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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42화 (42/124)

42화

꿈속은 엄혹한 칠흑의 색이었다.

그 암흑은 두려움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안에서 또다시 어린 자신을 발견한 해월은 이제는 우습지도 않은 기분이 되었다.

그저 태연하게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쳐다보았다.

내가 나를 본다는 건 꽤나 소름 끼치는 일이었지만, 제겐 이제 대수롭지 않았다.

“…우리 구면이지? 아 구면이라고 하기도 뭐한가. 어차피 다 나인 것을.”

“이제 인정했구나.”

어린 해월이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해월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거? 그런 건 네가 안 나타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어.”

“그럼 지난번엔 왜 그랬어? 내 목을 졸랐잖아. 그래봤자 아무것도 안 바뀌는데.”

“글쎄다. 뭐였을까… 인정하기 싫기도 했고, 그냥 이렇게 서서히 죽으나 내 손으로 죽으나 똑같으니까.”

마음 한구석엔 일찍이 자진(自盡)을 하고픈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어떤 방식으로 죽든 죽는다는 결말은 다 똑같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길 잘했단 생각이 든다. 일찍이 죽었더라면 연진을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원망 안 해? 네가 죽는 이유가 병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잖아. 모든 원독을 쏟아부을 사람이 여직 살아있는데 이렇게 허송세월할 거야?”

허송세월. 어린 해월은 그간 제가 보냈던 시간을 단 네 글자로 모아 별 볼 일 없는 것 취급했다.

아주 조금, 기분이 나빴다.

“…모르겠어.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또 맞는 것 같기도 해.”

저는 그저 평범한 안정을 바랄 뿐이다.

“근데 내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기엔 너 참 기분 나쁘다. 왜 하필이면 어릴 때 모습이래.”

“…자기한테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

어린 자신이 핀잔을 주었다.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네. 네 모습이었을 때의 나는 항상 미련했으니까.”

“매일같이 아버지에게 혼이 났잖아.”

“…맞아.”

여러 이유로 혼이 났었는데 지금 떠올려보자면 거의 기억 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하기 싫은 것이지만.

***

빗길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연진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해월이 쓰러졌다는 사실 앞에 전부 무용한 것이었다.

급히 데려온 의원이 부디 그를 치료할 수 있기를, 연진은 간절히 바랐다.

의원이 당도했을 때 해월은 이미 혼절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흔들어 깨워보려 해도 또 악몽을 꾸는 모양인지 미간을 좁힌 채 도무지 의식을 찾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의원이 그의 손목을 짚으며 맥을 가늠해보았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병명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각혈을 했네. 이게 병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인가.”

연진은 따지듯이 물었다. 의원을 탓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이 오갈 데 없는 화를 풀 수가 없었다.

“하오나 다시 맥을 짚어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나이다.”

의원 역시 꽤나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의원이 보기에도 해월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지만, 진맥의 결과는 건강한 사람과 크게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럴 수가….”

연진은 허망한 눈으로 해월을 쳐다보았다. 걱정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눈을 감은 사부의 모습은 참으로 고요했다.

꼭 시린 달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깨어있을 때는 꼭 햇살 같던 사람이었는데 이리 보니 밤하늘의 달 같은 사람이었다.

“우선 속을 다스리는 탕제를 준비했으니 먹이도록 하십시오.”

의원은 그 외에도 몇 가지 주의할 점을 일러두고 난 다음 자리를 벗어났다.

방안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언뜻 보면 잠이 든 것 같은 해월이,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본래도 눈처럼 흰 피부를 가진 터라 살짝 창백해 보일 때가 종종 있었는데, 이리 혈색 없는 모습을 보니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늘 실없이 웃던 사람인지라 표정 없는 얼굴이 낯설었다.

천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주고, 머리맡에 있던 탕약을 가까이 들고 왔다.

“탕약 마시는 것을 안 좋아하신다는 것 압니다.”

“지금 드시기 힘든 상태라는 것도 알고요.”

의식을 잃은 터라 탕약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드셔주십시오.”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해월이라면 분명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을 터이다. 걱정 많은 성격 좀 고치라며 지청구를 주었을 것이고. 연진은 그 모든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꾸중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그리 말한 뒤 연진은 수저로 탕약을 조금 떠서 그의 벌어진 잇새에 약을 흘려보냈다. 해월은 약을 삼키지 못하고 작게 기침만 내뱉었다.

“콜록, 콜록.”

“약을 넘기셔야 합니다.”

그를 끌어안아 제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게 한 뒤 탕약을 먹여주어도 소용없었다. 약을 삼키지 못해서 애꿎은 입가에 탕약이 흘러내렸다.

“하아….”

딱히 묘수가 떠오르지 않자 연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으니.

연진은 해월을 바라보며 잠시간 망설였다. 이 방법을 택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결국, 결단을 내렸다.

“…나중에 혼내셔도 좋으니 이번 한 번만 허락해주십시오.”

연진은 제 입에 약을 머금고 그대로 해월의 입술에 입을 포개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놓치지 않고 틈 없이 맞붙였다.

잇새로 약을 흘려보내자 조금 힘겨운 듯하지만 약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확인한 연진은 재차 약을 머금고 해월의 입술 속으로 흘려보내 주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니 탕약 사발은 빈 그릇이 되었다.

연진은 해월의 등과 머리를 받치고 조심스레 다시 보료 위에 눕혔다. 체구가 작은 해월인지라 이불 안에 쏙 파묻힌 것처럼 되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진은 푹 고개를 숙였다. 해월의 코앞에서 멈춘 그의 고개는 그대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연진의 시선은 해월의 머리칼부터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보드라운 결을 가진 그의 짧은 머리칼은 독특하고, 또 신비롭게도 느껴졌다.

피부 결 역시 비단처럼 고왔다. 한 번 이 뺨을 만졌을 때 몇 번이고 쓸어주고 싶었을 정도로 중독적이기도 했다. 작은 콧방울과 그 밑에 자리한 입술은 그 무엇보다 부드러운 것이었다.

의식을 잃은 사람에게 감히 이런 짓을 해도 되는지 문득 배덕감이 밀려왔다.

연진은 숨결이 닿는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갔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인데 마치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침내 연진은 해월의 둥근 이마에 제 입술을 묻었다. 그는 해월이 단 과자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중독적이니 말이다.

“아프지 마십시오, 사부.”

아픈 사람을 보는 일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연진은 통곡과도 닮은 당부를 했다.

***

정 씨를 통해 유명한 무당을 별관으로 불러온 강석요는 제 팔목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솔직히 천한 퇴마사에 이어서 천한 무당을 불러들인 것이 못마땅하여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하니 무당은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그 퇴마사가 주문을 걸어두었는데 어떤 주문인지 설명해 보아라.”

“예, 알겠습니다.”

무당은 특유의 힘이 실린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에도 강석요의 의심은 풀리지 않았다.

“제대로 된 주문이 맞긴 한 것이냐.”

“이제부터 살펴보면 될 일입니다.”

무당은 강석요의 팔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평온했던 그녀의 두 눈이 세차게 흔들린 것은 얼마 가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이건….”

“대체 무엇이길래 그리 놀라느냐.”

강석요는 짐짓 겁을 먹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두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 퇴마사가 주문을 건 뒤로 확실히 악몽과 환청이 사라지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두려움을 잠식시켜주듯 무당이 입을 열었다.

“이 주문을 걸었다던 퇴마사… 상당한 실력자입니다. 이리 복잡한 술식을 영물을 사용하지 않고 걸 수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는 경우입니다.”

무당은 적지 않게 놀랐다. 이런 수준의 술식을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단신의 몸으로 단숨에 걸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무당의 판단을 온전히 알 리 없는 강석요는 제게 중요한 것만 확인하려 했다.

“…이로운 술식인 건 맞는가?”

“예. 지금은 쓰이지 않는 이국의 고대 주술 중 하나로, 악몽을 쫓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험이 있나이다.”

무당조차 고서에서나 겨우 접했던 것이었다.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몰랐다. 한데, 이런 실력자가 아직 살아있다니.

“그 퇴마사는 혹 이국인 출신입니까.”

무당이 묻자 정 씨가 대신 답했다.

“그런 듯 보이오. 눈동자가 아주 음침한 흑청색이었소.”

정 씨는 강석요를 의식해서 해월을 헐뜯는 말을 했다.

“…그렇군요.”

최근에야 조금 나아졌지만 백난국은 대대로 이국인을 박대해왔다. 하물며 강한 힘을 가진 이국인은 어떻겠는가. 이런 수준의 술식을 쓸 줄 아는 자들은 지금쯤 죄다 저승에 있을 터인데, 무당은 간만에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듯했다.

당연하게도 그것을 강석요가 알 리는 없었다.

“그 천한 놈이 의외로 순순히 굴었구나.”

“돈에 눈이 먼 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화를 그만큼이나 가져갔으니 당연히 고분고분해야지요.”

정 씨가 굽신거리며 강석요의 비위를 맞추었다.

“자네 말이 맞아. 눈엣가시 같았던 놈이 이리 쉽게 변절할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이리할 것을.”

강석요는 자리에 없는 해월을 대놓고 조롱했다. 실은 그런 앳된 외양의 사내 앞에서 움츠러들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깟 천한 퇴마사 따위 이용하고 버리면 그만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수단으로만 쓰면 되는 것이다.

평생 비교당해야만 했던 죽은 형. 그의 아들인 연진에게 결코 가주의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었다.

강석요는 자신의 조카를 경멸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항상 측은하게 바라보았던 형을 닮은 그 무심하고 정직한 눈이 싫었다.

그래서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짓밟고 싶었다. 그것이 형보다 못한 반푼이 소리를 듣고 자란 자신에게 주어진 마땅한 보상이라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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