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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설귀-35화 (35/124)

35화

“내가 날 치유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

“하면 스스로 치유할 수 없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목마르다고 자기 피를 뽑아 마시는 사람은 없잖아.”

“…그렇군요.”

“돈만 있었어도 진작 치료받았지. 이래서 돈이 있어야 되는데.”

해월이 중얼거렸다.

“사부께서는 돈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 돈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돈은 거짓말을 안 하잖아.”

“…근사한 얘기는 아니군요.”

“언제는 근사한 적 있었냐.”

해월은 괜히 툴툴댔다. 스스로도 세속적이라는 것을 알아서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해월에게는 딸린 식구들이 많았다.

문득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비단 오늘 하루의 시간뿐 아니라, 자신이 연진을 만나고 이곳에서 같이 지내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된 느낌이었다.

지금 이 시간도 곧 과거가 되어 기억 속에만 남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해월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꺼내기로 했다.

“사실… 일전에 장로님을 뵀었어.”

“…예?”

“말 안 하고 있으니까 괜히 숨기는 기분 들어서 얘기하는 거야. 네 걱정 많이 하시더라.”

연진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 장로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라는 말 하나로 누군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생각이 많아진 듯한 제자를 보던 해월은 그의 시야에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나도 이런 식으로 배려 없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네가 집안 얘기를 꺼리는 건 잘 알겠지만 이젠 얘기해줬으면 해.”

‘네 숙부가 너를 없애려 하는데, 이걸 막으려면 네가 진정한 가주라는 것을 증명해야 해.’

증명을 위해선 언제나 증거가 필요했다. 무형의 것보다는 유형의 것이 확실했다. 마치 돈처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네게 묻는 것이 강요라는 것쯤은 알아. 이건 내 욕심이야. 내가 떠나기 전에 너를 최대한 많이 돕고 싶어서.”

“…….”

“그러니 말 해줘.”

가리는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진솔하게 말을 전달했다.

“말하기 싫은 거야?”

“…싫다기보단, 조금 낯설고 어색합니다.”

해월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진 않는 터라 연진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배려가 동시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없었고, 마음은 급했으니까. 그리고 여기엔 일종의 믿음도 있었다.

‘내가 물으면 대답해 줄 거라는 거.’

치졸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게 정이 든, 그리고 제가 정을 들인 이 가여운 도련님은 이 질문에 답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

이로써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는 남을 돕고 싶어서 돕는 게 아니야.’

타인을 도움으로써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만족감. 선량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착각. 그것에 평생을 바치며 살아왔다는걸.

***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자애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제게 늘 최선을 다하셨어요.”

지금은 기억조차 흐린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진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서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깨달았어요. 제가 모친의 빈자리를 느끼지 못한 건, 그 모든 상실감을 온전히 아버지께서 감당하셔서였습니다.”

연진은 제 아버지를 그렇게 설명했다. 자신의 반려를 잊지 못하고, 그 아픔을 내보이지도 못한 채 그저 굳건하게 버티던 사람.

“아버지께서는 늘 어머니를 그리워하셨어요. 제겐 조금의 내색도 하지 않으시고, 그렇게 병들어가셨던 겁니다.”

“…상사병이로군.”

떠난 이를 한없이 그리워하다 자신을 죽이는 병. 해월과 연진 모두 그 병에 대해 깊이 공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곁에 없으면 그리워질 누군가를 알고 있기에.

연진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버지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챘을 땐 이미 너무 늦었었어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이셨기에 저는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 곁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연진은 가끔씩 그때의 꿈을 꾼다.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과 유언, 그리고 자신을 향한 그 서글픈 눈빛을.

아직도 궁금했다. 아버지는 눈을 감기 전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명계에서 자신의 반려를 만나길 기대했을까? 홀로 남을 자식이 안타까웠을까?

답이 무엇이든 그걸 알 방법은 없었다.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해야 하는 물음이었다.

“…그 뒤로는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이야기가 갈무리되자 해월은 품어왔던 의문을 내던졌다.

“내가 들은 게 하나 더 있는데.”

“무엇을… 말입니까.”

“네 선친의 유지가 있었다며. 그건 역시 헛소문이었나?”

일전에 원복 덕에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연진이 선대 가주의 유지를 가지고 있는 탓에 숙부인 강석요가 그를 박대하는 것이라고.

“그것은….”

연진이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망설이는 것인지, 숨기고 싶은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하게. 해월은 배려해야겠다는 마음보다 사실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명문 세가는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 집단이야. 그런 상황에서 유지란 더없이 중요한 명분이고.”

연진이 이것을 모르리라 생각하여 일러주는 것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평범한 독촉이다. 유지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라고.

“명분이라 하시면 …저더러 가주가 되란 말입니까.”

의문을 품은 목소리에 해월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적당히 둘러대려던 해월은 이내 솔직히 답하기로 했다.

“그래, 돌려 말하지 않을게. 가주가 되어 줘. 그래야 네가 살아. 유지가 거짓이 아니라면 사용할 가치는 충분해.”

“만일 제가 그러고 싶지 않다면요.”

여기까지는 해월이 예상했던 반응이라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야 별수 없지. 네가 원치 않는데 내가 뭐라고 강요할까.”

“…….”

“다만 묻고 싶긴 하네. 널 망설이게 하는 게 무엇인지.”

강요하지 않겠다는 말은 거짓이고, 망설이는 게 무엇인지 묻는 말은 진실이었다.

‘난 내 만족이 우선인 사람이야.’

연진의 진심이 무엇을 택하든 해월은 그저 그가 잘 살아가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강석요를 완전히 몰락시키고 그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있다.

느닷없는 해월의 말에 연진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차분히 제가 할 말을 정리했다.

“사부, 저는 이대로 사는 게 좋았었습니다… 한데 제게도 바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주의 자리는 아닙니다.”

바라는 것이 생겨났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서서히 번져나간 바람이었다. 그 마음을 바람 같은 이 사람이 알아줄까.

그 물음은 아버지의 일과 마찬가지로 답을 알 수 없었다.

해월은 연진의 말이 못내 착잡하게 느껴졌다.

“가주의 자리가 아니면 무엇을 바라는데? 네 숙부와 사촌 형을 원망하잖아. 그럼 그들을 없애야 하는 게 순리 아닌가.”

“…예?”

“이상하잖아. 원망한다면 없애는 게 맞는 건데 무얼 망설이느냐고. 어차피 강석요만 아니었어도 가주의 자리는 네 것이었잖아. 자리가 제 주인 찾는데 주인이 거부하면 어떡해.”

해월의 말에 연진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해월은 무언가 낌새를 눈치챘다.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넘어갈 생각하지 말고 유지에 관해서 사실대로 말해.”

“…….”

침묵은 곧 긍정의 의미였다. 해월이 추궁하자 연진은 당황한 듯 고개를 한 번 떨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부친의 또 다른 유지가 제게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뭐…?”

또 다른 유지가 있던 것이 아니라니?

해월에게는 꽤나 충격적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귀족 가문이 명분에 살고 명분에 죽는다는 말은 그냥 한 것이 아니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중요한 실정에 유지의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니.

벌써 갈 길이 구만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엔 어찌어찌 연진이 제 숙부에게 죽는 것은 면한다 해도, 해월은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그 후의 일은 관여할 수 없었다.

꼭 귀향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해월은 연진을 지켜낼 시간과 여유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두고 떠날 수도 없었다.

죽거나, 혹은 예전처럼 별채에 완전히 갇혀 지내야만 할 텐데 그렇게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해진 해월을 향해 연진이 말을 보탰다.

“제게 있는 것은 가주의 유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유언입니다.”

연진은 방에 있던 병풍 그림의 귀퉁이를 떼 냈다. 그러자 서찰 하나가 병풍에서 떨어져나왔다.

“이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쓰신 서신입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이것을 무덤에 함께 묻어달라고 하셨어요. 하지만 숙부님께서 상주를 하셔서 함께 묻지 못했습니다.”

서신에는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비단으로 감싸진 서신은 그 애틋한 정취를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연진은 이 서신을 누군가에게 보일까 늘 조심하며 숨겨왔다. 포기에 익숙해지면서도 이 서신 하나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서신을 제게 건네주셨고, 이것을 흘러가듯 본 하인들이 잘못된 소문을 내어 그런 것 같습니다. 겉면이 똑같으니까요.”

연진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지라 해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소문이란 아주 작은 돌멩이를 커다란 바위로 만들고는 하니까.

그건 그렇고 일이 이렇게 된 걸 줄이야.

‘…참 곤란하네.’

여러모로 곤란한 사실만 들었지만 모르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거기에 일말의 위로를 얻고 다른 대책을 강구하는 수밖에.

“뭔가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린 것 같네.”

“저도 남에게 이 얘기를 한 것은 처음입니다.”

연진은 장로들에게도, 원복에게도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포기하고 있던 것이다. 어차피 나아지지 않을 테니 기대조차 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않고.

자세를 낮추고 웅크린 채 평생 혼자 간직할 비밀로 여겼다.

그동안 연진에게 진실을 물은 자가 해월만 있던 것은 아니다. 강석요와 강석철을 비롯한 한주 강 씨와 관련된 모든 이들이 연진에게 유지의 행방을 물었었다.

그 물음들에 연진은 늘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그들에게 뚜렷한 반항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해월은 반기도, 백기도 들지 못한 연진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게 취하지 못하는 자의 심정을 감히 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맙고, 또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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