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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43화 (43/124)
  • 43화

    원복은 해월을 걱정하며 향단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피를 토하셨다고?”

    “그래 벌써 사흘째인데 아직도 안 깨어나셔.”

    “…그렇구나.”

    담담하게 답했지만 보고할만한 쓸모 있는 소식을 발견한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응? 지금?”

    “도련님한테는 네가 잘 말해줘.”

    “어? 어… 알겠어.”

    뛰어나가려던 그때.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있었다. 길게 우뚝 선 그 그림자는 형용하기 어려운 위압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잘 말해둘 필요 없다. 방금 다 들었으니.”

    “도, 도련님.”

    향단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란 것은 그녀뿐이었다. 원복은 그보다는 해월의 안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도련님. 귀빈께서는 깨어나셨습니까?”

    원복의 질문에도 연진은 딱딱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의 눈은 명백한 적의를 품은 채 원복의 뒤편에 있는 향단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 아이가 나를 죽이러 온 첩자라… 사람을 무시하는 것도 정도껏이지.

    “지금 이 시간부로 너희는 이 별채에만 머물도록 해라. 절대 밖으로 나가선 아니 될 것이다.”

    냉기를 가득 머금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넌 끼어들지 마라.”

    전에 없이 엄한 목소리로 명하자 원복은 당황스러웠다.

    “도련님…!”

    “그럼 그리 알고 당분간 나가지 말거라.”

    자신이 모시는 윗사람이긴 하지만, 한 번도 강압적으로 명을 내린 적은 없는 터라 원복은 혼란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도련님! 무슨 이유라도 설명해주십시오!”

    “끼어들지 말라 하였다.”

    “하오나…!”

    “아무리 너라도 봐주는 것엔 한계가 있어. 알아들었느냐.”

    평소 그가 내던 무던한 음성과는 사뭇 다른 날카로운 억양이었다. 이에 원복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째려보는 연진의 강렬한 시선에 향단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늘상 무심한 눈이었던 도련님이 제게 보이는 명백한 적대감에 소녀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해월이 연진에게 자신이 첩자라는 것을 전하진 않았을 테고, 혹시 눈치챈 것일까. 그 답을 읽으려 연진의 안색을 살펴본 향단은 더욱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해월이 제게 한 적 있는 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를 죽일 것 같은 그 눈이었다.

    ***

    노온은 걱정을 품고 별채의 쪽문 앞을 서성였다.

    지금 가문 내에 둘째 공자가 정말 미쳐서 의원을 데려왔다느니, 죽을병에 걸렸다느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져있다. 이대로 가다간 가주에게만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그 퇴마사는 어디서 무얼 하는 게야.’

    생각해보니 그 퇴마사가 보이질 않았다.

    만일 둘째 공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거든 그녀에게 보고할 가능성이 큰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노온의 시름은 깊어졌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면 사람을 보는 눈이 자연히 늘어난다.

    ‘영민하고 속내를 알기 어려운 자일 뿐, 결코 배신할 자는 아니야.’

    그렇다면 이 흉흉한 소문들을 내버려 두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때, 문 너머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문이기에, 노온은 뒷짐을 진 채 문에 귀를 대 그 소리에 집중했다.

    “흑흑….”

    공자나 퇴마사의 울음소리라기엔 지나치게 앳된 감이 있었다. 문득 별채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자를 모시는 소년 하인이 생각난 노온이 입을 열었다.

    “게 누구 있느냐.”

    “…누구십니까.”

    “이 가문의 장로다.”

    “장, 장로님이요?”

    “그래, 혹여 문을 열고 얼굴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

    “하지만… 도련님께서 나가면 아니 된다고….”

    원복은 아까 연진이 제게 서슬 퍼런 목소리로 명령한 것이 서운해 울고 있었다.

    한데 원복의 말에 무언가 깨달은 듯, 그녀의 주름진 눈매가 한층 가늘어졌다.

    “괜찮으니 어서 문을 열어다오.”

    “그렇지만 도련님께서….”

    “내가 다 책임지겠다. 공자가 어째서 그런 명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억지를 부렸다고 하면 너를 탓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서 열어다오.”

    원복은 살짝 벌어진 문틈으로 장로의 얼굴을 확인한 뒤 완전히 문을 열었다. 노온은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구나. 내 공자께는 잘 말해 둘 터이니 걱정 말아라.”

    “…예.”

    노온은 소년을 덩그러니 두고 빠른 걸음으로 별채 내부를 살폈다. 구경을 위한 행동은 아니었다.

    노온은 이곳저곳 방을 돌아다니며 문을 열었다.

    그러다 가장 안쪽에 있는 문을 연 순간, 공자와 눈이 마주쳤다.

    “장로께서 어찌 여기에….”

    “공자야말로 대체 어찌 된 게요.”

    몇 년 만에 제대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 치곤 두 사람의 반응은 꽤나 단조로웠다. 노온은 재빨리 방 안을 살펴보았다.

    누워있는 퇴마사는 하얀 낯빛을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노온은 해월에게 다가가 이불 안에 있던 손을 빼내어 맥을 짚어보았다.

    조금 희박한 맥이지만 뛰고 있기는 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공자를 쳐다보았다.

    “이게 다 어찌 된 일입니까 공자.”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연진은 대놓고 고개를 돌렸다.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 뜻을 알아챈 노온은 속으로 회한에 젖었다.

    “…나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알겠으나 그리 피하지 마시오. 난 여기 누워있는 자에게 책임이 있는 사람이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대체 무얼… 설마 이 자가 공자에게 말했단 말이오?”

    노온의 목소리가 대뜸 높아졌다. 해월과 분명 비밀에 부치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소리 낮추십시오. 제가 억지를 부려 마지못해 일러주신 것이니 이분을 탓하지도 마시고요.”

    “하… 이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한 것일까. 답을 해줄 사람은 그녀의 속내도 모른 채 잠이 들어있었다.

    “장로님께서도 저와의 대화가 불편하시다는 것은 압니다. 하오나 묻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서로에게 별다른 악의는 없으나 그렇다고 호의도 없는 사이였다. 그렇기에 편하진 않았지만, 연진이 물을 곳은 노온뿐이었다.

    “…무엇이든 말씀해보시오. 대답해 드릴 터이니.”

    노온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사부께서 갑자기 각혈을 하고 쓰러지셨는데 벌써 사흘째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의원도 별 이상이 없다 하였고요.”

    “그리된 것이었구먼.”

    이제야 앞뒤가 들어맞았다. 아무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온에게 중요한 것은 연진의 안위였기 때문이다.

    “대답부터 해 주십시오. 혹시 이분이 쓰러진 것이… 숙부님 때문입니까.”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오. 가주의 편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소.”

    “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

    “내 확신이 아니라 여기 누워있는 이 자의 확신이오. 당분간은 해코지하지 못할 것이라 하였소.”

    “…그럼 대체 무슨 이유로 쓰러진 것이란 말입니까.”

    연진은 매 순간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항상 건강해 보이는 해월이 이따금 아픈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의아함을 비롯한 답답함 때문에 괴로웠다.

    “말하지 않은 지병이 있거나, 다른 사정이 있어서겠지.”

    “지금 그런 것으로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혹여 깨어나지 않는다면….”

    최악의 상황만 떠오르게 되었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지 않을까, 저 호흡소리가 멈추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고 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강인한 자이니 그리 쉽게 죽진 않을 것이야. 지금은 지켜보는 것밖엔 방법이 없소.”

    혹여 자신이 했던 질문이, 부탁이 부담되었던가.

    함께 떠나자고 했던 말에 곤란한 듯 보였던 해월의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자신의 부탁을 늘 들어주던 그였는데, 그 부탁만큼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말을 돌리던 그 모습이 기억에 밟혔다.

    ‘나 때문인가.’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황에선 부질없는 질문만 계속하게 되었다.

    이런 무력함과 분노를 생에 그 어떤 때에도 느껴본 적 없다. 어디를 향한 분노일까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제가 진작 벗어났더라면… 이런 일이 안 생겼을까요.”

    상황에 맞지 않는 미소가 그의 입가에 띄워졌다. 자조적인 의미였다. 너무 화가 나서 되레 웃음이 나왔다.

    자신을 향한 분노인지, 숙부를 향한 분노인지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제 마음에 적의가 깃들었다는 것이다.

    ‘당하고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 모든 만행으로부터 눈을 감고 체념해온 것은 저의 숙부가 제 사람을 건드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람과의 인연을 만날 기회도 주지 않긴 했었지만.

    우연히, 그리고 감사히 찾아온 이 인연을 해친다면, 그것만큼은 눈감아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맹렬한 감정이었다. 묻어두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범람하여 온몸을 적셨다. 전신의 근육이 작게 떨려왔다.

    ‘어떻게…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사부처럼 날쌘 몸을 가진 것도, 강인한 능력을 갖춘 것도 아니다. 자신은 지금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침전할 수만은 없다.

    가슴속의 이 화기를 속으로 삭이고 싶지 않았다. 이 불씨로 그를 괴롭게 하는 모든 것을 태워내고 싶었다.

    “이, 이것은….”

    노온은 주위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예순 평생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저 조용한 분위기 탓에 느껴지는 착각은 아니었다.

    확실히 공기가 희박했다. 숨쉬기 버거울 정도였다.

    “공…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온이 연진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해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내가 바뀌어야 해… 내가 바뀌어야….”

    “공자!”

    강한 부름에 그제야 노온이 자신을 불렀음을 깨달은 연진이 고개를 돌렸다.

    노온은 연진의 눈에 확연히 깃들어있는 감정을 느꼈다.

    바로 복수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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