

“제 아버지는 망국의 주술사입니다. 때문에 저 역시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이 많습니다.”

백난국은 인구의 절반가량이 이민족임에도 이민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그 특징은 신분이 높을수록 더 했다. 그들의 특권의식 속에 이민족 따위는 ‘망국의 백성’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가주에게 사술을 걸어두었습니다.”

“무슨 사술 말인가.”

노온은 해월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문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라 해월은 할 말을 잃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왜 그러지?”

노온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 송구합니다. 사술을 썼다는 것에 대해 책망하실 줄로만 알았습니다.”

사술은 말 그대로 사사로운 술법이다. 그런 것을 쓰다니, 하물며 이방인이. 백 번을 책망받고 그 죗값을 치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물론 순순히 당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거니와 노온이 저를 그리 적대하지 않으리라는 확신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역시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망해가는 가문이라도 귀족은 귀족이기에, 그들의 권위 의식을 숱하게 보아온 해월로서는 신기할 뿐이었다.

그런 그의 생각마저도 노온은 눈치채고 있었다.

“늙은이라 하여 다 꽉 막혀 있다 여긴다면 착각일세. 사술을 쓰는 것이 무슨 상관이겠나. 가진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게 더 멍청하지.”

“이해해주셔서 감읍합니다.”

해월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사술을 걸었는가? 이 나라가 전쟁에 빠져있던 시절에 나도 이것저것 본 것이 많네. 이국의 주술은 참으로 다양하더군.”

노온은 허송세월한 늙은이가 아니었다. 전쟁에 참전한 적도 있었고 공적을 세운 적도 많았다. 그 과정에서 보고 들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내가 전쟁에 나가던 시절엔, 그들의 주술을 보고 생에 처음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네. 그리 강한 병사를 소유한 나라도 내분은 못 이겼지만… 손짓 한 번으로 우리 병사들의 혼을 쏙 빼놓은 적도 있었어.”

“제가 부린 주술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주술을 걸기엔 제 몸이 썩 좋은 상태가 아니라서요. 단지 나누어 괴로울 것을 한 번에 괴롭게 만든 것뿐입니다.”

다시 말해, 전쟁에 사용하는 커다란 주술은 걸기 힘든 상태일 뿐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가 결코 평범한 퇴마사가 아니라는 것을 노온은 다시금 깨달았다.

“그게 무엇인가.”

“그자의 몸엔 타인의 원념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그 원념을 풀 만한 영하를 황제 폐하께서 내려주지 않으시니 악몽과 환청에 시달리고 있더이다. 해서 잠시 그것들을 막아두었다가….”

억지로 막아둔 것이니 언젠가는 풀릴 터, 잠시 고통을 유보할 뿐 결코 치료한 것이 아니다.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괴롭도록 만들 겁니다.”

그리고 삶보다 죽음을 바라게 할 것이다.

일순, 노온은 호흡이 틀어막힌 듯 온몸이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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