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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6화 (36/124)

36화

“향단아, 요즘 바깥심부름을 왜 이리 자주 가는 거야?”

“아, 그게… 연회에 쓸 것들을 미리 준비하라는 명이 있어서.”

향단은 대충 핑계를 댔다. 다행히도 원복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팔가 연회는 우리 저택에서 하기로 했지.”

“…응.”

백난국의 팔대 세가로 불리는 가문은 주기적으로 연회를 갖는다. 저마다 차례가 다르지만, 이번 연회는 한주 강 씨의 저택에서 열리는 것으로 결정되었기에 저택의 하인들은 바빠졌다.

원복이야 연진의 수발만 들기 때문에 해당 사항이 거의 없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이번 연회가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가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은 옛날부터 나왔잖아. 황제 폐하께서도 더 이상 우리 가문에 영하를 보내지 않으시고….”

“그….”

중얼거리는 원복에게 향단이 무어라 답하려 했다. 그런데 그 말은 갑작스레 등장한 누군가에 의해 끊겼다.

“어라? 귀빈?”

난데없이 등장한 해월에 원복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재밌는 얘길 하고 있었네.”

“재밌는 얘기라뇨! 가문의 존폐에 관한 심각한 얘기인데….”

원복은 심각한 사안을 재밌는 이야기라고 치부하는 해월이 야속하여 꿍얼거렸다.

“누가 너한테 재밌대? 나한테 재밌다고. 내 입장에선 남일이니까.”

원복은 얄밉다는 듯 해월을 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월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원복이랑 사이가 좋은 모양이야. 역시 또래 친구가 좋은가 봐.”

해월의 시선은 명확히 향단을 향하고 있었다. 때문에 향단은 어깨를 움찔하며 마지못해 답했다.

“예….”

“그래서 말인데, 둘이 좋은 시간 보내는 와중에 미안하지만 내가 부탁할 일이 좀 있어.”

“무슨… 부탁 말이세요?”

향단이 되묻자 해월은 피식하고 웃었다.

“너만 들어줄 수 있는 부탁.”

다소 의미심장한 말이기에 원복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월이 향단에게 무언가 시키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에 원복은 둘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무슨 부탁인지는 몰라도 제게 시키세요, 귀빈. 제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아니, 너는 못 들어주는 부탁인데?”

“예?”

원복이 반문했지만, 해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향단에게로 옮겼다.

“들어줄 거지?”

다정한 말투와 해사한 미소에는 은근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물론 그 냉기를 느낀 사람은 향단뿐이었다. 원복은 그들의 내막에 대해 모르니까.

“부탁 들어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안 그래?”

“그, 그럼요.”

“향단아!”

원복이 볼멘소리를 했다.

“…난 괜찮아.”

원복을 안심시키는 향단에 해월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이로써 새로운 계획이 시작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맛보기에 불과하다.

‘시작부터 일이 아주 재밌게 굴러가겠어.’

그 예상이 틀릴 가능성은 아마 없을 것이다.

원복을 잘 구슬려서 향단과 둘만 남게 된 해월은 웃는 낯을 유지하며 물었다.

“아직도 나와 도련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거야?”

해월은 이미 다 꿰고 있었다.

그것을 부러 막지 않은 이유는 어차피 쓸만한 것들을 전하지 못 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 겁먹지 마. 그저 묻는 것인데 벌써 그러면 내가 꼭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잖아.”

‘나쁜 짓’이라는 말에 향단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해월의 서늘한 미소를 마주한 향단은 잔뜩 겁을 먹은 채 웅얼거렸다.

“제게… 무엇을 부탁하려 하시는 겁니까.”

“간단해. 네가 아주 잘할 수 있는 일이야.”

“대체 무엇을…?”

그 질문을 들은 해월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날 가주와 만나게 해줘.”

“네…?”

잡힌 꼬리를 놓지 않는 것이 역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기에, 해월은 꼬리를 발견한 지금 작전을 진행하려 했다.

엊그제 연진의 과거 이야기를 들은 뒤, 원복과 향단의 이야기를 엿듣고 떠오른 방법이 있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팔대 세가의 정기적 연회는 가주들의 친목을 다지는 것에서 나아가 가문과 가문의 화합을 상징한다.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

그렇다면 강석요가 자리에서 물러날 만한 명분을 만들어주면 되는 것이다. 그 명분이 쉽사리 만들어지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파고들다 보면 좋은 수가 보이리라.

“가, 가주님과 만나서 무얼 하시게요.”

“무얼 하다니. 내가 설마 백난국 팔대 세가 가주를 죽이기라도 할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솔직히 죽이는 것이 더 마음 편했다. 어차피 자신은 오래 살지도 못할 목숨이기에.

그러나 해월의 목숨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무리 강석요가 막 나가는 인물에다 귀족은 물론 황제에게도 눈엣가시 같은 존재라 할지언정 귀족은 귀족이었다.

해월이 그를 죽였다가는 하극상의 죄를 물어 고향 사람들까지 몰살당할 것이 자명했다.

***

“원복아.”

깊은 상념에 잠겨있던 연진이 원복을 불렀다.

“예, 도련님.”

“근자에 사부가 조금 이상해지신 것 같지 않으냐.”

“흠, 글쎄요 그분께서는 늘 이상하셔서….”

원복이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연진은 그 옆에 있던 향단에게 말을 걸었다.

“향단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 저는… 원복이와 같습니다.”

“그렇구나.”

다소 싱거운 대답에 별 소득이 없자 픽하고 짧게 한숨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즘 들어 해월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원복의 말처럼 원래부터 이상했지만 근래에는 더욱 이상해졌다.

해월은 장난기 많은 겉모습과 달리 매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갑자기 제 과거를 묻고, 가주가 되라 설득했다.

그는 제게 여러모로 어려운 존재였다. 첫 스승이자 많은 낯선 것들을 경험하게 해주었으니까.

더불어 해월은 제게 딱히 바라는 게 없어 보였다. 정확히는 사익을 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만에 하나 제가 가주가 된다 해도 해월에게는 특별히 이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가주로 만들어준 공을 챙기려 한다기엔 해월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번복하지 않고 있었다.

해월이 이러한 뜻을 밝힐 때마다 제겐 그가 꼭 멀리,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연진은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사람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지난날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것이었다.

기우일지 모르나 해월은 이따금 상념에 젖어있을 때가 있었다. 깊이 사색하는 그 얼굴이, 끝없는 공허감을 품은 그 눈빛이, 이상하게도 죽기 직전의 아버지와 닮아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곁에 다가가 말을 걸면, 그는 자신이 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가벼운 목소리와 행동으로 저를 대했다.

깊이 물어보면 기분이 상할까 싶어 말을 아꼈지만, 조금이라도 물으려 들면 해월은 그럴 시간에 수련이나 하라며 얼버무렸다.

게다가 원래는 자신과 함께 늘 별채 안에만 머물던 해월이 며칠 새에 바깥 걸음을 자주 하는 것이 영 신경 쓰였다.

“오늘은 어딜 그리 가시는 건지….”

늘상 눈에 보이던 사람이 안 보이니 무언가 비어있는 기분이었다.

연진의 마음을 대강 알아차린 원복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리 신경 쓰이시면 한 번 뒤쫓아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뒤쫓아?”

“예, 찾아가 보면 금방 해결될 일이 아닙니까.”

원복이 아무렇지 않게 해답을 주었다. 그에 설득된 연진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려던 찰나.

“안 됩니다!”

향단이 대뜸 소리쳤다.

“응…?”

연진과 원복이 의아하다는 듯 동시에 향단을 보자 그녀는 귀 끝이 빨개져 답했다.

“그, 그게… 귀빈께서 안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귀찮은 건 질색하시는 분 아닙니까.”

향단이 만류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해월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 말도 맞는구나.”

연진은 해월에게 귀찮은 혹 덩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해월이 아끼고 좋아하는 돈처럼 말이다. 아직 그에게 있어 돈과 같은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기엔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해낼 것이다.

그 언젠가가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시간은 야속하게도 흘러간다.

머지않아 올 것이다. 저의 스승이 떠나가야 할 날이.

***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나 말이오. 그때 이후로 거의 처음이지.”

“뒤따라붙는 고양이들이 많아서 조금 곤란했거든요.”

해월은 그간 자신의 눈치를 살피던 연진과 원복에 대해 우회적으로 말했다.

어쨌거나 그들의 시선을 피하느라 장로와 접촉이 늦어진 게 사실인지라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것이다.

“저런 어느 고양이일까.”

“다행히 귀여운 고양이들입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옵고, 차선책으로 생각해두었던 방안을 실행할까 하여 이리 뵙고자 하였습니다.”

노온은 은은한 미소를 짓는 해월을 물끄러미 보다 질문을 입에 올렸다.

“차선책이라면?”

“보다 눈에 띄는 형태인데다, 실패의 가능성도 커서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하나 저희에겐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확실히 여유가 있지는 않지.”

노온이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전에 장로님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무엇이든 물으시오. 내 선생께 그런 무례를 저질렀는데 질문하나 답 못할까.”

노온은 해월에게 꽤나 호의적이었다. 해월은 그 호의를 도움에 대한 보답 정도로 받아들였다.

“지난날 제게 이 일을 돕는 이유를 물으셨죠.”

“그랬었지.”

“그 질문 제가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장로님께서는 무슨 연유로,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살리려 하는 것입니까. 역시 가문의 명예 때문입니까?”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이 집안에 시집을 와 내 청춘과 황혼을 모두 바쳤는데 망하게 놔둘 순 없지 않나.”

해월의 예상대로 노온은 솔직하고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이에 해월도 동의했다. 자신의 많은 시간을 바쳐온 것은 쉽게 저버릴 수 없다.

“그 부분은 저도 동감합니다. 진절머리가 나지만 놓을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그의 아버지나 고향처럼.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도 놓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떠나보낼 수 없어서다.

그것마저 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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