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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8화 (38/124)
  • 38화

    해월이 연진을 제자로 삼은 데는 흥미로워서, 그 애가 왜인지 신경 쓰여서, 허울뿐인 사제놀이도 재밌을 것 같아서… 등의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걸 이들의 앞에서 전부 이야기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었다.

    “그 물음에는 어폐가 조금 있군요. 제가 그 애를 제자로 삼은 건 가주님의 덕이 아닙니까.”

    “이자가 감히…!”

    상대가 화를 내면 낼수록 해월의 미소는 더욱 굳건해졌다.

    “송구합니다. 어쨌든 답을 드리자면, 그저 무료해서였습니다.”

    “고작 무료하다는 이유로 그 녀석 곁을 지키고 있다?”

    강석요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사건건 제 일을 막고 방해했다니. 부아가 치밀다 못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예.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세상에 꼭 이해할 수 있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자신도, 강석요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는 점에서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간 그리 박대하면서도 죽일 생각까진 안 하신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죽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관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려.”

    “여기서 모르쇠 하시면 더 우스운 꼴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만.”

    “날 겁박하는 게요.”

    “설마 아직도 저를 천한 퇴마사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도 나름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눈치도 셈도 빠른 편이고요. 또 퇴마사 일을 하다 보면 알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게 될 때가 있는데….”

    남들은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보고, 듣지 않아도 될 것을 들으니 일상이 피곤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마물이나 귀신이 득실대는 곳에선 정말 피곤해서 살 수가 없을 지경이었으나 지금은 처음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간 시달리며 만들어진, 칼날처럼 예민한 감각이 지금 빛을 보는 듯했다.

    “가령 지금처럼, 가주님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답니다.”

    “무, 무슨…!”

    해월의 말에 강석요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강석요는 요 몇 달간 악몽과 환청에 시달려 도무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한 것 또한 당연하다.

    안 그래도 신경질적이었던 성정은 날로 포악해져만 갔고, 자신의 화를 견디지 못하고 가슴을 내리치길 수백 번. 그저 괴로워해야만 했다.

    “…내가 악몽을 꾼다는 것을 어찌 안 게요.”

    낯빛을 고려하여 그저 지레짐작할 수도 있었기에 강석요는 경계하며 되물었다.

    해월은 이해한다는 듯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영안으로 보면 대강 알 수 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눈을 감으면 악몽에 시달리고, 귓전에 뜻 모를 소리가 울려 퍼져, 그 소리를 덮기 위해 매일같이 악공들을 불러 시끄러울 정도로 풍악을 울려대는 것이겠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강 씨 별관 저택에서 풍악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으로 강석요의 상태를 대충 짐작했었는데 오늘 실물을 보니 확신이 섰다.

    만면에 가득한 검은 그림자, 피곤한 기색. 이건 원독이 쌓여 탈이 난 것이다.

    일전에 제게 누명을 씌워 화풀이를 했던 것처럼, 강석요와 강석철의 만행은 아주 많았을 것이다.

    그 모든 악행에 대한 원망이 쌓여 저주가 된 것이다.

    물론 원념이 많이 쌓였다고 해서 그것이 저주의 형태로 발현되는 일은 극히 드물지만, 강석요는 그 드문 경우 중 하나인 듯했다.

    이런 것을 보니 하늘도 그리 무심하진 않은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주님께서도 하셨을 것 같고. 아드님께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선 작은 위험조차 완전히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하신 모양인데… 그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랍니다.”

    거짓말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짓 속에 진실을 끼워 넣는 것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혹은 거짓인지 알지 못하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업이라는 것이 쌓입니다. 그 업을 없애기 위해 흔히들 기도하고 치성을 드리는 겁니다.”

    해월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강석요는 어느새 잠자코 그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해월은 작게 미소 지었다. 속으론 서슬 퍼런 칼날을 숨기며.

    ‘어차피 세상에 필요조차 없는 무가치한 목숨일 테니… 내가 편히 보내주마.’

    그간 연진을 박대한 것과 그 외 수많은 악행, 그 모두에 대한 보복이다.

    “말했다시피 저는 꽤 유능하답니다. 제가 가주님에게 달라붙은 악을 없애 드릴 테니 제가 드리는 부탁을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 부탁이란 게 뭐요.”

    썩 내키지 않는 음성이었으나 해월은 뻔뻔하게 대응했다.

    “후에 열릴 팔가 연회에 연진을 초대해주시지요. 병환이다 뭐다 핑계 대고 가둬두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제게 금화와 은화를 각각 백 닢씩 주십시오.”

    “뭐라….”

    예상하지 못한 요구 하나에, 예상대로인 요구 하나인 터라 강석요는 당황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해월의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싫으시면 도로 없던 일로 하겠나이다.”

    “잠깐… 알겠네. 한데 내게도 담보가 있어야지.”

    해월은 싱긋 웃으며 제 검지를 깨물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흘러나왔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강석요의 손목을 붙잡고 그의 손등 위에 술식을 적어 내렸다.

    느닷없이 술식의 도화지가 된 강석요가 역정을 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오!”

    그냥 술식도 아니고 피로 술식을 쓰다니 강석요는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월은 무감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생자의 혈을 바치니.

    “몽중(夢中)의 시름을 거두어라.”

    주문을 외자마자 강석요의 손등에 적혀있던 술식이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꼭 피부에 스며든 것 같았다.

    “아니…!”

    그 광경을 지켜본 강석요와 정 씨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걸로 당분간 악몽이나 흉한 일들은 겪지 않을 테니 안심하시면 됩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임시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더 좋은 술법은 팔가 연회가 끝나는 즉시 새로 걸어드리겠습니다.”

    “…알아두지.”

    “예, 하면 이만 가보겠나이다.”

    방을 나서는 해월의 얼굴에 스산한 미소가 번졌다.

    ‘이걸로 한 걸음은 나아갔군.’

    지금은 사라진 나라의 고대 주술을 걸었다. 그 효험은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것은 답도 없지.”

    반쯤 자조가 섞인 말이 여름밤 공기 중에 흩어졌다.

    ***

    해월은 정 씨를 통해 전해 받은 돈 자루를 들고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때, 멀찍이서 덩치 큰 사내가 그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 너는…!”

    회랑에서 마주친 강석철이 해월을 보고 눈 크기를 키웠다.

    지난날 해월이 저와 제 아비에게 준 수모를 떠올린 듯 그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소리 낮추십시오. 엄연히 손님입니다만.”

    해월은 태연하게 대응했다. 강석요도 그렇고 강석철 역시 언제 보아도 반갑지 않은 얼굴인지라 욕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배려였다.

    “손님은 무슨! 너 오늘 잘 걸렸다.”

    강석철은 그날 이후로 제 아비에게도 혼이 났고, 주위에서 얻은 망신이며 이루 말하기 어려운 수치를 겪었다.

    그 모든 수치를 천한 퇴마사 나부랭이가 준 것이라니. 강석철은 속이 뒤틀려 버틸 수가 없었다.

    “곱상하게 생겨서 귀여워해 주려고 했더니만 뒤통수를 쳐?”

    해월은 어이가 없어 실소를 금할 길이 없었다.

    누가 저 같은 무뢰배한테 귀여움받고 싶다고 했던가. 구역질이 절로 나왔다.

    “누가 보면 공자님과 제가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있던 게 벌써 몇 달 전인데, 이제 와서 따지기에는 순번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게…!”

    분을 못 이긴 강석철이 우악스럽게 해월에게 달려들었다.

    해월은 유연한 움직임으로 슬쩍 자세를 틀어 그의 공격을 피했다.

    “그렇게 달려들기만 해서는 상대에게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그리 말하는 동시에 강석철의 발을 걸었다.

    “적어도 넘어뜨리려거든 이렇게 해야지요.”

    “윽!”

    달려드는 힘이 워낙 컸던 탓에 작은 제약에도 그의 몸은 쉽게 고꾸라졌다.

    “아야!”

    앓는 소리를 하는 강석철에게 해월은 냉소적인 얼굴이 되었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디찬 얼굴이었다. 벌레를 보는 표정과 흡사했다.

    ‘우스운 것은 아비나 아들이나 똑같군.’

    그들이 그간 연진을 박대해 온 것에 비하면 이 정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맛보여줬다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크게 넘어진 것 아니니 잠깐 아프다 말 겁니다.”

    “너! 이 꼬맹이가 진짜!”

    “…꼬맹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아실까. 그리고 내가 너보다 두 살은 많으니 말씀을 가려 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해월은 조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솔직히 불혹은 되어 보이는 강석철이 저보다 어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제가 감히 말씀을 드리자면, 본인이 가진 힘만 믿고 행동을 함부로 했다간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 겁니다. 그러니 자중하도록 하세요.”

    “천한 퇴마사주제에 감히 내게 명령하는… 악!”

    해월이 중지와 검지로 강석철의 이마를 쳤다. 강석철은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고 주저앉으며 기절했다. 영력을 담아 쳤으니 보통 아픈 게 아닐 것이다.

    해월은 손가락을 툭툭 털어내며 쓰러진 강석철에게 눈을 흘겼다.

    “방금 말씀드렸는데도 저리 배우는 것이 없어서야… 참으로 딱하군요.”

    때마침 잘되었다. 강석철이 달려들어 준 덕에 찾아가는 수고를 덜었다.

    해월은 여전히 피가 멎지 않은 손가락으로 강석철의 이마에 부를 환(喚)을 새겼다.

    “생자의 혈을 바치니, 착시(着屍)는 부름에 응하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석철의 등위로 긴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귀신이 내려앉았다.

    소복을 입은 여인의 형태를 띤 귀신이었다. 그 외양으로 해월은 강석철에게 쌓인 원념의 근원을 짐작했다.

    해월이 소환한 귀신은 강석철에게 쌓여 있던 원념을 한데 모아 가시화시킨 존재이다.

    원한으로 똘똘 뭉쳐있기에 숙주의 생기를 서서히 앗아갈 것이다.

    웬만한 굿이나 정화로는 떼 낼 수 없으리라. 착시를 떼어내려면 숙주가 진심을 다해 치성을 드리는 수밖에 없다.

    해월은 강석철을 향해 조소를 흘렸다.

    “네게 희롱당한 자들의 원념이니 달게 벌 받거라.”

    쯧쯧 혀를 차곤 유유히 별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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