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동설귀-37화 (37/124)
  • 37화

    “나도 그리 선량한 사람은 아니네. 내 잇속을 챙기는 것이 가장 좋거든. 그런데 이런 내게도 양심 한 조각은 있는 모양이야. 그 조각 하나를 지키기 위해서 이리하는 걸세. 솔직히 말하면 난 이미 늙고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목숨이니 가벼이 여기는 것이기도 하고.”

    “…저와 비슷하시네요.”

    풍전등화 같은 목숨이기에 가벼이 한다. 더불어 모순적이게도, 소중히 한다.

    “아니, 선생께선 나보다 좋은 명분을 가졌지 않나. 늙은이의 한 조각 양심보다,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마음이 더 갸륵하지. 그러니 너무 위악할 필요 없소. 그대도 아직 젊디젊은 청춘이니.”

    “…덕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담은 무슨 늙은이 푸념인데. 어쨌든 이것으로 답은 되었소?”

    “예, 충분히요.”

    노온의 답은 충분히 해월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진심을 내보이니, 진심이 돌아와서 명쾌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지.”

    “예,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무슨 계획?”

    “간단합니다. 덫을 쳐놓은 뒤 그 안에 걸리기만을 기다릴 겁니다.”

    “기다린다고 될 일이라면 진작에 해결되었을 터. 단순한 덫은 아니라 생각하오.”

    “당연하죠. 저는 일을 허투루 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어조였지만 결코 가벼이 하는 말은 아니었다. 일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얼마 뒤에 있을 팔가 연회에서 이 일을 치를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저도 아직 가늠해봐야 하는 터라 다음에 말씀드리겠나이다.”

    “지금 얘기하지 않고 어째서?”

    그들에겐 시간이 많이 없었다. 낚시꾼과 같은 여유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노온의 걱정을 훤히 아는 해월은 싱긋 웃고는 답했다.

    “제가 밑밥을 던져놨거든요. 아마 지금쯤 물었을 겁니다.”

    향단을 통해 강석요에게 편지를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답이 올 테지.

    ***

    한주 강 씨 별관.

    본관보다 훨씬 넓고 화려한 저택. 이 저택의 주인이자 가문의 수장인 강석요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급하게 준비했던 계획이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난 탓이다.

    [긴히 나눌 말이 있으니 만남을 청합니다. 오늘 별관으로 찾아가겠나이다.]

    서신의 내용은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통보에 가까웠다.

    강석요는 기가 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놈은 무슨 꿍꿍이인 게야.”

    난데없이 나타나서 저와 제 아들에게 모욕을 안겨주고 일까지 방해하고 있는 천한 퇴마사가 눈에 거슬려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건 저도 잘….”

    정 씨가 얼버무렸다.

    “이 모자란 놈! 그러게 누가 그런 어린아이를 시키라 했어!”

    강석요는 애꿎은 이를 탓했다. 신경이 예민해진 그는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만연했다.

    본래도 화가 많은 성정이었는데, 근자에 더욱 호전적으로 행동하는 가주의 등쌀에 애꿎은 정 씨만 괴로웠다.

    “송구합니다, 가주님. 가장 뒤탈이 없을 만한 이를 찾다 보니….”

    정 씨가 변명했지만 강석요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 샌님 같은 놈 없애는 것이 무어가 힘들다고 이리 진을 빼!”

    “그것이… 그 퇴마사 놈이 빈틈을 보이지 않아 기회를 얻기 힘들답니다. 차라리 그 퇴마사를 만나보심이 어떠합니까.”

    “뭐? 내가 그 미천한 놈을 만나서 무얼 어찌한단 말이냐.”

    강석요는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이 드높았다. 음기나 풀풀 풍기는 천한 퇴마사를 상대해주고 싶지 않았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잘 구슬리면 우리 편이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정 씨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제가 살기 위해서 늘어놓는 변명과도 같았다.

    “듣기론 무척이나 돈을 밝히는 자라 하던데… 둘째 도련님이 그자를 무엇으로 꼬드겼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쪽에서 돈을 더 주면 분명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석요는 턱수염을 쓸며 고민에 빠졌다.

    돈을 밝히는 자를 이용하는 건 그가 가장 흔히 쓰는 수단이었다.

    ***

    해월의 계획은 일견 간단해 보이나 사실은 복잡했다. 어느 하나의 조건이라도 맞지 않는다면 실행하기 어려웠으니까.

    일단 강석요를 떠봐야겠다는 생각에 만남을 청했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달이 차오르는 밤이 되었다. 예고했던 시각이 되자 해월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기민한 연진이 혹여나 자신이 방을 나서는 소리에 깨서 곤란한 상황이 생길까 봐서였다.

    “이 밤에 어딜 가십니까.”

    “아 깜짝이야… 너구나.”

    해월은 몰래 별채를 빠져나가려다 자신을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놀라며 발걸음을 멈췄다.

    예상했던 인물이라 사실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여기 저 말고 달리 누가 있겠습니까.”

    “또 또 바른말 한다.”

    해월은 괜히 툴툴거렸다. 연진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지 단호히 한 번 더 물었다.

    “어디 가세요.”

    “밤 산책 나간다. 아이는 잘 시간이니 어서 들어가서 주무십시오, 도련님.”

    연진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거짓말! 아니잖아요, 밤 산책하러 가는 거. 어디 가는지 이실직고하십시오.”

    “나참….”

    백난국의 어느 먼 지방에는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귀신이 출몰한다고 하던데, 마치 그 귀신이 제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거짓된 모습을 꾸미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해월에겐 다소 맥이 풀리는 일이었다.

    ‘그게 싫지 않은 게 더 문제겠지.’

    해월은 자신이 정한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진의 행동은 싫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더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

    “어디 간다고 답하면 따라가려고?”

    “어디냐에 따라 다르지만 웬만하면 따라갈 겁니다.”

    해월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근래 들어 연진이 제게 맹목적으로 보여서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었다.

    “너 혹시 병 있는 거 아니야? 막 병적으로 누군가를 쫓아다니는….”

    “그런 거 아닙니다.”

    “내가 어디 가는지 알면 너 오늘 잠 못 자.”

    네 숙부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

    “아주 생각이 많아질 거거든. 잠이 안 올 정도로.”

    “…어딜 가시기에 이리 겁을 줍니까.”

    이쯤 되니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연진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더욱 깊어졌다.

    “겁주기 싫으니까 이러는 거야. 그러니까 궁금해하지 마. 나중에 때 되면 다 알 일이야.”

    “…저는 나중이라는 말이 가장 싫습니다.”

    갈 길을 가려던 해월은 연진의 그 말에 얼어붙은 것처럼 우뚝 섰다.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를 걱정하는 제게 나중에 알게 될 거라 지금 알 필요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연진의 아버지는 끝까지 연진에게 모든 것을 비밀로 했었다.

    자신의 병도, 아우가 가주의 자리를 탐내고 있으니 조심해야 하리라는 것도.

    “한데, 아니었습니다. 그때 알아야만 했던 거였어요.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어야 했다는 겁니다.”

    언질이 있었다고 한들 나아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고, 어린 저를 밀어내고 숙부가 가주가 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었다. 차라리 알았더라면 이토록 사무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마음을 해월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따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너… 나를 믿어?”

    “믿고 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이 따라붙었다. 저토록 맹목적으로 타인을 믿을 수 있는 제자가 가여웠다.

    ‘그래도 나는 이기적이야.’

    네가 끝까지 몰랐으면 해.

    오래가지 못할, 얄팍한 가림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를 속이고 싶을 정도로.

    “그럼 오늘만 눈감아줘. 걱정할만한 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

    “미안해.”

    단출한 사과의 한마디만 남기고 해월은 서둘러 별채를 나섰다.

    ***

    한주 강 씨 별관.

    본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별관은 어두운 밤에도 그 화려한 자태를 자랑했다. 이렇게까지 사치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돈 많은 사람의 기분을 해월은 알지 못했다.

    가진 것이 그뿐이니 그마저라도 드러내고 싶은 것이리라, 그리 짐작할 뿐이었다.

    끼익.

    가주가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강석요의 얼굴에 해월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예상대로의 모습이어서였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역시 만월의 밤은 참으로 어여쁘지 않습니까.”

    인사말 겸 조롱의 말이었다.

    ‘밤이 이토록 아름다워도 넌 이 밤을 즐기지 못하겠지.’

    그 이유는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고작 밤이 아름답다고 얘기하려 나를 만나고자 한 것은 아닐 테고, 본론부터 얘기하시오.”

    한편 강석요는 소름이 돋았다. 해월에게 별관의 대문을 열어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들어온 것일까.

    “저런 성격도 급하셔라.”

    강석요는 짜증이 나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해월은 더욱 뻔뻔스레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주십시오.”

    “무어라?”

    “본래 편을 먹으려면 뇌물부터 주는 것이 순서가 아닙니까.”

    “하!”

    “아니다. 제게 궁금한 것이 아주 많을 듯한데 질문부터 하는 것이 순서에 맞겠군요. 무엇이든 좋으니 하문하시지요.”

    해월은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친절한 태도와 말씨는 그가 오래도록 훈련해온 일이었다.

    “감히 내게 명령하는 겐가.”

    “명령이라뇨. 부탁이죠.”

    화가 치밀어 오른 강석요는 얼굴이 불처럼 붉어졌다.

    “대체… 무슨 연유로 그 도련님을 제자로 삼은 것이오.”

    순간, 해월은 대답하기를 망설였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