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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40화 (40/124)
  • 40화

    해월은 작은 연못 앞에 쭈그려 앉아 투명한 물을 바라보았다.

    물비늘이 선명하여 어쩐지 거대한 물고기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사실 물에 관해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추억이 있는지라 꺼리게 되었다.

    ‘이 못은 얼마나 깊을까.’

    겉보기엔 그리 깊어 보이지 않는데, 수심은 들어가 보아야만 알 수 있겠지.

    손으로 작게 파장을 일으켜 수심을 가늠해보았다. 그런다고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뜨거운 여름 볕 탓에 물이 미지근했다.

    해월은 그 자리에서 손을 털고 다시 별채에 돌아가려 몸을 일으켰다.

    “어? 네가 왜 여기….”

    “따라오십시오.”

    굳은 얼굴로 다가온 연진이 거칠게 저의 손목을 잡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야.”

    평소와 다른 모습에 해월은 연진에게 이끌리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따라갔다.

    그 발걸음이 멈춘 것은 저의 방 앞에서였다. 여전히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원복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되었다.

    해월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원복아 너는 나가봐. 네 도련님이 내게 할 말이 있는 모양이야.”

    “…예, 귀빈.”

    원복은 구세주를 만났다는 듯 반색하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해월은 제 방안의 광경과 연진의 행태를 종합하여 제게 벌어진 일을 추론했다.

    정돈된 듯 깔끔한 방안, 그리고 서탁 위에 올라와 있는 자루.

    ‘너무 부주의했군.’

    이리 허술한 유형은 아닌데, 늘상 세우던 날이 무뎌져서 그런지 참 쉽게도 들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복이 마루를 정리하다가 돈 자루를 발견할까 봐 부러 서랍에 넣어둔 것인데 괜히 그리했다는 후회가 일었다.

    “이 돈은 다 무엇입니까.”

    “뭐긴, 돈이지.”

    “어디서 번 돈입니까. 한주에서 이만한 돈을 구할 정도의 일거리는 흔치 않을 텐데요. 그럴 시간도 없었을 테고.”

    “…더 이상 거짓말은 못 하겠네.”

    해월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미 다 보인 마당에 더 어떻게 변명하리.

    “맞아 네 예상대로야. 네 숙부한테 받았어.”

    연진의 눈동자가 크기를 키웠다. 예상을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 반응이었다.

    그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일까, 혹은 실망일까.

    그게 무엇이든 제게 향하는 것이 아니면 좋으련만. 연진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조금 서글플 것 같았다.

    “나중이라고 미뤄봤자 며칠 미뤄지지도 않게 됐네.”

    털어놓을 수 있는 범위 내의 것은 전부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 섰다.

    “네 숙부랑 거래를 했어. 널 팔가 연회에 참석시켜달라고.”

    “팔가 연회를… 말입니까?”

    아마 연진은 제가 가주와 결탁하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를 왜 그 연회에 참석시키려 하는 겁니까.”

    “필요하거든. 그래야 하니까.”

    지나치게 단출한 설명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답변인지라 해월은 영 내키지 않는 얼굴이 되었다.

    “그걸로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자세히 알면, 무얼 어찌하려고.”

    “무얼 어찌하지 못해도 알아야겠습니다.”

    “다 널 위해서….”

    널 위해 그런 것이라 말하려던 해월이 더 잇지 못하고 멈칫했다.

    ‘…나도 싫어했었잖아. 널 위해서라는 말을.’

    선학경이 늘 제게 그리 말했었다.

    ‘너와 모두를 위해서다.’

    그때마다 해월은 되묻고 싶었다. 이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이냐고. 그 자신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이기일 뿐이지 않냐고.

    “…같이 있을 날도 많지 않은데 실랑이하기 싫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솔직하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사제의 연을 맺던 날 그리하기로 했잖아요.”

    연진의 말이 맞았다. 해월은 한 번 한 말은 지키고자 했다. 그를 잘 대해주고 싶었다.

    솔직함을 버려서라도 말이다.

    “그러니 나한테 정 붙이지 말라고 했잖아.”

    “…….”

    “난 그럴 가치 없다고.”

    짧고 무거운 한마디를 내뱉은 뒤 그대로 연진을 스쳐 지나갔다.

    ***

    아침 식사를 하는 내내 해월과 연진은 일절 대화를 하지 않았다.

    본래 연진이 수다스러운 편이 아닌지라 대체로 조용했지만, 굴하지 않고 재잘재잘 말을 붙이던 해월마저 조용하니 아주 삭막했다.

    이제 보니 해월과 연진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무표정일 때, 무섭도록 냉정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연진은 원래 그랬고, 해월은 대체로 온화한 인상을 가졌음에도 웃지 않으니 무척 차가워 보였다.

    원복과 향단은 말 없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보다 못한 원복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두 분 오늘따라 왜 이리 조용하십니까.”

    두 사람 다 대답이 없었다. 그들이 조용한 이유를 골똘히 생각하던 원복은 답을 낸 듯 질문했다.

    “…혹시 싸우셨습니까.”

    “아니. 그럴 리가.”

    “그런 일 없다.”

    이런 대답은 또 아주 칼같이 하는 게, 곧 죽어도 싸웠다는 것은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싸웠네, 싸웠어. 사이 좋더니만 갑자기 왜 저런데.’

    그런 원복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해월과 연진은 대화가 없었다. 그러다 해월이 먼저 엉덩이를 뗐다.

    “나 먼저 일어난다.”

    “그러시죠.”

    냉랭한 기운마저 풍기는 그들을 보고 원복은 향단에게 귓속말을 했다.

    “다 큰 사람들이 나잇값 못 하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그지?”

    “어? 어어.”

    향단은 연진과 해월의 눈치를 보다가 대충 대꾸했다.

    이에 해월은 원복을 째려보았다. 저 불쌍한 놈도 참 답이 없었다.

    “다 들린다, 인마. 그리고 넌 내 안내 좀 해라.”

    해월이 핀잔을 주자 원복은 자세를 바로 하며 되물었다.

    “예? 제가요?”

    “잔말 말고 빨리.”

    해월은 시무룩해하는 원복을 붙잡고 이끌었다.

    연진과 언쟁을 한 것과는 별개로 해월은 계획을 이행시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팔가 연회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했고, 궁금한 것을 묻기엔 원복이 제격이었다.

    원복에게 물으면 필시 향단에게 조잘조잘 다 이야기할 것이 뻔하지만, 그것이 바로 해월이 노리는 것이었다.

    향단은 가주에게 보고를 할 테고, 그래봤자 가주는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뭘 캐내고 있는지 알아도 무슨 목적인지는 모를 거야.’

    교란이라면 교란이 되는 수법이다.

    ‘강석요가 내 제안을 온전히 들어주지 않을 거란 것쯤은 알아. 그러니 더욱 혼선을 주어야 해.’

    “네가 아무리 별채만 관리한다지만, 그래도 이 가문 하인이니까 연회에서 무얼 할지 알지?”

    “무얼 하다뇨?”

    “문생들이 검술을 시범 보이든 무희들을 불러다 춤을 추든 할 거 아니야.”

    해월은 답답하여 반쯤 타박하듯 물었다.

    “아 그거라면 문생들이 검무를 추기로 했습니다. 오늘도 연무장에서 연습하고 있을걸요?”

    저무는 해라고 불리는 가문이지만 여전히 무예로 알아주는 것이 한주 강 씨였다. 검무를 춘다는 이야기를 들은 해월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뭐 검무라… 딱 좋군.”

    숨어들기 딱 좋았다. 혹시 무희들을 부른다면 계획이 어려워질 뻔했다.

    아무리 저의 몸 선이 가는 편이라 해도 무희들 사이에 숨어들기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문하생들이 검무를 춘다면 그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백난국식 검술을 익힌 적은 없지만 그런 것쯤은 잠깐만 보아도 터득할 수 있다.

    아주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

    시끄러운 기합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난무하는 곳. 사내들의 땀내가 가득한 그곳, 연무장에 새하얀 백의를 입은 해월이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여유롭고 느릿했다. 그래서 오히려 눈에 띄었다. 검무와 무예를 수련하던 문생들은 하나둘 그를 쳐다보았다.

    그중 하나는 해월을 바로 알아보고 기함을 했다.

    “저 사람은…!”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며 입을 뻐끔거리자 해월은 피식 웃고 그 문생에게 다가갔다.

    “사람을 무슨 귀신 보듯 대하고… 그때 다친 곳은 금방 나으셨나요?”

    지난날 강석요가 저를 잡으라 했을 때 동원되었던 자 중 하나였다. 아마 제가 명치를 찔러 허리를 못 펴게 만들었던 것 같다.

    본래 때린 사람은 잘 기억을 못 하지 않던가. 저도 그러했다. 대충 짐작만 할 뿐이었다.

    “뼈에 금이 갔을 텐데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미친 게요? 여기가 어디라고…!”

    제가 벌인 소동 덕에 가주한테 온갖 비난과 폭언을 받은 것을 생각하니 이가 바득바득 갈리는 모양이었다.

    “왜 나만 보면 다들 미쳤냐고 물어보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무얼 했다고.”

    “우릴 그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낯짝도 뻔뻔하지.”

    그 말을 들은 해월은 웃으며 답했다.

    “그게 어디 저의 죄란 말입니까. ‘고작’ 퇴마사 따위에게 얻어맞은 무인 가문의 수련생들 잘못도 있지 않겠습니까?”

    “무어라? 이게 감히!”

    손을 들어 올리던 사내는 일순 멈칫했다. 해월이 그를 노려본 탓이다. 그것도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위압감이 담긴 눈으로.

    사내가 손을 내려놓자 해월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싸우기엔 시간도 체력도 아까워서요.”

    해월이 이곳에 온 이유는 문생들이 어떤 수련을 하는지 대강 파악해두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저들의 호의를 약간이나마 얻을 필요가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난 뒤끝 없는 사람이라 당신들을 해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그간 응어리진 것을 푸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때 이후로 거의 처음 보는데 응어리랄 게 있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비법을 알려드릴 테니 이제 그만 화를 푸시지요.”

    “퇴마사가 어쭙잖게 배운 무예를 가르침 받고 싶은 생각 없소.”

    “그 어쭙잖은 무예에 당하신 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참으로 재밌군요.”

    조롱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팔가 연회 때 이들 사이에 숨어들려면 이 정도 조사는 필요했다. 해월은 저를 보느라 애매한 자세로 멈춰있던 문생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갔다.

    “거기 계신 문생분, 몸을 그리 쓰면 나중에 결린답니다. 자세를 이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매일같이 선학경에 의해 살인적인 수행을 거친 덕에 해월은 이런 쪽으로 도가 텄다.

    어찌하면 몸이 굳지 않는지.

    “그쪽도 아직 초심자인 것 같은데 검을 그리 쥐면 손이 굳습니다. 이렇게 그러쥐는 것이 통증이 덜할 겁니다.”

    어떤 방법으로 검을 쥐어야 가장 완벽하게 날을 세울 수 있는지.

    “거기 계신 문하생분도 발을 날릴 때는 중심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정확한 곳에 발을 날리면서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바로잡으십시오.”

    어떻게 몸을 써야 효과적인지, 전부 알고 있었다.

    문생들은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훨씬 편안해진 자세에 신기해했다. 한 문생이 해월에게 물었다.

    “…당신은 정체가 뭐요.”

    “정체랄 것까지야. 그저 흔한 퇴마사입니다.”

    “아까 그 자세는 백난국 무술의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이국 출신이시오?”

    “그런 것으로 해두지요.”

    이방인의 마을 출신이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국인이라 할 수도 있으니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이런 조언을 해 주는 이유가 뭐요.”

    “의심도 많으시지. 그저 호의입니다. 지난날 미안한 일도 했고, 제가 머지않아 떠날 것이라 나름의 작별 인사랄까요. 팔가 연회 이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거거든요.”

    살아서 돌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론가 돌아간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다.

    “그전에 검무나 구경할까 해서 들른 겁니다. 다른 뜻은 없으니 곡해 마십시오.”

    “…….”

    “여기서 무예를 배우시는 분들은 전부 무과에 응시하고 싶으실 겁니다. 만일 제가 연무장에 드나드는 것을 허락해준다면, 아까 알려드린 것들을 더 자세히 일러드리지요.”

    해월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사실 대사형이란 자의 실력이 그리 좋지 못하기도 하고, 실질적인 가르침이 별로 없는 상황이라 해월의 제안이 달콤하게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가 외지인한테 가르침을 받으면 쓰겠나.”

    “배울 건 배워야 하지 않나. 무과에 응시하고픈 것은 사실이니.”

    “하지만 가주님의 허락이….”

    “가주님이 우리 말을 듣기는 할 것 같아?”

    옥신각신 대화가 끝이 날 무렵, 해월은 여유롭게 웃으며 물었다.

    “어찌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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