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여름이 깊어질수록 하늘이 흐려졌다. 백난국의 여름은 습하고 또 더웠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싶더니, 꼭 맞춘 것처럼 비가 내렸다.
하늘이 우는 듯한 물줄기를 가만히 보던 해월은 이내 손을 뻗어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아보았다.
톡톡.
손에 닿자마자 미세한 소리를 내며 흩어지는 물방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작은 손안에 차츰 물이 고였다. 손을 털어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먹구름이 가득한 잿빛의 하늘이었다.
“올해는 풍작이어야 할 텐데.”
수년 전, 풍수해와 가뭄이 반복되는 대기근의 해에 해월은 고향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홑몸으로 제를 올렸었다. 수십 명의 영하가 모여도 그만한 제사는 올리기 힘들었으나, 해월은 혼자서 해냈다.
물론 희생의 대가는 크게 치렀다. 그 뒤로 제 삶이 뒤바뀌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
“괜찮아.”
습관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말뿐이라도 괜찮을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거짓이라도 좋았다.
누군가 제 선택을 손가락질해도 좋다. 이기심이라도 없다면 저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타인의 이해를 바라지는 않았다.
이해받지 못할 것을 설명하는 것만큼 구차한 것은 없다. 차라리 이상한 사람이라 손가락질받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자신을 이해하는 자가 나타나길, 그리 바랄 뿐이다. 이 정도 욕심쯤은 제게도 허락되지 않을까.
괜스레 속이 쓰렸다.
“나 이상한 사람 맞다니까….”
저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다정한 사람이라 말하던 연진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빗소리에 섞여 희미하게 들렸다.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이 소리가 선명히 들려서 그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아….”
그렇게 한숨 쉬고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제 곁에 서 있는 연진의 모습이 보였다. 조용한 성격 탓인지 그는 인기척이 없었다. 해월은 평소 기민한 편이었지만 이렇게 사색에 잠길 때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곤 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그리 미안한 얼굴로 계실 거면 그런 말은 왜 했던 겁니까.”
“…누가 그런 얼굴이라고.”
말은 그리하면서도 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왜 항상 솔직하지 못한 겁니까.”
“그건….”
“솔직하기로 약조해놓고 늘 어기고 계십니다.”
“…미안.”
“그 말 들으려고 온 것 아닙니다.”
연진은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으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해월과 대화를 하고 싶었다.
해월은 미안하다는 것 외에 떠오르는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는 몰라도 그냥 제게 말씀해주세요. 숨기는 기분이 싫으시다면서 왜 계속 숨기는 겁니까.”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게 겁나서.”
두려움이란 감정엔 이골이 난 터라 나중에는 죽음이 목전에 다다라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새삼스레 두려움이 느껴졌다.
부득불 눈앞의 연진에게 끔찍한 사실을 고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면 제가 상처받을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정말 괜찮겠어?”
아무리 강인한 성정이라도, 그 마음에 조금의 상처가 안 날 수 있을까.
“괜찮습니다.”
단단하고 견고한 음성이었다. 조금의 흔들림도 찾기 어려웠다. 그 우직한 자세에 해월의 마음이 풀어졌다. 해월은 몇 번을 입을 열었다 닫길 반복하며 망설이다 이내 결심하였다.
“…네 숙부가 널 죽이려고 해. 난 그걸 막을 거고.”
이리도 간단한 것을 무엇 때문에 그리 빙빙 둘러댔었는지. 허무감이 밀려왔다.
“…그런 거였군요.”
왜라는 간단한 반문조차 하지 않은 연진의 태도로부터 그가 얼마나 체념하고 살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감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다.
해월은 두려운 마음을 품고 제자의 낯빛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엔 어떤 감정이 있을까.
조금 서글픈 낯빛이었다. 무덤덤해 보이지만 그 안의 상처를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떤 단어를 골라, 어떤 음성으로 말을 해야 할지, 찰나의 순간 고민했다.
그리고 해월은 이내 연진에게 다가가 그를 껴안았다.
“저는 괜찮….”
“괜찮다고 하지 마.”
괜찮다고만 말하는 사람의 속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건 괜찮지 않은 것이다. 해월은 잠시 숨을 죽였다. 그리고 너른 등을 쓸어주며 작은 위로를 건넸다.
이런 쪽으로는 언변이 좋지 않은 터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설 차례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어. 그래도 되니까.”
“…….”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막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무의미한 삶을 다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결의가 부담될까, 해월은 말을 아꼈다.
빗소리에 마음이 묻혀 흘러내렸다.
서로의 품에서 떨어진 그들은 나란히 앉아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월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이 일에 제가 큰 위험을 부담하고 있다는 것은 제외한 뒤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니까 일단 향단이는 가까이하지 않는 게 좋아.”
“…그렇군요.”
겉보기로는 쉽게 수긍하는 듯 보이지만 연진이 혼란스러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해월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당연하지만 원복이한테는 비밀이야. 순진한 애니까 지켜줄 건 지켜줘야지.”
외사랑을 하던 소녀가 살인 모의에 가담하다니 정말 복도 없었다.
“넌 내가 지켜줄 거고. 내가 떠나더라도 그 누구도 널 위협할 수 없게 할게. 이것만큼은 약조할 수 있어.”
해월은 단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운명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인데 일개 인간이 그걸 어찌 판단하겠는가.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투성이다.
하지만 해월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예상대로만 흘러간다면 분명 잘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걱정되는 마음은 이해해… 그치만 믿어줘.”
“제가 걱정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당신입니다.”
“뭐? 내가 왜?”
험한 꼴을 볼 수도 있고,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계획이었지만 그걸 연진에게 내색한 적이 없기에 의아했다.
혹시 들켰나.
‘내가 이 일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걸….’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만일 일이 잘 풀려서 제가 목숨을 건진다면… 그다음은요?”
“그건….”
바람 앞 등잔불 같은 목숨이니까. 어차피 무가치하니까. 사라질 목숨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해월이 답을 하지 못하자 연진은 무슨 이유에선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냥 저를 데리고 떠나주시면 안 됩니까.”
연진은 차라리 떠나고 싶었다. 아무도 저희를 모르는 곳에 가서, 누구도 찾지 못하도록 숨어 살 수만 있길 바랐다.
“짐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생각해주십시오.”
해월은 머릿속이 혼란해졌다.
이 애를 데리고 떠나? 떠난다면 어디로? 그런 다음에는 무얼 하지?
어떤 방법을 택하든 결국 남겨지는 것은 연진이 될 텐데, 찰나의 안식을 위해서 이런 이기적인 선택을 해도 되는 건가.
“만일 내가 오랫동안 함께하지 못하면… 그때는 어떻게 할 거야.”
지금껏 숨겨온 비밀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내가 얼마 안 남은 목숨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부정해왔으나, 해월은 제 생애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매 순간 느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혹여 저를 데리고 가는 것이 불편한가요.”
“아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야. 예전에 얘기했던… 나만의 문제야.”
줄곧 덤덤하게 생각해왔는데 막상 말하려니 목울대가 울렁였다. 마음마저 울렁거리는 듯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사실….”
‘오래 못 살아.’
그 한마디가 나오질 않았다.
가슴속의 울렁임이 심해 숨을 고르던 순간, 무언가 목에 걸리는 것이 느껴져 기침을 했다.
잔기침을 거듭했는데도 불구하고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 않았다.
“콜록…!”
그때, 무언가 뜨거운 것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해월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있는 것은 선명한 혈흔이었다. 해월의 입가와 손에 묻은 핏물을 확인한 연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사부!”
연진은 거칠게 해월의 어깨를 붙잡았다.
“콜록! 콜록!”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검붉은 핏물은 손 틈새를 비집고 흘러내려 바닥과 옷소매를 적셨다. 가슴속이 따끔거리고 답답해서 몇 번 내리치자 기침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해월이 쉴 새 없이 피를 토하는 것을 본 연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무도 없느냐!”
다급히 해월을 끌어안고 외쳐보았지만, 빗소리에 가려 전달되지 않는 듯했다. 연진은 혼미해진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그의 안색을 살폈다.
“…쉿….”
해월은 떨리는 손으로 저를 부축하는 연진의 옷깃을 붙잡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조용히 해… 네 숙부가 사람을 붙였을 수도 있는데 내가 미령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껏 강석요를 속여놨는데 아프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연진은 화를 내듯 소리쳤다.
“유난 떨지 말고… 조용히 나가서 원복이만 불러.”
“사부…!”
“시키는 대로… 잘하잖아. 그러니 내 말 들어.”
단호히 말하는 모습에 연진은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연진은 그를 번쩍 안아 보료 위에 눕힌 뒤 다급히 밖으로 나갔다.
‘빨리도 가네.’
수련할 때를 제외하고 연진이 저리 급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터라 퍽 재밌게 느껴졌다. 이런 와중에도 우스운 생각을 하다니 정말 미친 걸지도 모르겠다.
혼자 남겨진 해월은 문득 수마가 몰려드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었다.
‘체면 안 서게 이게 뭐람.’
눈꺼풀이 너무나 무거웠다. 울렁거리는 속, 지끈거리는 머리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아 지금 잠들면 악몽 꿀 것 같은데….’
왜 불길한 예감은 꼭 틀리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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