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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44화 (44/124)
  • 44화

    스르륵.

    길었던 꿈이 끝나고 눈을 뜨자마자 시야를 가르는 희미한 윤곽들이 보였다. 해월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마구 뒤섞인 듯 어지러웠고 가슴속이 창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숨을 들이마시면 공기가 가시처럼 느껴져 속이 아렸다. 그렇다고 숨을 참자니 답답해서 힘들었다.

    게다가 입안에서 정체 모를 쓴맛이 나는 까닭에 신물이 올라왔다.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이리저리 끙끙 앓던 그는 겨우겨우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고작 몸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에도 엄청난 통증이 동반되었다. 고통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비명을 지를만한 정도였다.

    간신히 숨을 내리누른 해월은 문득 제 손안에 있는 온기를 느꼈다.

    그 온기의 주인은 어김없이 연진이었다. 연진이 저의 옆에 앉아 선잠을 자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간 연진이 저를 간호했나 보다.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수건과 빈 약사발이 이를 증명해주었다.

    ‘아파….’

    어찌나 손을 꽉 쥐고 있는지 도통 놓아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계속 이리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해월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진아.”

    “…….”

    “강연진.”

    두 번째 부름에서야 연진은 작게 눈을 떴다. 흐릿한 동공이 오래도록 해월의 모습을 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의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사부…!”

    연진은 해월을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혹여나 그가 불편할까 봐 감격만 할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그 마음을 안 해월은 고통을 누른 채 살짝 자세를 높여 연진의 목을 끌어안고 그의 뒷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 내 걱정 많이 했어?”

    연진은 대답 대신 해월을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아주 많이 걱정했다는 것이 온전히 느껴질 정도였다.

    낭떠러지에서 구원자를 만난 사람처럼 연진은 절박해 보였다. 꼭 매달린 것처럼 간절하게도 느껴졌다.

    “…걱정시켜서 미안. 근데 이거 진짜 별거 아니야.”

    해월은 그런 연진을 안심시켜주고 싶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각혈한 것이 별 게 아니면 대체 무어가 별일인 겁니까.”

    연진은 해월을 품에서 살짝 떼어내고 불만스레 물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지.”

    “각혈은 위험한 증상입니다. 설령 죽지 않는다고 해도 아픈 것은 매한가지고요.”

    “괜찮아 나 맷집 좋아.”

    “그런 얘길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사부께서 천하장사라 하여도 위험한 건 위험한 겁니다.”

    “아, 몰라 몰라. 골 아프니까 잔소리하지 마.”

    해월은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연진은 물러나 주지 않았다.

    “또 대화를 피하려 하십니다.”

    “네가 자꾸 잔소리하니까 그렇지. 내가 그런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잖아.”

    “사부는 좀 들어도 됩니다.”

    “뭐?”

    해월은 황당한 마음에 반문했다.

    “혹시 무슨 병에 걸리신 것이라면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보겠습니다.”

    “감동적이긴 한데 진짜 병 같은 거 아니야.”

    정말 사실이었다. 그저 죽어가는 것이지, 병은 아니었으니까. 확신 어린 대답에도 연진은 의문을 거두지 않았다.

    “만성적인 병이라 고치기 어려운 겁니까. 그런 것이라면 다른 지방에 가서라도 명의를 찾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니야. 이건 그냥….”

    과거 크나큰 힘을 무리해서 쓴 대가로 죽어가는 것뿐이다.

    정확히 일 년 전부터 이런 증상이 있었다. 딱히 피곤하지 않은데도 코피가 빗물처럼 흐르고, 이따금 각혈을 했다.

    “좀 무리해서 그래.”

    “거짓말을 하려거든 조금 더 성의있게 하십시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자 할 말이 없어졌다. 제가 생각해도 성의 없는 거짓말인지라 더욱더 할 말이 없었다.

    “자세히 설명하기는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이건 진실이야.”

    연진은 제 건강이 미령하다 정도는 생각할 수 있으나 아마 죽음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어쩐지 더 속이는 꼴이 되어 죄책감이 일었다.

    “정말 괜찮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고.”

    해월은 연진의 양 뺨을 감싼 채 당부했다.

    그럼에도 연진의 눈에선 걱정이 떠나가질 않았다. 해월은 자신이 늘 연진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연진은 해월의 앞에서 언제나 지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줄곧.

    “…알았으니 어서 쾌차하십시오.”

    “나 멀쩡해. 이만하면 쾌차한 거야.”

    “방금 깨어난 사람이 무슨 쾌차입니까!”

    연진이 화를 내듯 소리치자 해월은 몸을 움츠렸다. 그가 이토록 언성을 높이는 것은 거의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이크, 너 목청 되게 좋다.”

    “실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예, 예. 알겠습니다, 도련님.”

    ***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해월은 입속에서 단 과자를 굴리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탕약의 잔향 탓에 혀끝에서 나는 쓴맛이 제 속을 괴롭게 했다. 그래서 볼멘소리를 내자 연진이 빠르게 과자를 준비하여 제게 가져다준 것이다.

    해월을 보고 덩달아 미소 짓던 연진은 제가 했던 불순한 짓이 떠올라 급격히 낯빛이 굳었다.

    해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저… 그것이….”

    “뭘 그리 당황해. 너 나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농담하듯 물었는데 연진은 말문이 막힌 듯 답을 하지 못했다. 이에 해월은 피식 웃었다.

    “진지하기는… 농담이다. 이놈아.”

    다행히 해월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듯하여 연진은 반쯤 안심했다. 아무리 필요에 의한 행위였다지만, 의식을 잃은 사람을 상대로 사욕을 채운 것 같아 죄악감이 느껴져서였다.

    그런데 해월이 뜻밖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탕약 때문에 그러지?”

    연진의 낯빛이 싸늘히 굳었다. 설마 의식이 있었던 건가. 하긴 꿈을 꾸듯 몽롱한 상태이더라도 어느 정도 감각은 느껴졌을 터였다.

    “그, 그게….”

    연진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탕약 때문에 그런 거 맞잖아. 아니야?”

    정곡을 찔린 터라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이야기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 해월이 말을 덧붙였다.

    “내가 탕약 싫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억지로 먹이냐.”

    해월은 머리맡에 있던 탕약 사발을 가리키며 징얼거렸다. 물론 장난스러운 행동이었다.

    “아….”

    맥이 풀린 연진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그대로 해월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갑작스레 제 어깨에 기대어오는 연진 탓에 해월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왜 이리 갑자기?”

    일단 반사적으로 연진의 머리를 쓸어주었지만 뜬금없는 행동에 당황스럽긴 했다.

    “…송구합니다.”

    “하여튼 농담을 못 하겠네. 그냥 해본 소리야.”

    해월은 탕약을 왜 먹였냐는 자신의 장난스러운 말을 연진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과하는 줄로만 알았다.

    연진은 미안한 마음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물론 그 마음을 해월이 알 턱이 없었다. 그저 연진이 괜한 어리광을 부린다 생각하여 등을 토닥여줄 뿐이었다.

    스승과 제자의 동상이몽이었다.

    연진은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부께서 혼절하여 의식이 없으셨을 때, 장로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그분이 오셨단 말이야?”

    “예.”

    “하….”

    해월이 길게 탄식했다. 장로가 아직 저를 못 미더워할 수도 있는데 혼절하여 연진에게 간호받는 모습이나 보이다니, 듣던 중 최악의 소식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지나간 일을 찢어진 옷을 바느질하듯 고칠 수는 없었다.

    “그보다 사부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

    “사부께서는 어째서… 저를 도우려고 하는 겁니까. 위험하잖아요.”

    해월은 이런 연진의 생각을 알고 있다. 자신도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니까. 명료하게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가는 대로 문장들을 내뱉었다.

    “…내 제자니까.”

    “…….”

    “이런 나라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든 게 너니까. 그래서 돕는 거야.”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였지, 힘이 되는 존재였던 적 없었다.

    연진이 처음으로 알려주었다. 물건처럼 필요에 의해 쓰이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가 진심으로 원하여 곁에 두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

    “…….”

    “더 필요하면 얘기해줄게.”

    “…아뇨, 그거면 됐습니다.”

    완전히 수용하진 못했으나 어느 정도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연진은 해월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제게 다정한 사람이 가진 결핍 따위 오히려 특별함처럼 느껴졌으니까.

    해월은 연진을 바라보며 싱긋 웃은 뒤,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그럼 나도 너한테 물을게. 내가 네 숙부를 죽여도… 그로 인해 네 가문이 망하게 되더라도 괜찮아?”

    아주 단도직입적인데다 적나라한 질문이었다. 방금의 온화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차게 식는 것 같았다. 해월은 연진과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아쉬웠고, 하여 솔직하기로 작심했다.

    다른 가문의 가주들도 여러 이유로 종종 급사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가문은 무너지지 않는다. 후계자가 존재하고, 그 후계자가 제대로 된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연진의 숙부를 죽이면 가주의 자리가 순식간에 비게 된다. 아직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이 가문의 실질적인 후계자는 강석철이다. 연진이 아니었다.

    때문에 가주의 자리가 비게 된다면 자연히 강석철이 가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부자를 둘 다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눌러놓거나 혹은 죽여야 한다. 해월은 후자의 방법을 택하고 싶었다.

    확실하고, 빠른 것이 좋으니까.

    “…저도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제가… 이 일에 가담하면 안 됩니까.”

    “그건 안 돼.”

    해월은 단호히 거절했다.

    “어째서요.”

    그 단호함에 연진은 자연히 반문했다.

    “그들이 죽으면 가장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

    “본래 높으신 분들이 급사하면 그 사람을 가장 원망하거나, 그 사람을 죽여서 가장 큰 이득을 얻는 사람이 의심받지. 그리고 그건 너야.”

    연진의 진심이 어떠하든, 진실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전부 그가 숙부와 그 아들을 죽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설령 한 번은 위기를 넘긴다 해도 그 뒤로 낙인처럼 구설이 나돌 것이다.

    “숙부님에게 원망을 품은 이들은 저 말고도 많습니다.”

    강석요 부자가 저지른 패악질은 셀 수 없이 많았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살해하고 싶을 만큼 원한을 품은 자도 수가 꽤 되겠지.

    “그들이 아무리 원망해봤자 대외적으로는 네가 가장 원망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물론 실제로도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사부의 방법은 위험하잖아요.”

    “내가 어떤 방법을 쓸 줄 알고?”

    “그건….”

    몰랐다. 연진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해월은 이 일에 대해 언질은커녕 최근까지는 티도 안 냈으니까.

    “내가 너를 가르친 순간부터 이미 손댄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은 돌이킬 수 있잖아. 사람을 직접 죽이는 것과 그저 방관하는 것은 달라.”

    퇴마사 일을 하면서 마물들만 물리쳐왔다고 판단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세상은 해월에게 가혹했다. 해서 마찬가지로 가혹하게 세상을 대했다. 그런 끔찍한 사실들을 연진은 모른다.

    “나야 이미 손을 더럽혔다지만 너는 아니잖아. 혈육을 죽이는 짓을 직접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제게 혈육이라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 파렴치한 족속들을 혈육이라 부르고 싶지 않은 연진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섞여 버린 피를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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